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의 휴먼 갤러리](14)낯설지 않다…그가 그린 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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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9.18. 오전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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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엘 그레코, ‘톨레도 전경’

엘 그레코가 그린 ‘톨레도 전경’. 톨레도는 스페인의 옛 수도다. 마드리드에 과거 영광을 빼앗기고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한 도시로 그려졌다. 인물이 빠져 있지만 인간의 운명에 대한 예감, 구원에 대한 가능성이 희미하게 비친다.


■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눈물 흘릴 줄 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는 2049년 캘리포니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래의 캘리포니아는 오렌지가 익어가는 상큼한 도시가 아닌 음울한 고층 건물들로 가득 찬 청회색의 도시다. 비행기가 광대한 도시를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포착한 풍경은 SF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도로 발전한 문명의 최종 단계인 듯한 치명적인 종말론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나는 영화 속 이 장면을 볼 때마다 16세기의 마지막 순간에 그려진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의 ‘톨레도 전경’(1597~1599)이 떠오른다. 오래전 그려진 것임에도 이 그림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지구의 삶을 위협하는 공포를 담아낸 일종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SF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구원에 대한 갈망이 그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세기말에는 주기적으로 종말론이 대두되곤 한다. 세상의 정의는 세워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과거보다 더 나빠졌으며, 앞으로는 더 나쁠 것이라는 절망이 엄습한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 톨레도의 풍경을 그린 것도 1599년, 17세기를 코앞에 두고 전 유럽이 세기말적인 공포에 빠져들 때였다. 이 그림은 톨레도의 북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취하며, 알카사르궁과 산 세르반도성, 도시 전체를 휘감는 타호강과 그 위의 알칸타라 다리 등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엘 그레코는 서른여섯 살이 되던 1577년 톨레도에 정착해 일흔셋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그렇다면 엘 그레코에게 톨레도라는 도시는 어떤 의미였을까?

16세기의 마지막 순간 그려진

엘 그레코의 ‘톨레도 전경’은

영광을 빼앗긴 도시의 풍경이다

불안한 구름 속 희뜩이는 빛은

일말의 구원 가능성을 전한다


‘톨레도 전경’의 주인공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각각의 인간들이 아니다. 도시 자체가 의인화되어 운명의 시험대 위에 놓인 것 같다. 무너져 내릴 듯 음습한 하늘 그리고 한때는 인간의 위대함을 뽐내는 수단이었을 건축물이 두려움에 떨며 심판을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숨길 수 없고, 죄는 죄로 선은 선으로 드러나는 상황. 20여년간 이곳에서 살며 뿌리 내리려 했던 이방인 엘 그레코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도시를 사랑했으니까.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온당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법이니까.

■ ‘그냥 그리스인’으로 불린 사내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에서 바로크 미술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 작가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미술 발전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했다. 한 시대가 끝나가고 모든 것이 방향을 잃어 버렸을 무렵, 서구 미술에 작은 숨통을 틔워준 사람이 엘 그레코였다. 그는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라는 긴 그리스 이름이 아닌 ‘그냥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불렸다.

스페인에 살던 그리스인. 아마 이것은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작가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기호였을 것이다. 이탈리아와 북유럽에서 르네상스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는 동안 엘 그레코의 고향 그리스 크레타에서는 여전히 비잔틴 양식의 중세 그림을 가르치고 있었다. 결국 1567년 스물여섯 살의 엘 그레코는 큰 세상으로 나온다.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를 사사하면서 그는 빠르게 르네상스 화풍들을 익혀 나가 거장의 포부를 키워갔다. 그리고 1570년에는 로마로 옮겨 간다. 로마의 바티칸에는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그림,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는 1517년 루터의 교황권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었다. 종교개혁 운동에 따른 가톨릭 내부의 정화 운동이 펼쳐지고, 교황청은 모든 이교도적인 것들을 추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등장인물 대부분이 누드로 그려졌다는 점을 비판받아 옷을 입히는 작업이 행해지기도 했다. 르네상스 가치가 르네상스 본토에서 부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엘 그레코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덮고, 그 위에 자신이 그림을 그리겠다는 대담한 제안을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교도적인 성향이 엿보이더라도 예술의 신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지워버리겠다는 제안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엘 그레코는 미움을 받아 로마를, 결국은 이탈리아를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리스인의 최종 행선지는 스페인이었다.

