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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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

1 개요

전설적인 업적을 남긴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

대한민국 레슬링 경량급의 전설적인 선수. 서로 다른 두 체급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비롯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다. 선수 이후에는 해설가로 나름대로 명성(?)을 날렸다.

2 선수 시절

1972년 10월 12일 경기도 성남시 출생. 현역 시절 체급은 초기 48kg, 그리고 체급 조정 이후에는 54kg급. 청소년 시절에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선수였지만, 서울체육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체육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자유형 선수였지만, 자유형이 자기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그레코로만형으로 전향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자신의 체급인 -48kg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국제 대회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1991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권덕용에게 밀려 바르셀로나행이 좌절되었다.

하지만 권덕용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여 예선에서 탈락한 후, 그의 자리를 밀어내고 1993년부터 국가대표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1993년 세계선수권 동메달로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린 후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5년 프라하 세계 선수권 대회 금메달, 1995년과 1996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올림픽 티켓을 획득하며 일찌감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심권호는 대진이 최악으로 걸린다. 2회전에서 라이벌인 러시아 선수를 만나게 된 것. 이 경기에서 연장 접전 끝에 2:1로 승리한 후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위기 없이 결승까지 순항했고, 결승전에서 연장 접전 끝에 4:0으로 승리하면서 마침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따낸 100번째 메달의 주인공이자, 애틀랜타 올림픽 첫 금메달의 주인공.

그리고 워낙 압도적인 기술과 경기 운영을 보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순항할 줄 알았는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48kg급이 애틀랜타 올림픽을 끝으로 폐지된 것. 다만 알아 둬야 될 것이 이것이 결코 심권호 떄문에 사라진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체급을 줄여가는 과정에 심권호가 걸린 것일 뿐이다.[1]

졸지에 레슬링 최경량급이 -54kg이 되면서 체중을 한 번에 6kg을 불려야 했고, 그 결과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체급에 적응한 후 다시 이 체급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후배인 하태연과의[2] 치열한 승부를 거치면서 국가대표팀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한 심권호는 -48kg에서 그랬듯이 또 다시 -54kg에서도 같은 코스를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1998년 예블레 세계선수권 우승,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9년 아시아선수권 우승, 그리고 치열한 대표 선발전 끝에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4년 전에 비해 원숙해진 심권호는 8강전에서 한 번 고비를 맞아 독일 선수와의 경기에서 5:4 역전승을 따냈다. 4강전에서 북한의 강영균을 10-0 테크니컬 폴로 눌러버렸고 결승에서는 당시 -54kg 세계 최강으로 여겨지던 쿠바 선수를 맞아 초반 상대의 방심을 틈타 8-0을 만들고 남은 4분 동안 끈질기게 버티며 우승을 차지했다. 훗날 IOC 인터뷰에서 이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를 10:0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8:0이라서 남은 4분을 필사적으로 버텼다고 한다.## 이로서 서로 다른 2개의 경량급 체급에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뤘다.

그리고 재미난 사실은 심권호가 1996년 LF급 금메달-00년 F급 금메달을 목에 걸 때 불가리아 출신의 아르만 나자라얀이란 선수가 1996년도 F급 금메달-2000년도 B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사실.[3]

3 은퇴 후

모든 것을 다 이뤘다면서 현역에서 잠시 은퇴해서 코치로 생활하다가,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컴백했다. 대표선발전 1차 대회에서는 후배에게 졌지만, 2차 대회에서는 결승까지 오르면서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과시했으나 협회가 이미 대표를 결정하는 바람에 올림픽 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심권호 자신은 3연패라는 대업[4]을 이루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다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퇴하게 되었다. 사실 심권호가 실력으로는 한 번 해볼 만했지만, 협회도 그렇고 레슬링계 내부에서 "그 정도 했으면 이제 후배에게 좀 양보하지?"라는 심리가 없지 않았다고.

4 평가

레슬링 선수로서의 심권호는 한 마디로 굉장히 영리하고 기술에 능한 선수였다. IQ 145라는 명석한 머리로 상대의 작전을 이용하면서 지능적으로 경기를 풀어갔다. 잠시 방심한 척 틈을 보이다가 상대가 미끼를 물면 바로 공세에 돌입해서 가볍게 상대를 제압하는 힘을 가진 선수. 워낙 기술이 다양해서 상황에 맞춰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다른 선수들이 하나의 주무기를 가졌다면 심권호의 레파토리는 대여섯 가지 정도 되는 선수였다. 여기에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체급의 정상에 군림한 보기 드문 자기 관리까지 겹치면서 전 세계 레슬링 최경량급의 레전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5 해설가

2004 아테네 올림픽 정지현의 금메달 획득 경기를 중계하던 때의 중계석 모습. 좌측의 캐스터는 당시 SBS의 유협 캐스터.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중계석 모습.

