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 멕시코에서 열린 지구환경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한 파울 크루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세(Anthropocene)란 인류를 뜻하는 ‘anthropos’와 시대를 뜻하는 ‘cene’의 합성어로서, 인류로 인해 빚어진 지질시대라는 의미다.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인 파울 크루첸은 오존층 구멍을 발견해 1995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석학이다. 그의 발언 이후 인류세는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저명 과학잡지에도 등장하는 국제적인 유행어가 됐다.
지질시대의 구분은 지구의 탄생과 다세포 생물이 번성한 선캄브리아대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최초 육상생물이 출현한 고생대, 공룡 등의 파충류가 번성한 중생대, 포유류가 번성한 신생대로 구분한다.
각 지질시대는 다시 세분되는데, 신생대의 경우 약 6500만 년 전 공룡 멸종 이후부터 약 170만 년 전까지를 제3기, 그 후부터 현재까지를 제4기로 부른다. 지구 전체 역사 중 극히 짧은 제4기는 다시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로 구분된다.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질시대는 약 1만 1700년 전 플라이스토세 빙하기가 끝난 이후의 신생대 제4기 홀로세다.
새로운 지질시대의 시작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과연 현재의 환경 변화가 바위나 빙하, 심해 침전물 등의 자연에 뚜렷이 남게 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 같은 지질학적 흔적을 남기기 위해선 전 지구적이면서도 장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럼 과연 인류세가 자연에 뚜렷이 새길 지질학적 흔적은 무엇일까. 우선은 질소를 들 수 있다. 77억 명에 달하는 인구가 먹을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현재 인류는 엄청난 양의 비료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곧 지구의 질소가 식량 생산에 전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후대의 과학자들은 인류세의 지층에 나타나는 질소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주도하는 지질 흔적
플라스틱도 유력한 후보 중 하나다. 우리가 버리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이미 심해에서부터 극지방까지 널리 퍼져 있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바람과 파도 등에 의해 분해되지만 미세한 플라스틱 입자는 그대로 쌓여 지질학적으로 관찰 가능한 지층을 만든다.
우리가 사용하는 화석연료로 인해 바뀌고 있는 탄소 동위원소의 비율도 문제다. 탄소는 자연에서 세 종류의 동위원소를 가지는데, 이 동위원소의 비율 변화는 명백하므로 미래의 어떤 과학자라도 지층을 검사해 인류가 탄소를 얼마나 꺼내 썼는지 측정할 수 있다.
생물상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도 흔적이 된다. 홀로세가 시작된 시기만 해도 야생동물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가축이 육상 척추 생물량의 65%를 차지한다. 특히 양계장에서 기르는 닭의 경우 지구에 사는 모든 조류를 합친 것보다 많다. 때문에 인류세를 상징하는 유력한 지표 화석이 닭뼈일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그밖에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성 낙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사용되고 있는 희토류 원소, 콘크리트, 알루미늄이나 납 등의 금속도 후보로 꼽힌다.
이때까지 각 지질시대를 구분하게 만든 근원적인 동력은 자연이었지만, 인류세의 동력은 바로 인간이 주도한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차이가 있다. 더구나 인류세의 존재를 미래에 알릴 가장 확실한 요소들이 바로 지금 인류를 그 무엇보다도 위협하고 있는 현상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현재 인류세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곳은 국제지질연합(IUGS) 산하의 ‘인류세 실무그룹(AWG)’이다. 미국, 영국, 독일 등 12개국 과학자 34명으로 이루어진 AWG는 2010년 무렵부터 인류세를 홀로세 다음의 새로운 시대로 인정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인류세 지정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아
그런데 최근에 AWG는 새로운 지질학 시대인 인류세의 지정 여부에 대한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29명의 회원들은 인류세 지정에 찬성했으며, 4명은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AWG는 이 투표 결과에 의해 2021년까지 인류세 지정에 대한 공식 제안서를 국제층서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제층서위원회는 지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지질 시대를 정의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인류세의 지정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 이 용어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과학자들도 많다. 그중 일부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 시대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인간에 의한 지구의 파괴를 강조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과학자들은 인간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전체적인 기간은 미래를 감안하더라도 인간이 지구를 변화시켰음을 확인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고작 30만 년 전의 일이며, 인류가 건설한 고도 문명이 앞으로 1만 년 이상 지속한다 해도 몇백만 년 후에는 이에 대한 화석 증거가 전혀 남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인류가 그동안 행한 핵실험의 잔해들도 약 10만 년 후에는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인류세 지정을 추진하는 잔 잘라시비츠 AWG 위원장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는 ‘인류세는 독특해서 다른 지질시대와 잘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질학적으로 볼 때 인류세의 기간이 눈 깜짝할 새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늘날의 지층 구분을 위한 기준을 찾는 것이지 100만 년 후의 지질학자들을 고려할 생각은 없다’고 반박한다.
1만 17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흔적에 의해 명명된 홀로세는 2008년에 결정됐다. 당시만 해도 홀로세의 지질 시대가 1000만 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붙여진 이름이다. 만약 인류세가 확정될 경우 홀로세는 지정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그리고 예상 수명의 1/1000밖에 채우지 못한 채 종말을 맞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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