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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 인터뷰] ‘기생충’ 봉준호 감독 “휘몰아치는 난장판과 깽판과 카오스, 장르 영화의 특권”

[텐아시아=유청희 기자]


봉준호 감독./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빈자와 부자, 서로 만날 일 없던 두 가족이 ‘과외’를 통해 만난 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의 줄거리다.

중산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플란다스의 개’를 시작으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담은 ‘살인의 추억’, 골프장 개발이 이뤄지는 소도시 여성들의 비극을 그린 ‘마더’, 계급을 열차로 풀어낸 ‘설국열차’와 공장형 축산업에 반대하는 ‘옥자’를 지나 ‘기생충’까지. ‘봉테일’ 봉준호 감독의 작품은 영화적 유희와 묘사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기보다 장르의 변주와 함께 자연스럽고 적나라하게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기생충’은 봉준호 식 사회지형도의 결정판이다.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황금종려상을 품고 돌아온 봉 감독을 만났다.



10. 황금종려상을 품에 안고 돌아온 기분이 어떤가?

봉준호 감독: 시차 적응에 난항을 겪고 있어 상태가 안 좋다. 적응이 됐다 싶으면 역습이 시작된다. 허언을 하거나 방언이 터질 때가 있다. 스포일러 하지말아 달라고 해놓고, 내가 먼저 얘기를 한다. 죄송하다. (웃음)

10. ‘옥자때는 영화제 측이극장에 상영하지 않은 영화’라며 반발했는데 2년 사이에 판도가 뒤집혔다.

봉준호 감독: ‘옥자’ 때는 뭐, 이상하게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많았다. 상영 사고도 있었고, 이미 영화제와 넷플릭스가 ‘되네 안 되네’ 하면서 논쟁을 하고 있었다. 논쟁을 다 정리하고 우리를 초청하지, 왜 그랬을까. (웃음) 2017년 칸의 이슈몰이에 공헌한 것으로 만족했다. 스트리밍시스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다. 이번에는 차근차근 영화 얘기를 하고 있으니 만족한다.

10. 칸에서 송강호에게 무릎 꿇고 트로피를 전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봉준호 감독: 몸이 너무 동글동글해서 자세가 안 나오더라. 날렵하게 각이 딱 잡혔으면 좋았을 텐데.

10. 수상 현장에서 마이크를 배우에게 넘긴 건 감독으로서 배우, 스태프에 대한 존중의 상징적인 태도처럼 보였는데?

봉준호 감독: 과거의 시상식 모습을 생각해 보면 특별하진 않았던 것 같다. 감독과 고교생 배우들 수십 명이 올라가서 축하하는 사례들도 있었으니까. 제작자인 곽신애 대표도 그렇고, 당연히 ‘다 같이 올라가야지’라고 마음은 먹고 있었는데 본인들이 쑥스러워해서 내가 계속 같이가자고 말했다. 같이 올라갔는데, 또 이 위대한 배우가 병풍이 되면 안 되니까 내가 뒤로갔다. 그리고 원래 난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이다. (송)강호 형님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홍경표 촬영감독을 비롯해 미술감독, 현장 아티스트들도 다 함께 올라가고 싶었다. 홍 감독은 영화제 당시 일 때문에 태국에 있었는데, 인터넷 라이브로 다 봤다고 한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인연이네. 각지에서 축배를 드는 사진들이 나한테 도착했다. 서울에 이미 돌아갔던 배우들도 집에서 혼자 맥주 캔을 들고 삼삼오오 메시지를 보내왔다. 인터넷이 좋긴 좋더라.

10. 칸에서 기생충 국내 시사는 다른 있던가?

봉준호 감독: 칸에서 영화를 보면 화면에 불어가 있고, 밑에는 영어 자막이 뜬다. (웃음) 한국에서는 깨끗한 화면을 보니까 후련했다. 한국말도 더 잘 들리고. 내가 자막에 관여를 많이 해서 어쩔 수 없이 자막에 신경 쓰게 된다. 번역자인 달시 파켓(Darcy Paquet) 아저씨와 ‘플란다스의 개’부터 호흡을 맞춰오고 있지만 감독으로서 내가 짚어줘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렇게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라 뤼미에르 극장에 앉아서는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거다. ‘아, 저 단어였나. 바꿨던 것 같은데.’ 국내 시사는 그게 없어 좋다. 순수한 국내 관객의 반응은 개봉하는 주 중에 잘 지켜보려고 한다. 이미 다 예매를 해놨다. 장소는…. 말할 수 없다.



영화 ‘기생충’ 스틸컷.



10. 많은 사람들이기생충’을 보고 김기영 감독의하녀’충녀’를 이야기했다. 특별한 영향을 받았나?

