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팅맨' 조각가 유영호, 겸손·평화·소통을 예술로 만들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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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6.10. 오전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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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 4·27선언 1주년 기념식이 열린 판문점 공연 무대 양측에는 높이 6m의 조형물 2개가 마주보고 섰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하늘색 남자 조형물 ‘그리팅맨(Greeting man)’이다. 조각가 유영호씨(54)가 만든 이 조형물은 겸손·화해·평화를 상징한다.

사실 그리팅맨은 남측 평화의집 앞과 북측 판문각 앞에 마주보고 서 있어야 했다. 북측에 이 조형물을 설치하지도 못했지만 남측에 세워진 이 그리팅맨도 행사 후 철거됐다. 유 작가는 “이 작품을 판문점에 기증하려 했지만 통일부는 유엔사 허가를 얻어야 하는 등 복잡한 문제가 많다며 난색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파주 작업장 한쪽에 중병에 걸린 듯 누워 있는 그리팅맨을 보면 단절된 남북관계와 틀에 매달린 우리 공무원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애처롭기까지 하다.

조각가 유영호씨 / 김창길 기자

통일부 난색으로 판문점 기증 불발

-이 그리팅맨을 판문점에 세우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팅맨은 이미 해외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2012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지구 대척점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 중심가에 처음 세웠다. 나는 세계의 경계, 분단, 접점 그런 현장에 이 그리팅맨을 세우고 있다. 지구 북반부와 남반부 경계인 에콰도르 키토 적도선상에 그리팅맨과 ‘미러맨(Mirror man)’을 세웠다. 이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동양과 서양의 경계인 터키 이스탄불에 미러맨 설치를 섭외 중이다. 우리 판문점이나 군사분계선상에 꼭 세우고 싶다.”

-남반부와 북반부의 경계인 에콰도르, 동·서양의 경계인 이스탄불, 남북의 경계인 판문점 등 꼭 ‘경계’라는 지리적 의미가 있는 지역을 골라 작품을 세우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팅맨은 국경과 인종과 빈부를 초월해 겸손·화해·평화를 의미한다. 남북이 진정으로 겸손하게 마음을 비우고 서로에게 인사해 본 적이 있는가. 북측도 진심으로 남측에 고개를 숙여 봤는가. 세상에 우리 휴전선만큼 무지막지한 경계선이 어디 있나. 중무장한 무기와 수십만 군인이 대치하는 이런 곳이 어디 있나. 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민족인가. 내 작품은 그런 현장에 세워져야 한다.”

-한국에도 그리팅맨이 여러 곳 서 있다.

“파주 헤이리에 있는 선배 건물 앞에 작은 그리팅맨을 처음 세웠다. 서울 을지로에 6m 높이 그리팅맨이 있고, 제주도와 내 고향 강원 양구에도 세웠다. 가장 큰 것은 경기 연천 옥녀봉에 10m짜리 그리팅맨을 세웠다. 원래는 강 건너 북쪽에도 세워 마주보고 인사하는 것을 연출하려 했는데 아직 북측과 합의하지 못해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크다. 해외에 설치하는 그리팅맨은 6m로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크기다. 유 작가는 요즘 ‘미러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 그리팅맨은 부드러운 곡선의 알루미늄 주조로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스테인리스판을 일일이 자른 다음 하나하나 용접해 제작한다. 특히 각진 면을 강조한 미러맨은 밤에 조명을 받으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미러맨은 2013년 상암동 MBC미디어센터 앞에 세워졌고, 영화 <어벤져스>에 등장해 유명해졌다.

미러맨은 가운데 거울(사실은 빈 공간)을 두고 마주보는 형상이다. 그는 “미러맨은 바로 자신과의 만남을 의미한다”면서 “다른 누구를 만나든 그 객체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보는 것이 바로 소통”이라고 말했다. 그가 그리팅맨과 미러맨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겸손·화해·평화·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이 ‘21세기 심벌’이라며 이렇게 주장한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작품은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뇌하는 인간 단테를 형상화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해머링맨’이다. 처음에는 노동에 대한 순수한 시선을 의미했으나,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상징하는 대표적 작품이 됐다. 도구는 문명을 세울 수 있지만 한편으로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쓰였다. 나는 21세기에는 겸손·화해·소통이 대표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인간이 인간과 소통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그리팅맨과 미러맨은 이런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심벌이다. 그래서 내가 인생을 걸고 세계 곳곳에 작품을 세우는 것이다.”

4·27선언 1주년 기념식이 열린 판문점에 세워졌던 그리팅맨. / 유영호 제공

평양과기대에 세울 미러맨 작업 중

그는 전세계에 그리팅맨과 미러맨이 20개 정도 세워지면 자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불탑을 세우는 것이 불심을 전파하는 상징인 것과 비슷하다. 기독교의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실제 유 작가는 몇 년간 ‘절밥’을 먹었다. 그렇다면 그의 예술작업은 일종의 ‘종교적 신념’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팅맨 하나 제작하는 데 재료비만 1억2000만원, 컨테이너 운송비와 기타 경비를 합하면 2억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 그러나 그는 자산가가 아니다. 결혼도 못하고(안하고) 전·월세를 전전하다 최근 18평 아파트 하나 마련했을 정도다. 처음에는 기업에 협찬을 얻으려 했지만 포기하고, 작은 그리팅맨을 만들어 팔거나 국내에 세운 작품에서 얻은 수익으로 충당한다.

