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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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4.05.22. 오후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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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291’의 책장. 온갖 종류의 사진 관련 서적이 꽂혀 있다.

[한겨레]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부암동 새 주인들

부암동에 새롭게 둥지 튼 동네 사람들…

사진가 임수식, 푸드스타일리스트 김정민, 여행가 김남희의 개성 넘치는 공간들


서울이 채 담아내지 못한 풍경을 가진 종로구 부암동의 정취가 좋아 자신의 둥지를 튼 이들이 있다. 임수식(40), 그는 사진가다. ‘책가도’ 연작으로 요즘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다. 카메라로 책장을 찍어 부분적으로 한지 프린팅한 뒤 그것들을 작가가 직접 손바느질로 이어 붙인 작품이다. 서가와 문방사우 등을 그린 조선시대 그림에서 힌트를 얻었다. 작가 김훈, 박범신, 황석영 등의 책장이 피사체였다. 작년 11월 그가 동료 사진가 신강욱, 김정회, 큐레이터 박정은, 전 캔파운데이션 실장 민은주, 아마추어 사진가들과 뭉쳐 ‘협동조합 사진공방’을 꾸렸다. 사진이란 테마로 협동조합이 결성되는 건 드문 일이다.

신인 작가 오혜리씨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 291’.

사진 갤러리 겸 도서관

공간 291

아마추어 작가들의 열린 공간

한 편의 예술작품 같은

더 스타일링 그룹


‘더 스타일링 그룹’에 설치된 가구와 소품.

그들의 첫 작업은 ‘부암동 29-1번지’에 사진갤러리 겸 사진도서관인 ‘공간 291’을 연 것. “처음 시작은 사소했다. 13년간 유지한 양재동 작업실을 정리하는데, 많은 사진책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수백권이 넘는 책을 누군가와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대 사진아카데미 강사이기도 한 그는 과정을 마친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늘 전시나 작업에 관한 조언, 공간에 목말라하는 점을 떠올렸다. “사진을 전시하고 젊은 사진가를 발굴했던 대안공간 건희가 축소되고 또다른 대안공간이었던 ‘보다’가 없어진 것도 안타까웠다. (수익이나 비용 압박 등의) 부담은 줄이고 혜택은 나누는 조합을 만들자 생각했다.”

그의 주변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고, 현재 조합원은 그를 포함해 23명이다. 때맞춰 29-1번지는 빈 공간인 채 주인을 찾고 있었다. “사진가들에게 ‘291’은 의미가 크다. 스티글리츠의 ‘291화랑’을 떠올린다.”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는 미국 현대사진의 아버지라고 할 만큼 사진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가다.

공간 291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렸다. 언덕을 헉헉 오르다 만난 아담한 흰 건물은 오아시스를 만난 듯 반갑다. 쑥 들어가면 비스듬한 부암동 햇살을 받은 강렬한 색감의 사진과 눈이 마주친다. “주로 조합원들의 전시를 하지만 젊은 작가들의 데뷔 공간으로도 제공할 거다.” 현재 25일까지 작품 발표를 원하는 신인 작가의 지원을 받고 있다. 3명을 뽑아 무료전시를 지원할 예정이다. 한달에 한번꼴로 작가나 평론가와의 대화도 진행한다.

“부암동은 공간으로 최고다. 상업적인 공간이 거의 없다.” 그는 공간 291이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내미는 따스한 어깨가 되길 바란다. “채워지길 위해 비워진 이 공간은 쉼표다. 마침표가 아니다. 오는 이들 모두 여기서는 쉼표였으면 한다.” 사진기는 부암동 여행의 필수품. 그 사진의 아늑한 휴식처를 만든 협동조합은 지금 부암동의 새로운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이들만이 아니다. “원래 나는 강북 사람이다.” 유년을 꼬박 부암동 일대에서 보낸 푸드스타일리스트 김정민(49)씨는 젊은 시절 내내 동네를 떠나 있었다.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와 강남에 ‘스타일링큐브 아카데미’를 열어 푸드 스타일링과 인테리어 스타일링을 가르쳤다.

푸드스타일리스트 김정민씨의 부암동 공간인 ‘더 스타일링 그룹’.

음식 솜씨가 남달랐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누가 잡아끈 것도 아닌데 음식 쪽 일을 하게 됐다. “외국에 살 때도 부암동이 그리웠고, 강남에서 일할 때도 시간이 날 때마다 부암동을 찾았다.” 마치 연어처럼 회귀해 부암동에 자신의 공간을 열었다. ‘더 스타일링 그룹’이란 문패를 달았다. 그의 공간이 자리잡은 ‘부암동 208-18번지’는 지하지만 지하가 아니다. 건물 지하에 위치하지만 한쪽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산자락에 비치는 안온한 햇볕이 들어온다. 케이터링 등 요리작업도 하고 7명 미만의 소규모 스타일링 수업도 진행한다. 푸드스타일리스트가 꿈이거나 자신의 식탁을 가족들을 위해 더 맛깔스럽게 장식하고 싶은 은퇴자들, 카페나 레스토랑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들 등이 이곳을 찾는다.