■ 고도(古都) 톨레도의 화가

신교를 지지하는 종교개혁 세력과 구교인 가톨릭을 지지하는 반종교개혁 세력 간의 대충돌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을 때, 그 어느 나라보다 종교적인 열정이 뜨거웠던 곳이 스페인이었다. 지금의 독일과 스페인을 아우르던 거대한 나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던 카를 5세는 아들에게는 스페인을, 지금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동생에게 분할상속을 했다. 독일의 경우 남부 지역은 구교도가, 북부 지역은 신교도가 우세한 복잡한 상황이었다. 스페인을 상속받은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이 가톨릭의 수호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 ‘에스코리알’이라는 놀라운 건축물을 짓기 시작했다. 에스코리알은 궁전이면서 수도회이자 성당과 묘지이기도 한 복합건물이었다. 이곳에 40개의 제단화가 설치될 예정이었기에 제단화를 그리는 영광스러운 일자리를 얻고자 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이 이곳으로 몰렸다. 1576년 스페인으로 간 엘 그레코 역시 그런 화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엘 그레코의 그림은 펠리페 2세의 취향과 맞지 않아 기회를 얻지 못했고, 결국 그는 다시 구(舊)수도였던 톨레도로 옮겨가 평생을 살게 됐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등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톨레도는 엘 그레코의 도시가 됐다.

엘 그레코가 정착하기 직전인 1571년 톨레도는 인구가 6만2000명에 이르고 섬유무역으로 번성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위용 있는 왕실의 행렬과 행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미로처럼 얽혀 있는 중세 도시의 한계 때문에 천도가 결정됐고, 마드리드가 새로운 수도로 정해지면서 톨레도는 축소되기 시작했다. 1584년 에스코리알이 완공된 후에는 이런 상황이 더 극대화됐다. 톨레도는 젊은 마드리드에 영광을 빼앗기고 다시 부활을 꿈꾸는,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도시가 됐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구름이 자아내는 기묘한 불안감 속에서도 희뜩이는 빛은 일말의 구원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엘 그레코의 이 작품 속에는 인물이 빠져 있지만 인간의 운명에 대한 예감, 영혼의 울림이 가득 차 있다. 초록색, 푸른색, 청회색이 만들어낸 격렬한 붓질은 이 그림을 단순히 도시의 풍경화가 아닌 위기에 찬 정신의 풍경화로 만든다.

■ 종교적 열정 속에 녹아내린 몸

중세 1000년간 유럽은 하나의 종교라는 우산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구교와 신교라는 두 개의 유럽을 만들었다.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인간이 신을 믿는 방법을 선택하는 상황은 기존의 안정감을 깨버렸다. 가장 극심한 마녀사냥이 행해진 때도 중세가 아닌 종교개혁기였다. 신교, 구교 양쪽 모두 분열 앞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거꾸로 이단을 양산하던 시대였다. 특정 종교의 수호국이 되길 선택한 스페인 특유의 종교적 열정은 엘 그레코라는 불꽃이 타오를 수 있는 뜨거운 장작이 되었다. 뜨거운 종교적 열정 속에서 르네상스적인 육체의 비례는 녹아내려서 엘 그레코 만의 길쭉해진 독특한 비례가 탄생했다. 르네상스 거장들이 추구했던 수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체 비례가 거부된 것이다.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 화가인 파르미지아니노(1503~1540)의 길쭉한 우아함을 참조했다. 그는 우아함을 표현할 수 있는 비례는 화가의 주관에 맡겨지는 것이라고 과감히 주장했다. 이는 인간에 대해 이성주의에 입각한 주지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고 감정을 중시하는 주정주의로 이행하는 계기가 된다.

엘 그레코의 몸은 영혼을 표현하는 미술적인 기호였다. 인간의 영혼이 몸의 우위에 있는 한 그 몸은 육체성의 표현이 아닌 탈육된 영혼의 기호가 되었다. 몸보다 영혼을, 행위보다 감정상태를 우선시하는 엘 그레코의 화풍을 보면서 사람들은 20세기 초반에 등장하는 표현주의적 격정을 떠올렸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주관적 격정으로 단숨에 뛰어넘으려는 치열한 갈망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미래의 후손들은 열광했으나 엘 그레코는 자신의 시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심지어 엘 그레코의 아들도 화가였으나 그는 아버지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엘 그레코가 시대를 앞서 가고 이후 후배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엘 그레코는 무엇보다도 시대의 아들이었다.

