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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작가를 대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한마디 '부러움'이 아닐까. 직장에 얽매어 있는 사람에게 여행은 생각만으로도 달콤하고, 설레며, 짜릿하다.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이렇게 우리가 몇 달을 기다려 겨우 휴가를 내어 다녀오는 여행을, 그들은 돈을 받아가면서 공짜로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생에 한 번 갈 수 있을까 말까한 세계 각지의 휴양지와 명승지들을 밥 먹듯이 다녀온다. 그 얼마나 부러운 삶인가?

총 15권의 여행 가이드북을 집필한 뱅상 누아유는 항상 모임에 나가서 이런 일을 겪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행 가이드북을 쓴다고요?"
"네"
"여행을 하면서 돈을 번다고요? 맛집이랑 호텔도 둘러보고요?"
"네, 뭐 그런 일도 하죠…."
"여행 경비로 쓴 돈은 다 돌려받을 수 있나요?"
"네, 다행이지요! 난…."
"비행기 표와 경비 일체를 받나요?"
"아, 그럼요, 그렇긴 하지만…."
"쳇…."
"복이 터졌네요!"
"정말 놀라워요!"
"힘든 일도 많겠지요?"
"그럼요, 꿈과 현실은 엄연히…."
"그래도 다른 사람이랑 직업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겠죠?"
모두들 왁자하게 웃는다. 단 한 사람만 빼고. (16쪽)

도무지 사람들은 다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정작 여행 작가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말들은 저 '말줄임표' 속에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책 <여행 가이드북 거꾸로 읽기>에 다하지 못 한 말들을 담았다. 프롤로그에 '여러분은 얼마쯤 속고 있다'는 다소 도발적인 언사를 곁들여서.

<여행 가이드북 거꾸로 읽기> 겉표지
 <여행 가이드북 거꾸로 읽기> 겉표지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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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신도 몰랐단다. 볕에 그을린 얼굴, 도장이 잔뜩 찍힌 여권, 주머니가 여럿 달린 등산복 조끼에 아프리카 부적을 품고 다니며 남의 돈으로 온갖 대륙을 누비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란다.

그러나 행선지를 고르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여행 가이드북에 실릴 행선지는 대개 출판사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 정말 가끔 여행할 곳을 고르는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간의 경험으로 저자는 '지뢰'라 불릴 만한 행선지들을 피하는 요령을 소개했다.

우선 열대지방은 피해야 한다. 모기가 들끓는 열대지방을 택한다는 것은 여행을 망칠 것인가, 아니면 40도에 달하는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며 미쳐갈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셈이다. 지금 한창 인기 절정인 여행지 역시 피해야 한다. 이미 소문이 돈 곳들을 뒤늦게 찾아가 봐야 낙원은 사라지고 기념품 상점들이 우후죽순 들어서 있을 것이다. 또한 현지인들은 영어를 쓰기 시작하며, 바다가재는 공급이 부족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먼 나라를 갈 수도 없다.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 가라고!

우여곡절 끝에 여행을 나서도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시간은 부족하고 갈 곳은 많다. 정보라도 얻기 위해 찾은 관광안내소에서는 서로 관할이 아니라며 떠 미룬다. 그래도 몸으로 때우고 시간을 쪼개어 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해낼 수가 있다. 

정말 힘든 것은 식당 평가다. 아무리 식욕이 왕성한 작가라 해도 하루 8군데 식당의 음식을 몸소 먹어보기란 불가능하다. 식당의 풀코스 요리는 두 끼만 먹어도 하루 소비 열량을 초과한다. 그렇다고 현지 식당의 음식은 빼먹을 수 없는 정보다. 타지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여행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여행 작가들은 일종의 꼼수(?)를 부린다. 식당의 입구에서 나오는 손님을 붙잡고 길거리 설문조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특별한 것을 얻지는 못한다. 그저 '가자미는 맛있다, 오늘의 메뉴는 매일 바뀐다, 분위기와 서비스는 괜찮다' 정도. 이제 이 단서를 가지고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창작해내어야 한다. 21분을 소비한 성과치고는 괜찮은 편이다.

가끔 이런 사람도 만난다. 우연히 만난 여행객에게 식당 추천을 부탁했다. 깔끔한 스타일의 밀리터리 룩을 멋지게 차려 입은 50대 미국인 관광객이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신뢰감이 맛집에 대해 뭘 좀 알 것 같다는 아우라를 발산했다. 그는 전망이 '판타스틱'하고 요리는 '그레이트'하며 직원들도 '원더풀'한 '어메이징'한 식당이 있다고 했다. 기대에 찬 저자의 무엇이 가장 맛있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거긴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있더라고요!" 

이런 상황 속에서 건실한 여행 가이드북이 만들어질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행 가이드북은 달콤하게 속삭인다. 어서 나를 집으라고. 그러면 당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은 골짜기, 비밀스러운 섬, 그렇고 그런 속물들은 모르는 명소를 가르쳐주겠노라 손짓하는 것만 같다. 저 책 한 권이면 판에 박힌 여행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긴다. 심각한 모순이다.

생각해보라. 여행 가이드북은 폭넓은 독자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래야 팔린다. 매우 광범위한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 캠핑족, 대학생, 교수, 신혼부부, 가족, 친환경주의자 등등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에게 독특하고 개성이 있는 여행을 안내하는 것이 가능할까.

거기다가 아무리 한적한 장소라도, 여행 가이드북에 실리는 순간 많은 관광객들이 들이닥친다. 비밀스러운 낙원이 도떼기시장으로 변해버린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어떤 현지인은 저자를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사람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 기막힌 해변을 알려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해변이 당신 책에 소개되면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겠지요."

이쯤 되면 도저히 여행 가이드북을 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여행 가이드북을 읽을 때 참고할 수 있는 팁을 제공한다. 이는 마치 진실만을 말할 수 없는 여행 작가들이 독자들에게 울리는 일종의 숨겨진 경보다. 마치 암호를 해독해야 하는 수준인데, 그 해석이 재미있다.

숨겨진 메시지는 대개 늘 같다. "도망쳐!" 예를 들어볼까. '관광객 상대 식당'(메뉴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으며 네덜란드어를 배우기에 안성맞춤인 곳), '손님으로 미어터지는 술집'(옆 사람 겨드랑이 냄새를 맡으며 선 채로 맥주를 마셔야 하는 곳), '소박한 박물관'(화석 두 점과 오래된 압착기 하나가 달랑 놓여 있음), '스파르타식 안락함'(매트리스가 꺼진 침대, 방구석에 마련된 세면대, 채광은 천장의 뚜껑문으로 해결).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해설 가이드가 열심히 제공하는 설명'은 어떨까. '열심히' 하는 설명이 꼭 '흥미로운' 설명은 아니다…. '열심히' 하는 설명은 '사람 피곤하게 하는', '진저리 쳐지는', '끝이 없는' 설명을 뜻할 수도 있다. (238쪽)

오, 그러니 여행 가이드북 작가가 조약돌을 길에 떨어뜨리듯 본문에 배치해 놓은 미사여구들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말지어다!

덧붙이는 글 | <여행 가이드북 거꾸로 읽기>, 뱅상 누아유 지음, 이세진 옮김, 걷다 펴냄, 2013.04, 1만2천원



여행 가이드북 거꾸로 읽기

뱅상 누아유 지음, 이세진 옮김, 걷다(2013)


태그:#여행 가이드북 거꾸로 읽기, #뱅상 누아유,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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