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시위 한달, 종착역은 어딜까

김디모데 기자 Timothy@businesspost.co.kr 2014-11-02 16: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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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시위 한달, 종착역은 어딜까  
▲ 홍콩 시위는 비폭력의 상징인 노란우산으로 경찰 진압에 맞서 우산 혁명으로도 불린다.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가 한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시위대는 2017년 홍콩 자치정부 수장인 행정장관을 뽑는 선거에서 중국정부가 관여하지 말고 후보 등록부터 투표까지 온전히 자주적으로 진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홍콩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시위대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겉으로 드러난 홍콩시위의 원인은 정치적 문제다. 그러나 그 이면에 홍콩의 미래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안이 짙게 깔려있다.

홍콩의 기성세대는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젊은세대는 홍콩으로 몰려드는 중국인 때문에 집값이 오르고 일자리는 줄어들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심각하게 느낀다. 홍콩시위에 이렇게 세대간 갈등도 자리잡고 있다.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비폭력 시위로 전개되고 있다. 시위대는 비폭력을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경찰이 진압을 위해 쏘는 최루탄을 우산으로 막아냈다. 이 때문에 홍콩 민주화 운동은 ‘우산 혁명(Umbrella Revolutio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시위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위문화를 낳고 있다.

학생들은 시위장소에서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동생들의 공부와 숙제를 도와주기도 한다. 이들은 SNS를 차단하는 중국정부에 맞서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고 블루투스로 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는 ‘파이어챗’ 앱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

최근에 시위를 소재로 한 모바일게임도 등장했다. 구글플레이스토어에 등록된 ‘노란우산’이라는 제목의 모바일게임은 노란리본과 노란우산을 이용해 경찰을 막아내는 게임이다. 게임이 끝나면 “이건 혁명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요구한다”는 메시지가 뜬다.

이 게임을 만든 31세의 펑캄킁 어스앱 CEO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정당한 선거를 위해 학생들이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5일 만에 이 게임을 만들었지만 반응은 매우 뜨겁다.

그러나 시위가 한 달 넘게 계속되는 동안 물리적 충돌도 일어났다. 홍콩의 폭력조직인 삼합회 조직원들이 시위대와 시위 반대파 양쪽에 침투해 폭력행위를 조장하는 활동을 벌였다고 홍콩언론들은 보도했다.

홍콩경찰은 시위가 일어난 9월26일부터 10월28일까지 33일 동안 불법건축물 설치와 난폭행위 등으로 310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홍콩정부와 대화에 진전이 없자 대표를 베이징에 보내 중국당국에 직접 요구사항을 제출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알렉스 차우 홍콩전상학생연회 비서장은 “대표단이 베이징에 갈 수 있다면 선거방안을 놓고 중국당국과 토론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 시진핑, 홍콩시위는 '반란"

홍콩 시위는 9월27일 처음으로 일어났다. 중국당국이 제안한 홍콩 행정장관 선거안에 반대하는 홍콩대학생들이 22일부터 동맹휴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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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그러다가 27일 정오 100여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다음날인 28일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홍콩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막았다. 홍콩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한 것은 2005년 이후 9년 만이었다. 홍콩경찰이 강경진압에 나서면서 이틀 만에 양쪽에서 50여 명의 부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홍콩시위는 처음에 월가 점령시위를 본따 “센트럴을 점령하자”는 기치 아래 홍콩의 정치사회경제의 중심지인 센트럴 점거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가 확산되면서 코즈웨이베이를 비롯해 구룡반도의 침샤추이, 몽콕 등 도심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시위대는 친중파인 렁춘잉 행정장관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서자 행정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나 렁춘잉 행정장관은 사퇴를 거부하며 홍콩에 완전 자유선거가 실시되면 빈곤층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위대에 맞섰다.

