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장희] 낯뜨거웠던 재난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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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2004년 12월 31일. 담배연기 가득했던 인도네시아 메단공항 대합실 바닥에서 기약 없는 반다아체행 비행기 출발 시각을 기다리던 그때 전화가 왔다. 시경캡(사건팀장)이었다. 내일자 타사 가판 신문에 반다아체 르포가 실렸다고 했다. ‘최악의 피해지역 반다아체에 한국 언론사 중 처음으로 진입에 성공했다’는 기사 내용도 함께 전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문제의 기사에 이름이 달린 그 기자는 그때 내 옆에 있었다. 인도양에서 발생한 규모 9.1의 대지진이 몰고 온 쓰나미로 10만명 이상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반다아체에 급파된 구호팀엔 당시 두 명의 기자가 동행했다. 그중 한 명이 필자였다. 그 기자의 난처한 표정에 대충 전후 상황이 짐작됐다. 그날 밤 11시40분 반다아체행 비행기는 메단공항을 출발했다. 그리고 2005년 새해를 비행기 안에서 맞았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참사 현장에서도 한국 구호팀의 활동은 눈부셨다. 열심히 취재했지만 기사를 전송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현지 통신 수단이 사실상 마비 상태라 당시만 해도 엄청나게 비쌌던 로밍요금을 각오하고 기사를 일일이 휴대전화로 불러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것은 어렵게 보낸 기사가 어떤 제목이 붙어서 나가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 사실 내 기사보다 더 궁금한 것은 타사 신문에 실린 첫 반다아체 르포였다. 한참 뒤 귀국해서야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는 생지옥”이라는 제목의 문제의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31일 한국 언론사 중 처음으로 반다아체 진입에 성공했다’는 첫 구절이야 다음날 새벽에 도착은 했으니 그렇다 쳐도, 생생한 현장 묘사를 보곤 내가 쓴 기사가 아닌데도 낯이 뜨거워졌다. ‘비행기 문이 열리자 악취가 들어왔다’ ‘비행기에서 들은 아우성은 공항에 몰려든 난민들의 목소리였다’ 등 기사가 전한 상황은 한국 언론사 중 처음으로 진입에 ‘동반 성공’한 필자가 겪지 못한 일이었다. 메단공항에서 비행기가 예정대로 출발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외신이 전하는 상황에 상상력을 덧붙였을 것이다. 어항 속 물고기처럼 기사의 잘잘못이 실시간으로 검증되고 SNS로 중계되는 요즘 시대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후에도 재난 관련 오보와 ‘오버 기사’는 꾸준히 등장했다. ‘탑승자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로 시작됐던 세월호 참사 보도가 그 절정이었다. 폐해도 심각했다. 확인되지 않은 취재원에 언론사가 농락당하는가 하면 배려 없는 인터뷰로 상처받는 유가족도 속출했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반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신속보다는 정확,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의 입장 배려, 철저한 검증 보도 등 기자협회의 참사 보도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 것도 이 때였을 것이다.

재난 보도는 과거보다 많이 신중해졌다. 무분별한 특종, 속보 경쟁을 삼가고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기삿거리도 가급적 취급하지 않는다. 지난달 30일 헝가리 다뉴브강에서 한국인 33명을 태운 유람선이 침몰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벌어진 이후에도 이 같은 보도 경향은 이어졌다. 유람선 탑승자 및 가족 명단 자료가 유출되는 사고가 있었지만 대부분 언론사들은 유가족이나 피해자 접촉을 극도로 자제했다. 일부 언론이 사고의 본질과 관련 없는 보험금과 관련한 온라인 기사를 내보내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무리한 취재를 하다 참사 현장에서 피해 가족에게 쫓겨나는 일은 이번에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뉴스(News)라는 단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언론사는 독자들의 알권리라는 명분을 앞세워 늘 새것을 찾고, 남들이 안 쓰는 것을 앞세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재난 보도는 다르다. 피해자 중심으로, 특히 기사를 접할 희생자 가족이 받을 고통과 충격을 늘 먼저 고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국내 언론의 변화는 바람직하다.

한장희 사회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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