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 발생한 일명 '도끼만행사건' 모습. (사진출처 : 연합뉴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 발생한 일명 '도끼만행사건' 모습. (사진출처 : 연합뉴스)

[천지일보=손성환 기자] 남북 분단의 역사를 품은 판문점에서 사상 처음 남북미 정상이 만나는 장면이 연출됐다. 30일 오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판문점에서 만난 트럼프 대통령은 깜짝 월경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기도 했다. 지난해 6.12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1년여만의 북미정상 회동이라는 점에서도 세계가 주목했다. 짧지만 3차 북미정상 회담도 이뤄졌다.

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생중계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회동을 하는 장면을 시청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6.30
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생중계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회동을 하는 장면을 시청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6.30

판문점은 지난 66년간 한반도의 비극과 희망이 공존한 남북의 상징적인 장소다. 66년 전 6.25 정전협정이 이뤄진 장소이자, 북한군이 미군을 살해한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미국에겐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43년 전 도끼만행사건을 딛고 판문점에서 이뤄진 북미정상회담은 향후 한반도 비핵화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북한 군인 30여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 미군 및 대한민국 국군 병력 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이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됐다.

문제의 미루나무는 당시 공동경비구역에서 25년생 15m 높이의 나무로 남한과 북한 양측이 상대방을 감시하기 위한 시계확보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유엔군 측 주한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있어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가 없었다.

판문점은 지난 66년간 한반도의 비극과 희망이 공존한 남북의 상징적인 장소다. 사진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옆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 일명 '도끼만행사건' 발생 뒤 사흘 뒤인 21일 한.미 양군이 미류나무를 잘라내는 모습. (사진출처: 연합뉴스)
판문점은 지난 66년간 한반도의 비극과 희망이 공존한 남북의 상징적인 장소다. 사진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옆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 일명 '도끼만행사건' 발생 뒤 사흘 뒤인 21일 한.미 양군이 미류나무를 잘라내는 모습. (사진출처: 연합뉴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스 대위를 위시해 미군 6명과 한국군 5명 등 11명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린 미루나무의 전지작업을 하는 남한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다.

이 때 북한군 박철 중위와 다른 장교 1명, 그리고 15명의 부사관과 병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박철 중위의 작업 중지 재요구를 보니파스 대위가 거부하자 박철의 공격명령에 따라 인민군 부사관과 병들은 트럭에 실어 가지고 온 곡괭이, 몽둥이와 함께 노동자들이 작업에 쓰려고 가져왔던 도끼 등을 빼앗아 휘두르며 기습했다.

이들은 유엔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해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이송 중 사망했다. 주한 미군 부사관과 병 4명, 국군 장교와 부사관과 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유엔군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

◆제2 한국전쟁 발발 위기까지

사건 발발 후 우리나라와 미국은 “사태 책임은 북한에 있다”는 내용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고 공동경비구역 내에 인민군이 설치한 불법 방벽(防壁; 바리게이트 등)을 제거하기 위한 폴 버니언 작전을 기본으로 폭격기, 함대를 동원한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3이 발령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특전사 제1 공수특전여단 김종헌 소령을 지휘관으로 하고 64인의 특전사 대원들로 구성된 결사대가 편성되어 보복작전이 실시됐다.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을 트럭에 숨기고 카투사로 위장한 64명의 특전사 요원들은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폴 버니언 작전에 투입돼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했다. 북한군이 이에 대응하지 않고 물러서서 더 이상의 무력사태로까지 확대되진 않았다.

이후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주석 직에 있던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 유감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했다. 이후 판문점 내의 공동경비구역에서도 경계가 설정됐으며 경계 밖 상대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됐다. 사건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에는 근처에 있는 캠프 키티호크가 보니파스 대위를 기려 캠프 보니파스로 개칭됐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4월 27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2018남북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산 그림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4월 27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2018남북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산 그림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정전협정부터 판문점선언까지

판문점은 66년 전 정전협정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6·25전쟁도 정지됐다.

북한은 1974년부터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고, 199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교전 당사국인 남북한과 미국·중국 대표들이 모여 4자회담을 열었으나 성과는 없었다.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합의해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1년여 만에 남북미 정상이 사상 최초로 판문점에서 만남으로써 판문점은 새로운 역사를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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