홍콩정부와 시위대는 시위가 벌어진 뒤 24일 만인 지난달 21일 공식적으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서로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홍콩정부는 중국정부에 시위대의 주장을 보고하고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 진전된 논의를 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지만 그뒤 진전은 없다.

홍콩과 중국정부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20일부터 열린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제도 개혁을 빙자해 홍콩에서 반란을 꾀하는 세력이 있다”며 “홍콩은 반드시 중국 중앙정부의 관할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시위대를 비난했다.

또 중국 최고정치자문기구인 인민정치협상회의는 지난달 29일 렁춘잉 행정장관의 사퇴를 요구한 홍콩 야당 당수 제임스 텐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는 중국정부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일 뜻이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지 언론은 “중국정부가 시위대에 단호하게 대답했다”고 분석했다.

홍콩시위가 한 달을 넘기면서 시민들의 지지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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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시위에 젊은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짙게 깔려있다.

◆ 홍콩시위에 깔려있는 젊은이의 불안

홍콩시위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쟁점은 행정장관 선거방식이다. 홍콩의 지도자인 행정장관 선거는 간선제 방식으로 치러져오다가 2017년 처음으로 홍콩시민의 손에 의한 직선제 선거가 열리게 됐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행정장관에 입후보할 수 있는 자격을 중국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를 획득한 2~3인으로 제한하는 선거안을 내놓았다. 행정장관 후보로 친중파가 아니면 나설 수 없는 방식의 선거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자 홍콩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이 반대에 나서면서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의 요구는 행정장관 선거를 시작부터 끝까지 홍콩시민들의 손에 의해서 이뤄지는 완전히 자유로운 직접선거로 치르자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홍콩정부는 이에 대해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시위가 일어난 배경은 겉으로 드러난 행정장관 선거가 전부는 아니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이유가 직접 원인이 됐지만 경제적 이유가 더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중국 제1의 부자인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홍콩시위가 “중국과 홍콩의 관계에 대한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청년들이 희망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분석했다. 부동산가격 상승과 실업증가 등으로 청년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 시위 형태로 표출됐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청년층의 불만이 더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홍콩대학교의 조사에 따르면 24세 이하는 47%가 시위에 동조하고 있지만 40~60세는 20.9%만 시위를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또 시위의 주된 이유인 중국정부의 선거안에도 청년층은 75.8%가 반대의사를 표현했지만 중장년층에서 반대의견은 45.3%에 불과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홍콩시위는 그동안 축적돼 온 세대간 양극화 갈등이 노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콩의 기성세대는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렸지만 청년들은 몰려드는 중국인들로 집값이 오르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시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홍콩경제는 19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적지 않은 성장을 거뒀다. 홍콩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는 2만6362 달러에서 2011년 3만4405달러로 30% 이상 늘었다. 대외무역은 2배 이상, 외환보유고는 5배 이상 늘었다.

◆ 흔들리는 홍콩의 경제적 위상

홍콩경제의 성장과 함께 홍콩으로 유입되는 중국인이 폭증하면서 부작용도 나타났다.

홍콩을 방문하는 중국인은 1997년 200만 명에서 지난해는 5천만 명에 이르렀다. 특히 중국의 부유한 계층이 홍콩에 와 명품 등 사치품을 구매하면서 홍콩의 물가상승을 이끌었다.

중국인들이 홍콩부동산에 투자하면서 부동산 가격도 뛰어 올랐다. 홍콩부동산 가격은 지난 5년 사이에 두  배로 상승했다. 이전 16년 동안 부동산가격 상승률이 26%에 지나지 않았던 점과 비교하면 놀라운 속도로 부동산이 오른 셈이다.

홍콩에서 태어나는 중국인의 아이에게 홍콩 영주권을 부여하면서 원정출산도 부쩍 늘었다. 2010년 홍콩에서 출생한 아이 가운데 절반이 중국인 부부의 아이일 정도였다. 그러면서 분유가 품귀현상을 일으키고 홍콩에서 학교시설이 부족할 정도가 됐다.

