샐러드·밥·패티가 정확히 '삼국지' 칼질할 필요도 없이 부드럽게 몸을 연다

입력
수정2019.06.01. 오전 9:51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함박스테이크편
서울 연남동 '타비함박'


12시간 넘게 밖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매일 아침 1000원짜리 한 장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집을 나섰다. 인스턴트나 레토르트(간편식)라는 영어 단어 없이 보내는 하루가 드물 수밖에 없었다. 카레와 라면이 돌림노래처럼 일주일을 장식했다. 3분이면 익는 함박스테이크는 고급이었다. 그 고급 스테이크를 먹으려면 평소엔 조금이라도 싼 걸 사서 거스름돈을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몇십~몇백원의 푼돈을 모은 다음에야 동그란 함박스테이크를 앉은뱅이 밥상에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불만이 많았다.

"형아, 이거 너무 적다. 금방 없어진다."

"니가 빨리 먹으니까 그렇잖아. 소스랑 밥이랑 비벼 먹어."

서울 연남동의 ‘타비함박’(작은 사진)은 배고픈 손님들의 기대를 반드시 충족시켜 주는 가게다. 우아한 자기 접시 위에 푸릇한 샐러드와 밥, 패티가 정확히 ‘삼국지’를 이루는 함박스테이크(큰 사진)는 먹는 이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나의 잔소리도, 밥으로 배를 채우게 하려는 계획도 젓가락으로 슥슥 잘라지는 부드러운 함박스테이크 앞에선 오래된 맥주 거품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분기에 한 번 정도 아버지와 함께 경양식집에 가면 파슬리와 마카로니 샐러드가 한편에 놓인 함박스테이크를 만날 수도 있었다. 후추를 친 크림수프로 입맛을 돋우고 파슬리까지 먹어치워야 배가 찼다. 한동안 겨울 제비처럼 자취를 감췄던 경양식집은 근래 '복고' 바람을 타고 다시 돌아오는 중이다. 하지만 이 '돌아온 겨울 제비' 중에 SNS에 찍어 올리기 좋은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한 곳은 많아도, 마음에 남는 맛까지 내는 곳은 드물다. 청와대 근처 팔판동에서 중구 예장동으로 옮긴 '그릴 데미그라스'는 상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드문 곳이다. 두툼한 목에 하얀 수건을 걸친 주인장은 요리사보다는 성악가가 어울리는 풍채를 지녔다. 음식도 그를 닮아 묵직하고 뚝심이 있다. 자리에 앉으면 나오는 따뜻하고 폭신한 롤빵과 감자, 마카로니 샐러드 한 접시는 먹기도 전에 식욕을 상한가로 끌어올린다. 석유처럼 걸쭉한 발사믹 식초와 새하얀 모차렐라 치즈, 포토샵을 한 것처럼 새빨간 토마토를 조합한 카프레제 샐러드나 소고기를 튀긴 비프가스 모두 한 번은 거쳐 가야 하는 메뉴다. 그래도 그중 제일은 이 집의 함박스테이크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쓴 바른 글씨처럼 반듯하고 정확해서 미각의 '스위트 스팟'(sweet spot)을 비켜나가는 일이 없다. 맨 위에 올라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는 샛노란 기운이 쨍쨍하고 밑에 깔린 데미글라스 소스는 마그마처럼 맛과 향의 밀도가 짙다. 아늑한 실내와 격 있는 음악은 음식을 말없이 거든다.

다음으로 갈 곳은 서울 연남동의 터줏대감 중 하나인 사러가마트 푸드코트다. 이곳에 자리 잡은 '타비함박'은 반듯한 가게 없이 좌석을 나눠 쓰는 푸드코트에 있는 식당이라고 가볍게 볼 곳이 아니다. 일본에서 요리를 공부한 주인장이 내놓는 함박스테이크는 양과 질에서 전국 상위 10% 안쪽에 있을 게 틀림없다. 원육을 받아 가게에서 직접 갈아 쓰고 패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따로 기름을 첨가하지 않는 것은 이 집의 남다른 출발점이다. 메뉴는 오리지널, 치즈, 토마토크림, 카레 등 네 가지 함박스테이크와 야키소바, 오코노미야키 같은 일본 길거리 음식들이다. 주문이 들어오면 요리를 시작하는지라 '빨리빨리'를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기다림은 배고픈 객을 배신하지 않는다. 함박스테이크를 시키면 우아한 자기 접시 위에 푸릇한 샐러드와 밥, 패티가 정확히 '삼국지'를 이뤄 등장한다. 그 밑에 잔잔히 깔린 소스는 든든한 배후가 되어 모두를 아우르며 패티는 칼질할 필요 없이 부드럽게 몸을 연다. 메밀면을 철판에 생강과 함께 볶고 가다랭이포, 파슬리, 계란프라이를 올린 야키소바는 달고 짜며 푸짐한 저잣거리의 서정을 고스란히 옮겼다. 마트에 장을 보러온 사람들, 서로 손을 잡고 장바구니를 또 다른 손에 든 이들은 음식 사진도 셀카도 찍지 않으며 온전히 음식만 먹는다. 빌딩과 아파트숲 너머로 불타오르는 석양처럼 언제나 곁에 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 모난 곳 없이 동그랗고 유순히 몸을 여는 함박스테이크처럼, 조용히 작은 자리를 지키는 단단하고 우아한 일상이 있다.

[정동현]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네이버 메인에서 조선일보 받아보기]
[조선닷컴 바로가기]
[조선일보 구독신청하기]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