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여신문명 종말, 폭력적 유목민 탓”은 무죄추정 원칙서 어긋난다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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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2.12. 오후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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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여신세계의 종말과 초원



■ 다뉴브, 여신의 요람

지구상에 다뉴브처럼 큰 강은 꽤 있겠지만 그렇게 신비로운 강은 드물 것이다. 맑고 흐린 날을 가리지 않고 항상 물안개가 강을 감싸는 겨울, 아침에 물가에 나서면 강은 관목 숲 멀찍이 숨어 있고, 출렁이는 물결 소리만 잔잔하다. 이럴 때면, 그 안개 사이로 커다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강의 여신이 솟구쳐 오를 듯한 착각에 빠진다(사진1).

드로베타에서 강으로 나가니 마침 안개 속에서 어부는 그물질하고 있었다. 강의 북안을 따라 철문(Iron Gate)의 굽이로 걸어 들어갈 때, 옛날에는 협곡이었으나 이제는 댐 덕에 건너편이 까마득하고, 물살 아래 얼마나 깊은 심연이 있는지 물빛은 푸르다 못해 검었다. 이 강에서 여신들이 처음 태어났는지 불분명하지만, 분명 여신들은 이 강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고 또 강에 온갖 색채를 더했다.

하지만 걸으며 강 양안으로 눈길을 돌리면 아주 오래전에 우리들이 여신의 눈 밖에 난 것을 깨닫는다. 남안의 불가리아 땅에서 북안의 루마니아 땅까지, 강 양안에는 로마부터 근세까지 지칠 줄 모르고 높이와 두께를 더해만 가던 요새들이 줄을 잇고 있다. 투석기에서 대포로 무기의 종류는 바뀌었지만, 이 강을 기준으로 남북을 가르고 동서를 장악하려던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지금 다뉴브는 유럽에서 견고한 요새를 가장 많이 거느린 강일 것이다.

고유럽에 ‘전쟁은 없었다’는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의 단언은 비현실적이지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이 야금술을 알고 난 후에도 치명적인 무기를 그다지 만들지 않고, 커다란 마을조차 대개 방어용 구조물로 둘러치지 않은 점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된다. 언젠가 다뉴브 고유럽 유적에서도 치명적인 무기나 요새가 발견될 수도 있겠지만, 그때가 “예술이 만개한 시기였다”는 그녀의 지적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진 2)와 (2-1)은 불가리아 신석기 미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친숙한 여신의 엉덩이와 음부에 상징적으로 묘사된 에너지의 소용돌이, 거주지를 표상하는 듯한 몸통의 미로 문양, 등줄기에 굽이치며 흐르는 세 물줄기, 임신선을 표시하는 듯한 허리의 삼선. 그녀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명의 탄생과 흥망을 관장했을까? 이 압도적으로 생동하는 생명력 앞에서, 김부타스가 여신의 매서운 측면으로 읽어낸 맹금류 부리 얼굴마저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 그릇이 박물관을 나서 어느 대도시의 갤러리에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을 신석기 ‘미개인’의 작품이라고 알아차리는 이보다 메트로폴리탄의 어딘가의 전위 예술가 작품일 것이라고 여기는 관람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폭력의 격화와 여신의 쇠퇴는

유목의 발생보다는

더 큰 세계사적 맥락서 다뤄야


터키 이스탄불의 동로마 물 저장고(위 사진)와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얌나야 후기 유목민의 두개골.


■ 고유럽을 무너뜨린 이는 누군가?

이 유물들이 표상하는 세계관이, 서기전 4000년부터 동방에서 이주하기 시작한 가부장적이고 호전적인 문화, 치명적인 청동 무기와 말머리 모양의 석제 전곤(戰棍)을 휘두르는 인도-유럽인이라는 문화적인 야만인들에 의해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하면, 평균 정도의 평화애호가 누구나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김부타스는 그 침입자들이 “유목민”이었다고 하고, 유목을 가능하게 한 요소로 말(馬)을 지목한다. 비록 그녀는 침입이 물리적인 침략보다는 점진적인 문화 현상이었다는 조건을 달지만, 그녀의 주장에서 동방의 유목과 고유럽의 정주 농경문화의 대립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세계를 휩쓸었다는 아리아인 신화를 만들고, 그에 기반한 인종주의로 세계를 불바다로 만든 히틀러 같은 인간을 목도한 그녀가 말을 탄 인간들에게 염증을 낼 만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유목”이라는 어휘를 “폭력성의 대명사”라는 오해로부터 먼저 건져내고 싶다. 분명 여신 문명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그 책임을 이미 사라진 어떤 선사시대 집단에게 돌리는 것은 무죄추정 원칙에 어긋나는 듯하다.

