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레빗타운(나무 조립식 주택 단지)인 서버비콘. 이곳에 흑인 마이어스 가족이 이사오자, 백인 중산층만 살던 서버비콘은 혼란에 빠진다. 그들은 마이어스 가족의 거주 금지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밤중에 마이어스 집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슈퍼마켓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 내쫓다시피 한다. 우체부는 마이어스 부인에게 “집주인은 어디 있냐?”며 모욕을 주고, 마이어스 집에 울타리를 치고 돌을 던지고 심지어 불까지 지르려 한다. 실소를 자아내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백인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은 자신과 ‘다름’이 자신들이 이룩한 모든 것을 앗아가는 도화선이라 믿는 ‘그릇된 욕망의 신도들’ 같다. 점차 혼란에 빠지는 마을에 중년 남성 가드너(맷 데이먼)가 등장한다. 아내 로즈(줄리앤 무어), 아들 니키(노아 주프)와 살고 있는 그는 단란한 가정, 안정된 직장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하지만 빚에 시달리던 그는 아내를 살해해 보험금을 탈 결심을 한다. 이 계획의 파트너는 아내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 동생 처제 마가렛(줄리앤 무어). 두 사람은 불륜 관계였다. 1차 살해 기도는 아내를 장애인으로 만드는 데 그쳤다. 가드너는 마피아를 고용해 강도로 위장, 아내를 살해한다. 완벽했다고 믿었지만 보험 조사관 버드(오스카 아이작)는 가드너와 마가렛에게서 비릿한 범죄의 냄새를 맡는다. 버드마저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두 사람. 하지만 의외의 인물이 이들의 ‘멈출 줄 모르는 범죄’를 목격한다.
영화는 ‘가드너의 범죄’, ‘마이어스 가족의 이주’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두 이야기는 겉으로 보이는 안정, 평화, 행복의 밑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혐오, 편견, 욕망, 이기심, 폭력이라는 인간의 더러운 위선을 뜸들이지 않고 단박에 끄집어낸다. 행복한 개인, 가정, 마을이 모여 ‘위대한 나라, 아메리카 합중국’을 완성했다고 믿는 당시 미국인들에게 ‘나와 다른 인간’에 대한 인종 차별, 극단주의, 편가름, 이기주의 등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투쟁이자 정의로운 행동’인 셈이다. 분명 조지 클루니는 이 메시지를 통해 현재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광풍이 1950년대 서버비콘 마을을 휩쓴 혼돈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맷 데이먼, 1인 2역의 줄리앤 무어, 아역 노아 주프의 연기는 ‘역시나 했더니 그래도 역시’다. 영화는 과다한 대사식 설명, 내용을 뒤집어 버리는 극단의 반전이나 지독한 여운을 전하는 풍자 등에서 ‘손맛’의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대다수 인간이 가진 자정과 균형이 기능하는 한 점점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와 이웃’의 수가 많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궁금하다. 내 뒷모습은 다른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글 블랙뤼미에르(필름스토커) 사진 영화 <서버비콘>]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38호 (18.07.3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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