요즘 그는 파주 작업장에서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다. 오는 10월 3일 평양과학기술대 개교 10주년을 맞아 정문 앞에 세울 미러맨이다. 평양과기대는 2009년 남측과 해외동포 그리고 북측이 공동으로 세운 과학대다. 2010년부터 정보통신·산업경영·농업식품공학대학원 등에서 학부 100명, 대학원 60명의 학생을 뽑고 있다.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30여명의 해외교포들이 교수로 있는 이 대학은 북한에서 매우 수준 높은 대학으로 꼽힌다. 이 대학은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어도 ‘기적같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 작가는 “남북이 서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을 형상화했다”면서 “실물은 아직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작품 역시 그가 평양과기대에 기증하는 것이다.

유 작가는 또 9월 6일 개인전 준비에 바쁘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주제는 ‘연결과 만남’이다. 메인 작품은 두 사람이 마주보며 어깨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남북이 자세를 낮추고 서로 힘을 합치는 모습”이라며 “남북 군사분계선 가운데 세우면 딱 좋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 때 DMZ 한반도생태평화공원 건립을 제안했지만 북측이 거부했다. 최근 북측은 경기도를 통해 평화공원을 수용하면서 외세를 극복한 한민족의 역사를 알리는 기념관도 짓자고 제안했다. 우리 측은 공감했지만 유엔 제재 등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남북이 DMZ 안에 평화공원을 만든다면 이 작품이 ‘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준비하는 또 다른 작품은 사람이 양팔을 길게 벌린 형상의 다리다. 작품 이름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의미는 ‘위 머스트 커넥티드’, 즉 우리는 만나야 한다는 민족의 연결이다. 그는 전시는 모형으로 하지만 실제 다리로 건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파주 성동IC 앞 통일전망대와 강 건너 북측 장단반도를 연결하는 곳에 건설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 다리가 건설되면 미국 자유의 여신상처럼 상징적 조형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평화기념관이라 이름만 붙였지 실제는 탱크와 야포, 지뢰를 전시한 사실상 안보전시관 혹은 전쟁기념관이 대부분이다. 명실상부 평화를 상징하고 화해를 가르치는 조형물이나 기념관이 별로 없다. 그는 “파주 임진각은 분단의 엄숙한 현장인데 바이킹과 꼬마열차 같은 아이들 놀이시설이 들어서 있다”면서 “독일 친구와 임진각에 갔다가 우리의 천박한 지성 수준을 드러내는 것 같아 창피했다”고 말했다.

독일 베를린 장벽 기념관이나 홀로코스트 기념관,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캉 평화기념관 등 전쟁의 상흔이 서려 있는 곳이 임진각처럼 유흥지화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유 작가는 1999년부터 6년간 독일에서 공부해 누구보다 전쟁과 분단 현장에 익숙하다.

그가 그리팅맨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것도 독일에서였다. 그는 “독일에서 인사하는 형상작업을 처음 시도했는데 한 유명작가가 ‘인사는 모든 관계의 시작’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부터 인사와 관련된 형상에 매달렸다. 바로 그리팅맨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비디오로 만들다가, 작은 모형으로 만들었다. 가장 겸손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 고개를 10도, 20도, 30도 등 여러 가지 실험을 거쳐 비굴하지 않으면서 가장 겸손한 15도로 만들었다.

조각가 유영호씨가 경기도 파주 작업장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귀국 후 대학 교수 시도하다 포기

유 작가는 196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이북(평북) 출신으로 서울에 공부하러 왔다가 6·25가 나자 국군에 자원입대, 국군 대위로 예편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는 자식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모두 서울로 보내 공부시켰다. 그는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 작품을 보고 ‘황홀하다’는 생각이 들어 1984년 서울대 조소과에 진학했다. 학생운동이 이념적으로 활발히 분화할 당시 그는 미대 학생회 부회장과 지하서클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는 정의로움을 가슴에 품고 살던 시대였다”면서 “교도소는 가지 않았지만 경찰서 유치장은 여러 번 갔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은 생각도 안하고 정신적 방황을 했다”고 말했다. 출가는 아니고 전국 유명 스님을 만나러 다녔다. 5년 만에 ‘하산’한 그는 3년간 선화예고 실기선생을 했다. 그때 독일에서 ‘한국의 해’를 기념해 열린 한국작가 초대전 10명에 ‘운 좋게’ 그의 작품이 뽑혔다. 자신이 살던 봉천동 판자촌을 시멘트로 만든 작품으로 제목은 ‘봉천2동’이었다. 1998년 전시회를 위해 독일에 간 그는 아예 뒤셀도르프 콘스트아카데미 입학 허가를 얻고 눌러 앉았다. 마침 학비도 들지 않았다. 그는 이 곳에서 6년간 공부한 끝에 ‘마이스터 슐러’ 자격을 받았다. 독일 예술대학은 도제식으로 교수가 제자 과정을 마치면 ‘마이스터 슐러’ 자격을 준다. 우리로 치면 박사과정 격이다.

2003년 귀국한 그는 보통 다른 사람처럼 교수가 되기 위해 매달렸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모교인 서울대를 비롯해 여러 대학 강의를 다녔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5개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러나 그는 “7년 전 어느 순간 ‘교수는 내 길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교수를 포기한 것은 ‘성격 탓’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학교수는 단순히 ‘학생을 가르치는 실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니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부분 예술이 그렇지만 미술도 배고프다. 그는 “현대미술을 통해 돈을 벌고 명성을 떨치는 작가는 1만명 중 10명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낙오자로 치부된다”면서 “그런 주류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고도 작품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신념을 강조했지만 기자에겐 일종의 ‘오기’로 들렸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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