그러기 위해 먼저 김부타스가 지나치게 확대한 쿠르간 문화의 시공간을 좀 더 좁혀야겠다. 그녀는 ‘쿠르간 가설’ 안에 서기전 5000년 이전부터 서기전 2500년까지의 기나긴 시간과 볼가에서 드네스트르 너머까지의 광대한 공간을 포괄한다. 그러나 과연 유목이니 농경이니 하는 생산양식이 어떤 인종이나 문화와 결합된 채 2000년 이상이나 존속할 수 있을까? 최소한 앞의 반, 서기전 3500년 정도에 끝나는 드네프르 강가의 스레드니 스톡 문화는 떼어내야 할 것이다. 스레드니 스톡 문화 자체가 다문화 복합체이자 복합경제 단위였다. 그들이 남긴 쓰레기 더미에서 말 뼈가 나오고 서기전 4000년 이후에는 말을 길들인 듯하지만, 여전히 주로 식용으로 쓴 듯하다. 가축 중에는 양과 소도 있지만, 이동 생활을 가로막는 돼지도 있었다. 그들은 대량으로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서부 고유럽의 영향으로 농사도 어느 정도 도입했던 듯하다. 그들의 무덤 양식은 동서의 영향이 뒤섞여 있고, 심지어 최근의 유전자 연구는 그들이 여러 종족의 혼혈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들의 집단 묘지를 보면 이동성도 그다지 크지 않았던 듯하고, 말머리 전곤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상징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인도-유럽어를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한 유목민은 아니었다.

유목의 시작과 함께 폭력이 발생했다는 것도 증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인도-유럽인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그보다 훨씬 먼저 군사화된 도시 국가들을 이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경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은 도시 국가들끼리 격렬하게 싸우며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고, 그 과정에서 고유럽보다 먼저 여신들을 뒷전으로 물렸다. 인도-유럽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키클라데스 사회에도 비슷한 시기 군사계급이 등장한다. 중국은 서방에서 전차와 청동제도 기술만 획득한 후 바로 대단히 군사화된 국가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폭력의 격화와 여신의 쇠퇴는 유목의 발생보다 더 큰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다뤄야 할 것 같다.

소가 끄는 사륜거와 말 잔등을 이용한 진정한 유목식 이동은 서기전 3500년부터 동쪽 볼가 초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화(얌나야 층)에서 시작된 듯하며, 김부타스의 가설을 따르는 이들(특히 데이비드 W. 앤서니)은 이 이동을 인도-유럽의 대규모 확산 기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서기전 3500년은 고고학적으로 완전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드는 때이며, 그때는 이미 남방에서 세계사를 뒤흔드는 사건들이 발생한 후였다. 바로 서기전 3700년부터의 우룩의 대팽창이다. 이 팽창기 캅카스 산맥의 추장들은 남방과의 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고스란히 초원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방목 조건이 훨씬 좋은 초원에 살고 있던 이들이 말 위에 타고 남방 혹은 서방에서 바퀴라는 혁신을 전수받자 그들 사회는 유목으로 이행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음껏 고유럽 세계를 유린하지 못하거나 않았던 듯하다. 그들은 아직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없었다. 거의 1.5m에 달하는 활은 말 위에서 쓸 수도 없었고, 화살촉과 대도 표준화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숲 사이에 군데군데 초원이 펼쳐져 있는 고유럽의 중심부를 안장 없는 말을 타고 유린하겠는가. 그들은 말을 타고 현장으로 가서 내려서 전투를 했거나, 부싯돌 날을 단 투창을 썼을 것이다. 사실 전차는 그로부터 1000년을 기다리고, 기마궁수는 또 1000년을 기다려야 했다. 드네프르강 하곡 일대에서 분명 약탈을 암시하는 거주지 파괴의 흔적이 있지만, 이 지역을 벗어나면 싸움의 기록보다 융화의 흔적이 훨씬 많다. 동방과 서방은 생산양식과 문화를 교환했고 서로 통혼했다. 다만 말을 가진 동방의 이주민들이 점점 군사적인 우위를 점한 듯하지만,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집단들은 말에서 내렸다. 변화를 위해 100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당시 동방과 서방은

생산양식과 문화 교환하며 통혼

싸움 기록보다 융화 흔적 더 많아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남성 전사들에게 살해되고 있는 아마존 전사들의 몸과 복장은 아테네의 여신상을 방불케 할 만큼 아름답다.


