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 교수의 역사와의 대화]집현전과 규장각에서 찾는 성군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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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 아래 꽃 향기 맡으며 책 읽는 호사 누리기 좋은 때
성군들의 발자취 되새기며 독서삼매경에 빠져보자
[특집부 weekly@imaeil.com]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으며…'(세종실록), '임금이 어느 날이나 파조(罷朝)하고 나면 밤중이 되도록 글을 보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날 밤에도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고…'(정조실록).

위에서 인용한 글의 주인공은 우리 역사 속 대표적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는 세종과 정조다. 두 왕은 늘 책을 가까이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정책들을 연구해 나갔다. 아예 도서관이자 연구소 기능을 하는 국가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세종 시대 집현전(集賢殿)과 정조시대 규장각(奎章閣)이다.

세종은 1420년 집현전을 본격적으로 운영했다. 집현전에 '재행연소자'(才行年少者)라 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모아 방대한 책을 바탕으로 정책을 연구하게 했다. 집현전이 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로 왕의 집무실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만큼 왕의 관심이 컸던 것이다.

집현전에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본 세종이 이곳에서 깜빡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입고 있던 용포(龍袍)를 덮어준 일화는 지금도 전해오는 미담이다. 또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진상품이었던 귤을 하사해 이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오랜 기간 근무한 학자에게는 왕이 직접 휴가를 주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시행하여 학자들의 재충전을 돕기도 했다.

집현전은 세종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 종의 책을 편찬했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역대병요' '칠정산 내외편'과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과학 등 전 분야에 걸쳐 편찬된 다수의 책들은 세종 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했다.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6년 6월 창덕궁 후원 중심에 규장각을 세웠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해 학문 연구와 정책 결정의 중심 기관으로 삼은 사례를 계승한 것이었다. 정조는 창덕궁에서 경관이 뛰어난 영화당 옆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고 규장각이라 했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인재들을 규장각에 모았다.

규장각의 주요 업무는 역대 주요 책들을 수집, 정리,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해 정치적 간섭을 배제했다.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아라)와 같은 현판을 내려서 규장각 신하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때로는 이곳에서 학자들과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규장각에서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계승한 법전인 '대전통편'을 비롯해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병법서 '병학통', 그리고 각 관청의 연혁과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춘관통고' '추관지' '규장각지'와 같은 책들이 저술되면서 국가기관의 역사와 활동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백과사전 성격의 '증정문헌비고', 사전과 같은 '규장전운', 이순신 장군 전집인 '이충무공전서'도 편찬되었다. 청대의 학술 사조가 총정리되어 있는 '고금도서집성' 5천22책을 수입, 연구하도록 해 선진 학문 수용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성군들은 스스로 책을 가까이하였음은 물론이고 도서의 체계적인 수집과 정리, 연구를 통해 문화 국가로 나아가는 기반을 조성했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봄볕이 화사하게 들어오는 창가에서, 꽃들로 대궐을 차린 공원 벤치에서 책을 접하는 것은 봄날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세종과 정조를 떠올려 보며 이 봄날에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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