봉준호 감독: 김기영 감독님의 매니아였다. 처음 케이블TV 개국할 당시인 1990년대 중반, 영화학교 갓 졸업했을 때, 그 분의 영화를 처음 접했다. 생활비도 없고 진짜 가난할 때였는데 나름 영화인이랍시고 유료 영화채널을 끊었다. 영화(기생충) 속 기택(송강호) 집의 3분의 2정도 되는 아파트 살던 때였다. 반지하는 아니었지만. 그 채널 프로그램 기획자가 누구인진 몰라도 꽤나 매니악했다. 그 채널의 김기영 특별전을 처음 보곤 광분 상태였다. 공테이프에 녹화하던 시절이었는데, 엄청 녹화를 하면서 ‘하녀’ ‘충녀’ ‘이어도’를 봤다. 김기영 감독님이 살아계시다면 이 영화를 정말 보여드리고 싶은데… 부자, 부르주아의 욕망과 욕정. 자본주의 시대에 침투해오는 것을 그리는 것의 대가. 꼬마 아역배우 안성기가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계단 등. 이미지가 강렬하다. ‘하녀’와 ‘기생충’을 옛 극장에서 하듯이 동시 상영을 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10. 이름을 얘기하고 싶다. 기택(송강호 ) 충숙(장혜진 ). 이름이기생충이라는 제목을 품고 있는데, 제목을 정하기 전부터 이름을 미리 정했나?

봉준호 감독: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이름이다. 기택. 비슷한 이름의 정치인이 있었던 걸로 안다. 그런 자연스럽고 허허실실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기우는 알다시피 걱정이 많아서 기우다. ‘기우에 불과하다’ 이런 느낌. 가족을 가족답게 보이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 ‘기’자 돌림이 중요하긴 했다. 도입부에 화장실 변기 앞에 쪼그려있는 최우식과 박소담의 얼굴처럼. 일부러 그렇게 찍었다. 둘이 정말 똑같아 보이게. 가족이라는 낙인을 찍은 거다. 그런데 기와 충은 섞어도, 생까지 가면 티날 것 같았다.

10. 영화가 항상난장판처럼 휘몰아치면서 전개된다. 그게 당신 눈에 비친 사회의 이미지일까?

봉준호 감독: 카오스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그 느낌을 내가 좋아하긴 한다. ‘이 부분은 내 분야야’라고 하는 게 카오스 장면과 취조 장면이다. 혼동, 무질서의 상태. 이 영화에서도 많이 있지 않나? 짜파구리 시퀀스처럼. 그런 걸 음악과 함께 풀어낼 수 있는 게 장르 영화 감독의 특권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이창동 감독이나 미카엘 하네케 감독에서 이런 장면이 나올 순 없지 않나. 물론 동경하는 분들이지만 ‘난장판 깽판 카오스’ 장면에 한해서 말이다. (웃음) 휘몰아칠 수 있는 건 장르의 특권이다.



휘몰아칠 수 있다는 것은 장르영화의 특권이라는 봉준호 감독./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10. 아버지 봉상균 씨가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이고, 외할아버지는 ‘천변 풍경’ 등 사회 속 인간을 그린 세태주의 소설가 박태원이다. 문화적으로나, 사회를 보는 시선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느끼는지?

봉준호 감독: 솔직히 말해서 외할아버지는 동화 속의 인물 같은 느낌이다.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이라서 북한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5남매인데, 외할아버지와 큰 할아버지가 6.25 때 북한 쪽으로 갔고 우리 어머니와 4남매가 남한으로 왔다. 전쟁 통에 찢어졌다. ‘유명한 소설가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라다가 고등학교 소설 시간에 ‘9인회’가 나오니까 신기하더라. 사진을 보면서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나?’ 묻곤한다. 내가 보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외가 쪽을 닮았다고 하는데, 만나본 적도 없어 아무 기억이 없다. 우리 형이 영문학을 전공했고, 나는 아버지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10. 아버지에겐 어떤 영향을 받았나?

봉준호 감독: 재작년에 돌아가셨는데, 항상 집에서 그림을 그리셨다. 서가에 슥 들어가면 신기한 책들이 많았다. 1970년대에 해외 출장을 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비교적 많이 다니셨다. 외국에서 가져온 그래픽 디자인집, 사진집 이런 것들이 많았고, 나도 되게 많이 봤다. 나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다섯 살때부터 계속 만화를 그렸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샷을 그리고 배열했다. 콘티, 스토리보드 그리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다. 이번에 ‘기생충’도 100% 내가 그렸는데, 출판사에서 제의가 와서 책으로 출판될 것 같다.

10. 아버지한테 국립영화제작소 미술실 실장 이력도 있던데.