■ 그들은 왜 서쪽으로 떠났을까?

그들이 왜 서쪽으로 갔을까? 기후 변화 혹은 호전성 등 수많은 가설들이 있지만, 5000년 이상 된 유물은 입이 없고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모두 나름의 가정을 고수하기에 가까운 시일 내에 결론이 날 것 같지 않다.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호전적인 종족은 없다고 보는 필자도 조심스럽지만 하나의 의견을 제시해본다. 모건은 북미 미주리 강안의 8종족이 초원과 강을 따라 무려 1500마일에 걸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각 종족의 하부의 부족과 씨족 조직은 거의 같았고, 각자 방언 집단으로 나뉘어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언어 집단인 점을 주목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에 의하면 “(종족) 분리는 결코 격렬한 타격도 아니고 알 수 없는 재해도 아니며, 보다 넓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자연적인 확대에 의한 여러 지방으로의 분산”이다(최달곤 외 역, <고대사회>). 한 종족 집단이 적절한 수를 넘어서면, 일부가 분가하여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 이주종족은 모종족과의 언어적인 결속을 유지한다. 이동 경로에서 다른 종족을 만나면 먼저 자신의 연맹으로 들어오기를 제안하고, 제안이 실패하면 그들을 쫓아낸다. 중간에 마주치는 종족을 압도하는 것은 특별한 기술 탓이 아니라 뒤에서 이주집단을 후원하는 모종족의 존재 때문이다.

비슷한 상상을 해보자. 원래 드네프르-볼가 초원지대에 살고 이들은 모두 사냥-채집민들이었다. 사냥-채집민은 평등주의로 악명이 높다. 그들은 똑같이 일해서 똑같이 나눈다. 그런 그들이 고유럽의 중심지를 거쳐 들어오는 농경과 목축과 선진 기술을 알았다. 일단 초원지대에서는 환경여건상 점점 목축이 우세해지고, 이어서 식량 사정이 좋아졌다. 그러자 적절한 가축의 이동범위와 안정적인 집단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하위 집단들을 비교적 환경이 비슷한 다뉴브 하곡으로 떠나보냈을 것이다. 물론 그 무렵에는 캅카스를 넘어 전해지는 메소포타미아의 거대 권력의 실체도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만들어 낸 것이 말머리 전곤과 육중한 석제 도끼로 대표되는 힘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국가가 아닌 부족 단위의 이동자들이었기에,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현지 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새 땅에서 예외 없이 농경 혹은 반농반목민이 되고 말았다.

인도-유럽인 부족은 분가하면서

말머리 전곤·석제도끼 만들었지만

서쪽으로 이동하며 현지 문화 동화

새 땅서 농경·반농반목인이 돼


■ 유목민을 위한 변명

유목민을 위한 약간의 변명을 붙이자면, 얌나야 초기 쿠르간 안에는 남녀 모두 들어 있다. 얌나야 문화 남부에는 쿠르간에서 남녀의 성비가 거의 동일했고, 서부에서는 남자가 약간 우세했고 오직 동부 볼가강 일대만 남자가 압도적이었다. 후기로 갈수록 남성 전사의 비율과 부장품이 늘어가는 것은 유목사회를 넘어 세계사적인 현상이었다. 심지어 후대의 돈-볼가 하류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전사묘에도 약 20%가 갑옷을 입은 여성이다. 아테네에 전신 아테나는 있지만 실제로 여전사는 없었던 반면 초원에는 강력한 아마존이 존재했다.

그리고 정주문명의 여신 살해는 철저했다. 앞 편에서 보았듯이 미노스의 황소는 여신 자체다. 그런데 정복자인 미케네인(본토 그리스인)들이 퍼뜨린 전승에서 반인반우 미노타우로스는, 포세이돈의 저주에 따라 왕비와 황소 사이에서 난 괴물로 전락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미노스가 자신들의 여신(미노타우로스)을 내놓지 않자 아테네의 영웅인 테세우스는 여신의 집(미로) 안에서 기어이 여신을 살해한다.

한마디 보태자면, 바다의 신마저 원래 포세이돈이 아니라 몸 자체가 바다인 여신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찬탈에 이어 이중삼중의 상징조작이 일어났다.

■ 필자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11권)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말, 바퀴, 언어> 등 다수를 번역했다. 유라시아 유목문명에 관한 저술을 준비하는 동시에 파미르 고원에 장기 거주하며 현지 환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원국 | 역사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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