공간은 오롯이 그를 보여준다. 한 편의 예술영화나 시, 설치미술을 보는 듯하다. 들머리부터 수묵화가 걸려 있고 중세풍의 긴 화덕이나, 모양이나 종류는 다르지만 색으로 통일한 전등,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작은 공간마다 그가 살면서 모은 수천개의 소품과 그릇들이 쌓였다. 뼈대만 남기고 공간의 설계와 구성을 김씨가 작업했다. “인테리어 재료들은 좋아하는 유리, 나무, 철로만 골랐다. 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가 구성한 공간은 3년 전 출간한 <마음을 담아내는 부엌>에 잘 그려져 있다. 그의 기억에 부암동은 “순수한 카페, 돈 안 벌리는 카페”가 있던 곳이고 여전히 그에게 상업적이지 않은 동네다.

여행지 기분을 서울 하늘 아래서도 누리기 위해 부암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여행가 김남희씨도 있다. 그의 집 옥상에는 텃밭, 나무 몇 그루에 걸린 해먹이 있다. 그는 지난 15일에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열었다. 전세계를 제집 드나들듯이 여행한 그가 부암동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예전에 홍대나 연남동 등에 살았는데, 그곳은 젊고 발랄한 상상력을 기웃거리기에는 좋은 곳이나 너무 도시 한가운데라서 콘크리트의 삭막함이 먼저 다가왔다. 짧은 시간은 견딜 만했지만 긴 시간은 힘들었다. 여기는 문을 열면 다른 이의 담벼락이 있고, 숲과 계곡이 있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산에 나는 둘러싸여 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부암동 맛집의 다크호스들

정영선멸치국수

부암동에 인파가 몰려들면서 한상차림의 한식부터 미니컵케이크, 속을 뻥 뚫어주는 빙수집까지 생겨났다. 자하손만두, 클럽에스프레소가 대표 맛집이었으나 지금은 골목마다 색다른 맛이 빼곡하다.

정영선멸치국수 멸치국수, 비빔국수, 손수제비, ‘정영선 돈까스’ 등이 메뉴. 멸치국수는 성인 여성 두명이 먹기에도 적당할 만큼 푸짐하다. 주인 정영선씨의 이름을 딴 돈가스는 간장베이스의 흥건한 국물 소스에 잘 튀긴 고깃덩이가 담겨 나온다. (부암동 237-29/6000~3만3000원)

세컨드 스토리 차림표에는 다양한 맥주와 와인 등이 적혀 있는 카페풍의 술집이다. 하지만 ‘설화빙’이란 빙수가 매우 유명하다. 대패식으로 간 얼음은 히말라야 산맥을 통째로 먹는 기분이 든다. 천연과일 여러 종류를 섞어 만든 과일차도 인기다. 인기 메뉴다. 14년 전에 이사 온 김동환(44)씨가 주인. (부암동 260-1/3000~9만5000원. 테이크아웃 하면 1000원 할인)

소소한 풍경 정원이 있는 주택을 개조했다. 죽, 샐러드로 시작하는 한식 코스요리가 메뉴. 밀전병, 오리구이 등이 코스에 있다. 가족이나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부암동 239-13/1만4000~5만5000원)

부암식당 40년 넘게 부암동에서 한자리를 지킨 오래된 식당. 강옥자(72)씨가 주인. “아저씨(남편)가 이 자리에서 목공소를 하고 내가 채소를 팔았었다.” 여수가 고향인 강씨가 작년 가을에 담근 김치로 시큼한 김치찌개를, 직접 담근 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만든다. (부암동 260-22/6000~2만5000원)

710 another

710 another 오후 3시에 문 여는 레스토랑. 에르딩거 둥켈, 헤페 바이스비어, 오비골드 생맥주 등과 버펄로 윙, 연어카프레세, 스파게티 등이 메뉴다. ‘710 오리엔탈 치킨’이 인기다. 최근 리뉴얼해서 모던하고 현대적인 분위기의 레스토랑. (부암동 239-9/4000~3만6000원)

주인장이 직접 담근 과일청, 에그타르트 등이 있는 ‘애프터 유’, 만두집 ‘천진포자’, 맥줏집 ‘사이’, 치킨집인 ‘계열사’, 인왕산 자락의 돌덩이를 카페에 살린 ‘럼버 잭’ 등이 있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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