홍콩의 기성세대는 중국인들이 몰려들면서 혜택을 봤지만 젊은세대는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어 반중정서가 더 강한 것으로 보인다. CNBC는 시위대가 “홍콩에 대한 본토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홍콩주민들의 어려움도 커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게다가 홍콩이 중국에 대해 경제적으로 누리던 우월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대두된다.

1997년 반환 당시 홍콩 경제규모가 중국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였다. 그러나 중국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지난해 홍콩이 중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로 줄었다.

미국 인터넷언론 복스(VOX)는 홍콩시위의 원인을 “중국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 홍콩사람들이 누리는 부와 자유가 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타임도 “홍콩시위는 홍콩이 경제적 특권을 계속 누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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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7월1일 영국에서 중국으로 홍콩을 반환하는 반환식이 거행됐다.

◆ 홍콩, 중국과 한 몸 다른 나라


홍콩은 중국에 속해 있지만 중국과 다른 정치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른바 ‘일국양제’로 불리는 독특한 구조다. 이는 홍콩이 오랜 세월 영국의 지배 아래 있다가 중국으로 반환된 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청나라 땅이었던 홍콩섬은 제1차 아편전쟁 당시 1841년 영국군에 의해 점령됐다. 이듬해 청나라는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고 정식으로 홍콩섬을 양도했다. 영국은 1843년 빅토리아시를 건설하고 홍콩총독부를 세웠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은 무역항인 홍콩을 보호하기 위해 땅을 더 요구했고 주룽반도 인근이 영국에 귀속됐다. 그리고 1898년 주변 섬과 신제 지역까지 99년 동안 조차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홍콩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영국의 주요 무역항으로서 아시아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번성한 곳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홍콩은 일본에 점령당해 인구가 160만에서 60만으로 급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고 영국이 다시 지배권을 회복한 뒤 홍콩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중국에서 넘어온 난민들을 홍콩이 받아들이면서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수준까지 높아졌다.

홍콩은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한 제조업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뤘다. 1960년대 홍콩경제의 부흥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의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조업 중심의 홍콩산업은 70년대 들어 바뀌게 된다. 1978년 중국이 경제개혁안을 시작하자 중국대륙에 투자하는 외국자본의 통로가 됐다. 홍콩의 중심산업은 제조업에서 금융과 서비스업으로 대체됐다.

중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자 홍콩은 지리적 이점을 누리면서 동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홍콩은 세계 5위의 금융중심지가 됐고 1991년 세계 10대 경제권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1984년 중국과 영국은 1997년 홍콩의 주권을 반환하는 조약을 맺는다.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빌린 땅은 신제 지역뿐으로 홍콩섬과 까우룽반도는 영구히 영국에 귀속돼 있었으나 홍콩섬과 까우룽반도 만으로 자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부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양국은 반환 이후 50년 동안 홍콩의 법과 자치권을 유지하는 일국양제에 합의했다. 홍콩의 헌법 역할을 하는 홍콩기본법은 1990년 제정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홍콩은 1997년 7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로 중국에 공식반환됐다.

당시 홍콩시민들은 “홍콩의 중국반환은 곧 죽음”이라며 대규모로 홍콩을 떠나는 일도 벌어졌다. 세기 말의 분위기와 결합해 홍콩은 반환을 앞두고 뒤숭숭한 분위기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반환 직후 홍콩인들은 영국인에서 중국인으로 정체성이 바뀌는 등 처음에 혼란도 겪었다. 그러나 홍콩은 자치구를 넘어 자치국 수준의 자치권을 갖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반환 이후 더욱 발전했다.

반환 이후 50년이 지난 2047년 홍콩의 자치권이 소멸되고 중국으로 완전 통합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으나 이는 소수의견이다. 법제도와 사회체제가 다른 홍콩이 중국에 통합되기가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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