은퇴 후에 2004 아테네 올림픽부터 해설자로 데뷔했다. 냉철함보다는 다소 격정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경기를 분석하고 전달하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같이 흥분하는 해설을 하면서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는데, 그나마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재미있는 해설이라는 의견도 많았고 정지현이 금메달을 따면서 분위기가 좋았던 것도 있었기에 그럭저럭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그의 해설 방식은 결국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야이씨 바보야!"(...)를 비롯한 정제되지 않은 멘트들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이로 인해 사과방송도 해야 했다. 그 때만 생각하면 말도 못 할 정도로 창피하다고 했다.# 사실, 그럭저럭 입담도 좋고 예능감도 있는데다 해설도 잘하는데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멘트를 사용해서 망가진 케이스로 봐야 한다.

그래도 말주변도 좋고 레슬링계의 전설이기 때문에 자주 해설 외에도 예능 프로에도 반 고정으로 나왔다. 특히 몸을 쓰는 예능에서는 거의 100% 단골. 한 번은 어느 예능 프로그램 몸 쓰는 코너에서 쇠봉으로 만든 훌라후프를 출연자 중에 유일하게 돌리기도 했다. 코치로도 활동했지만 코치보다는 예능인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출발 드림팀에 많이 나왔고 2012년에는 종편 채널A불멸의 국가대표에 고정으로 나오고 있다.

주택공사 소속으로 오래도록 뛰었다가 LH의 코치를 잠시 역임했다. 2012년 현재는 코치 대신에 일반 직장인이 되었다. 보직은 신도시 보상팀 팀장. 유명한 레슬러가 보상을 담당해서 그런지 험한 보상팀 임무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마찰은 없다고 한다.

6 우승 기록

금라인

7 기타

아직 미혼이다. 여담이지만 여자친구를 한 번도 못 사귀어 봤다는 소문이 있다(...). 위에서 서술한 흥분 해설도 성격이 지나치게 순수하고 멋없다 보니 발생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레슬링을 잘 했구나? 그의 혼자 사는 싱글라이프가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무심한 듯 시크한 태도에 감탄 및 웃픈 감정을 표하고 그를 구출할(?) 처자가 어디 없냐는 네티즌이 대부분이다. 남자의 로망 게다가 LH공사의 부장이다!

본인 왈, 운동할 때는 계체량이다 머다 하도 빡세게 살다보니, 좀 백수처럼 놀고 먹고 사는 게 꿈이어서 지금 이렇게 지내고 있다고(...).

2013년, IOC에서 2020년 올림픽부터 레슬링을 잠정 퇴출하겠다고 발표하자 아쉬움을 토로했다. '머리가 띵했다'. 다행히도 레슬링이 올림픽 종목으로 잔류하면서 한숨 돌렸을 듯.

2014년, 드디어 국제레슬링연맹에서 발표하는 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한국인 최초로 입회하는 영광을 안았다.'심권호, 한국인 최초로 레슬링 명예의 전당 입회'그니깐 어디가서 단 2명뿐인 명예의 전당 헌액자라고 말하고 다니지 말자

엄청난 실적을 쌓은 레전드지만, 실제 업적 이상으로 부풀려진 정보가 떠돌기도 한다. 2체급 그랜드슬램이란 엄청난 실적을 쌓았지만,국제대회 패배도 가끔 있었고,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국내선수에게 패배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국제대회 무패의 흠잡을 데 없는 무패의 챔프로 잘못된 소문이 돌고 있다. 심권호 선수의 독주로 48kg이 폐지됐다는 어처구니없는 낭설도 돌고 있는데, 실은 여자레슬링의 창설과 올림픽 규모 축소화가 맞물려 체급을 줄이는 과정에서 없어진 것에 불과했다. I.O.C는 국가별 종목 쿼터제를 줄 정도로 올림픽 비대화를 막느라 대단히 골몰하고 있다. 실례로 태권도는 8체급이 벌어지지만 국가별로 4개체급, 역도도 8체급중 국가별로 5체급까지 출전가능하다.

2016년 우리동네 예체능 리우 올림픽 출전기원 레슬링 특집에서 정지현과 박은철과 같이 출연했다. 여기에서 정지현과 스폐셜 매치를 벌여서 세월의 무게는 견딜수 없었는지 패배했다.
  1. 게다가 해당 체급의 체중 또한 지속적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권호의 체급이던 그레꼬로만 최경량급 라이트플라이급뿐만이 아닌 라이트헤비급과 프리스타일 라이트플라이급-라이트헤비급도 1996년 이후 폐지되었다. 사실 라이트플라이급은 1976년에 개설되어서 단 7번밖에 안 한 짧은 역사를 가진 체급이다.
  2. 하태연은 레슬링을 접고 무속인이 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3. 시드니 결승전에서 김인섭을 이기고 금메달을 딴 선수다. 또한 아테네 올림픽도 출전했었는데, 4강에서 아래 나오는 정지현과 붙어 졌다. 이 때 심권호는 대놓고 '나자리안.. 너는 이제 은퇴죠...' 라며 공중파 해설방송에서 대놓고 갈구는 위엄...을 과시했다.
  4. 이게 얼마나 대업이냐면 1회 대회부터 있었던 레슬링 종목에서 올림픽 3회 우승을 이룬 남자 선수는 역사상 딱 5명이다. 그 중에 위키러들에게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시 알렉산더 카렐린. 그리고 이들 다섯 명 중 중량급이 2명, 최중량급이 3명일 뿐, 경량급 선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