■ 어느 예언자의 죽음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극심하던 당시, 전 유럽을 초토화시킨 30년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엘 그레코는 ‘라오콘’이란 작품을 그린다. 이교도로 몰려 비극적 죽음을 맞은 톨레도의 예언자 카란차의 모습이 반영된 작품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어도

해결 안된 정신적인 위기는

암울한 ‘라오콘’을 탄생시켰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엘 그레코와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위기는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다. 유럽의 각국은 끊이지 않는 종교적 분쟁을 겪고 있었다. 1618년 전 유럽을 초토화시킨 악명 높은 30년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엘 그레코는 ‘라오콘’(1610~1614)이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엘 그레코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그린 유일한 작품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조각 ‘라오콘’의 형상을 기초로 삼아 그린 것이다. 라오콘은 트로이전쟁 당시 트로이편의 예언자로 목마를 트로이성 안에 들여놓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신들은 트로이가 멸망하기를 바랐다. 트로이 목마의 비밀을 밝히고 도시를 지키고자 했던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신의 저주를 받아 죽는다. 그림의 중앙에는 트로이의 목마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페리스와 헬레네라는 남녀가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트로이를 배경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바로 톨레도가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 암울하고 불길한 풍경 속에 등장하는 저주받은 예언자의 형상은 실제로 톨레도의 예언자 바르톨로메오 카란차(1503~1576)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톨레도의 대주교였던 카란차는 카를 5세의 생존 당시 사제뿐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역량을 발휘한 사람으로 고해 신부를 맡아 카를 5세의 임종을 지켰다. 그러나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카란차는 황제에게 루터교를 전파해 그가 진실한 가톨릭 안에서 영면하지 못하게 했다는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스페인의 악명 높은 종교재판에 넘겨져 17년간 감옥에서 살다가 출소한 다음해에 사망했다. 이교도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했지만 결국 본인이 이교도로 몰려 죽음에 이른 것이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겉으로는 종교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정적 제거 수단에 악용되곤 했다. 종교적 순수성을 외칠수록, 더욱 타락하는 모순은 이 나라의 숨통을 옥죄는 고통이 되어갔다. 종교적 족쇄 때문에 건전한 비판 정신이 자라지 못했던 것은 스페인이 한때 유럽 최고의 강국이었으나, 후에 그만 한 명성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 종말 없이 새로운 세기가 왔지만 희망은 따라오지 않았다. 종교적인 분쟁은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격화되었고, 1618년에는 대규모 종교전쟁까지 벌어진다. 전쟁의 끝은 세상의 멸망일까? 그것이 과연 신의 진정한 뜻일까? 이에 대한 답은 찾기가 쉽지 않다.

■ 눈물 젖은 눈으로 본 세상

엘 그레코가 생의 마지막 해에 그린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거나 가슴에 손을 얹고 참회하고 있다. 현재를 알 수 없다고 여기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종말론적인 풍경에 조응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신의 뜻을 이해하려는 듯 또는 신의 자비를 구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열쇠를 쥔 것 역시 인간이었다. 종교를 빌미로 한 대규모 학살이 30년간 지속된 후에야 인간은 종교 때문에 다투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얻는다. 인류가 익혀야 할 것은 서로 다른 종교,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기술이었다.

그가 표현한 종말론적인 감정은

당대보다 현대인들을 울렸다


엘 그레코가 동시대보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더 많은 호응을 얻는 것은 그가 표현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감정 때문이다. 전쟁과 테러,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 등을 눈앞에서 보고 겪는 현대인들은 이 아름다운 푸른 별 지구가 파괴되고 있다는 소식을 매일 접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지구는 멸망할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사라지는 법인데, 지구는 왜 아니겠는가. 지구라는 별도 언젠가는 초신성이 되어 폭발할 것이다. 다만 인류의 무절제로 인해 지구의 수명이 끔찍하게 단축되고 있을 뿐이다. 죽는 줄 알면서도 제어하지 못하는 무절제한 욕망이 우리의 후손과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눈물 젖은 눈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지 않으면,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눈물이 그 눈에서 흐르게 될 것이다.

■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대규모의 미술관으로 고전 미술작품들을 다수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한 <톨레도의 전경>은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주요 소장품 중 하나다

■ 필자 이진숙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여행을 하며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에 큰 감명을 받아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롤리타는 없다 1, 2> <시대를 훔친 미술> <위대한 미술책> 등 저서가 있다.


이진숙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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