봉준호 감독: 맞다. 김기영 감독님 하녀 타이틀을 그리셨다고 한다. 꼬마 안성기가 실뜨기를 하고 있고 그 위에 ‘하녀’라고 타이틀이 내려온다. 오래 하시지는 않았는데 영화인들을 많이 접하셨다고 했다. 그때 영화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웃음) ’애들이 좀 거칠더라’라고. 무서우셨나보다. 1960년대 니까 기가 좀 셌을 거다. 넓게 보면 영화인 생활은 2,3년간 하신 건 맞다. 처음에는 반대도 많이 했다. 그 나이 부모 세대들은 원래 ‘사람은 월급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는데, 나중에 내가 취직할 생각이 없는 걸 알자 지원도 해주셨다. ‘백색인’의 제작비 일부를 대줬으니까. 아버지가 ‘설국열차’까지 보셨다. 기생충과 ‘옥자’를 못 보셨다. 참 보여드리고 싶은데.



봉준호 감독./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10. 그동안 궁금한 있었다. ‘기생충에도 10 여성이 나오지만, 거칠게 나누면 그동안 10 여성들은 ‘마더’ 등에서는 섹슈얼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고괴물이나옥자에서는 희생자이지만 뛰어가는 주체로 크게 가지로 나눠지더라. 소녀를 통해 말하고 싶은 있다면.

봉준호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괴물’ 때 고아성 씨 얼굴에 하수구가 검게 묻어 있고 단발머리한 옆모습이 해외 포스터로 쓰였다. 그 이미지 봤을 때 나도 ‘미야자키스럽네’ 했다. ‘옥자’ 때는 본격적으로 그렸고. 미야자키의 소녀들도 항상 다이나믹하지 않나. ‘미래소년 코난’의 라나 같은 이미지를 항상 만들어보고 싶었다. 작은 소녀 같아 보여도 파괴력이 있고 파워풀하다. 그가 코난을 구해줄 때도 많고. ‘미래소년 코난’은 1980년대 중고생이 열광한 만화다. 중학교 때 매주 봤다. ‘특집, 무슨 경제를 논하다’ 이런 걸로 결방되면 화나서 KBS에 엽서까지 보낸 적이 있다. 결방 좀 하지 말라고. (웃음) 그때는 미야자키인지도 모르고 그냥 좋아할 때였다. 그림체나 동작, 연출력이 일본 애니메이션 내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어렸을 때 본건 혈관 속에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대학교 이후에는 공부하듯 보는 면이 있으니까.

10. 이렇게 듣고 보니, 헤어스타일이미래소년 코난’에 영향 받은 느낌인데?

봉준호 감독: ‘스타일’이라는 건 뭔가 세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건 그냥 방치다. 감는 것과 빗는 것 외에 다른 행위가 없다. 심지어 턱시도를 입어도 머리는 그냥 냅둔다. 오일 같은 건 못 바르겠다. 물에 젖은 털처럼 된다. 어떻게 하려야 할 수가 없다. 유일한 다른 선택은 삭발이다. 2, 3년 주기로 삭발하는데 좋다. 버스나 지하철 타도 아무도 모른다. 하하.

10. 당신의 이야기는 장르적 재미와는 별개로, 사회적인 문제를 이야기로 담는다. 빈과 가운데 스스로를 부에 가깝다고 느낀다면 없는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나?

봉준호 감독: 1990년대 중반, 영화학교를 마치고는 기택 집의 3분의 2 정도 되는 공간에 살았다. 지금은 극중 이선균 집의 5분의 1, 4분의 1 정도. 단독주택 아니고 아파트다. ‘기생충’ 속 가족이 양극화의 양극을 다루고 있으니 나는 중간이지 않을까. 우리 아버지는 디자이너이고 교수였으니까. 내 친구들 중에는 가난한 애들도 많았다. 집이 비닐하우스이기도 하고. 반대로 부자인 친구도 있었다. 양쪽 친구들이 다 있었다는 데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10. 사회가 공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봉준호 감독: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리스펙트’, 그게 붕괴될 때 갑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이 생겨나지 않나. 최소한의 리스펙트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유지되어야 할까를 생각한다. ‘기생충’에는 그 지점에 대한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나온다.

10. 황금종려상으로 한국영화계에 경사를 안겨줘 행복감을 만끽할 때이지만,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봉준호 감독: 글쎄, 기본적으로 난 불안하다. 신경정신과 의사도 그랬다. 당신은 약을 먹어야 한다고. 그런데 글을 써야 하는데 약을 먹으면 멍해진다. 불안해야 써지기도 하고. 시나리오는 지금도 쓰고 있다. 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썼다. 칸은 이제 다 과거가 됐다.

유청희 기자 chungvsky@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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