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중앙아시아 정복했지만 ‘칸’이 되지 못한 통치자 티무르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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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6.18. 오후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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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티무르, 신을 악용한 군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티무르 광장에 있는 티무르상.


세상의 모든 전쟁이 정의를 가장한 약탈 행위지만, 종교전쟁은 그중 가장 위험하다. 종교전쟁은 인간의 극한의 야만적인 속성을 최상의 고결함으로 분식(粉飾)하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기 때문이다. 종교전쟁은 정의(正義·올바름)와 믿음의 구분을 파괴한다.

인류는 지난한 갈등을 통해 얻은 집단적 이성으로 사회적 정의의 관념을 구축해왔다. 예컨대 거의 모든 문명권은 살인자는 자기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통칭으로 불리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므로(대개 군주라는 예외자가 있지만) 일종의 보편적 규범이다. 보편 규범은 사회의 정의를 경험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합의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신앙이 개입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특정한 상황에서 타 종교인 혹은 ‘이단’을 죽여도 살인이 아니다. 옳은 이가 그른 이를 죽이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며, 살인은 곧 심판인데 누가 심판자를 응징할 수 있겠는가. 11세기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에서 17세기 독일의 30년 전쟁까지, 유럽의 중세는 종교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일상의 종교생활 또한 전쟁이었다. 14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까지 진행된 마녀사냥으로 ‘남다른 여인’들 수십만 명이 죽고, 그들의 재산은 살인자들에게 몰수당했다. 살인자가 심판자가 되자, 살인의 밑바닥에 숨은 온갖 개탄스러운 원인들은 종교의 가면 아래 숨을 수 있었다. 유목 문명사의 끄트머리에도 이런 개탄스러운 상황이 관찰된다.

■ 보편 정의로 가는 길

강해지기 위해 정주와 유목세계는 서로의 특징을 재빨리 습득했지만, 두 사회에 동시에 적용되는 보편 정의를 확립하는 면에서 양측의 통치자들은 비교적 굼떴고, 그사이 수많은 기형을 양산했다. 위대한 군주들은 유목민답게 종교적인 편견을 갖지 않으면서도 정주민의 경작지를 아끼는 방향으로 진화했지만, 유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종교 살인을 일삼고 정주민 덕에 호사를 누리면서도 약탈을 일삼는 자들도 생겼다.

칭기즈칸 가문의 세계제국은 사실상 유목과 정주의 경계를 부쉈고, 이로 인해 당장 보편적 정의의 확립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가장 많은 인구를 거느렸던 대칸 쿠빌라이가 각성 역시 가장 빨랐다. 그는 몽골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다수자인 한인들이 관직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했지만, 그들을 법의 보호 밖으로 던지거나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 덕에 중국 남부의 한인 상인들은 거대한 몽골의 교역망을 이용하여 전례 없이 부를 축적했다. 마르코 폴로는 항주(杭州·킨사이)의 거상들이 얼마나 부유한지 ‘유럽인들은 분명 왕으로 착각할 것’이라며 경탄했다.

대칸은 이슬람의 ‘종교전쟁’을 경멸했지만 이슬람 자체를 탄압하지는 않았고, 기독교도가 아니었지만 그 의식을 받아들였다. (명(明)은 이 ‘외래 종교’를 추방 대상에 올림으로써 몽골 지배를 재삼 부정했다). 그는 자신의 ‘보편제국’ 안에서 종교전쟁을 벌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에서 훌레구는 정복 당시 무슬림들을 살육했지만, 그것을 신앙과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요인 암살로 이름이 높았던 이스마일 파의 암살자단을 철저히 응징한 것은 그들의 행동을 혐오했기 때문이며, 기독교도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다수 무슬림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판단이자 기독교도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중국의 대칸처럼 끝까지 ‘우상숭배자(불교도)’로 남았다. 훌레구 사후 약탈과 살육의 광풍에 대한 반성이 즉각 일었다. 후임 칸 아바카는 군대를 옮길 때 ‘곡식 이삭을 한 올도 밟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기록됐다. 7대 가잔 칸은 쿠빌라이의 비전을 페르시아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정력적인 군주였다. 그는 무슬림이 되고 나서 기독교나 불교도의 성소를 파괴했지만, 그것은 대다수가 무슬림인 나라에서 몽골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대신 그는 걸핏하면 농민들을 약탈하는 몽골의 고관들을 가차 없이 처리했다. ‘당신들은 내가 타지크인(페르시아인 농부들) 약탈을 허락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약탈하고 나에게 식량을 구걸하러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약탈을 원하는 몽골 고관들에게 그가 던진 경고였다. 중국에서 우구데이에서 시작하여 쿠빌라이가 완성한 보편적인 정의의 기준이, 몇십 년 지나 페르시아에도 정착된 셈이다. 이렇게 종교 문제를 넘어 정착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대칸이 주도한 움직임은 전 세계 몽골 울루스의 기준이 되어갔던 듯하다. 쿠빌라이와 대권을 겨뤘던 우구데이 가문의 적자 카이두는 이 부분에 관한 한 쿠빌라이와 생각이 같았다. 유목민이 다스리고 있지만 정주민은 경제적인 기반이다. 약탈과 착취는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차가타이 영지는 오랫동안 예외지대였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몽골인들은 보편적인 정의를 실현할 의지를 가지기 전에 끝 모를 내전에 돌입했다. 칸 바락은 필요 시 자기 치하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고, 카이두가 그를 책망하자 군사적 대응에 들어갔다. 바락은 훌레구 울루스를 치기 위해 잠시 카이두와 화해하고, 카이두의 권고에 따라 농민들을 회유하여 경작하게 했지만, 추수할 때는 바로 빼앗아 군자금으로 충당해버렸다. 상대편의 아바카마저 이렇게 그를 조소했다고 한다.

“그대가 진실로 알아야 할 사실은 세상의 왕국은 폭정과 강압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으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양육하며 지고한 신의 명령과 금령과 한계를 지켜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집사>, 김호동 역)

1270년 바락은 기어이 훌레구 울루스로 쳐들어가 니샤푸르를 약탈하였지만 패하여 병들어 죽었고, 아바카는 복수로 히바와부하라를 약탈했으니 차가타이 울루스의 고통은 끊이지 않았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까지 차가타이 칸들은 싸움의 손실을 벌충하고, 전사들을 만족시키고, 다시 싸울 자원을 얻기 위해 몽골과 튀르크 전사들로 둘러싸인 이웃 대신 델리술탄국으로 여러 차례 약탈 원정을 떠났지만 모조리 격퇴당했다. 델리술탄국의 지배자들은 튀르크 기마 전사들인 데다 인도의 코끼리 부대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술탄국의 튀르크인 지배자들이 당시 세계 최고였던 이슬람의 기계/관계 기술을 인도 아대륙에 도입하여 생산력과 인구를 계속 늘려가고, 힌두교도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대신 동반자로 인정했으므로 기층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침략군은 약탈에 성공한 다음 사로잡혀 코끼리에게 밟혀 죽는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차가타이 울루스의 칸들이 유독 호전적이어서 상황이 복잡했던 것은 아니다. 울루스가 그야말로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기에 개입 세력이 너무나 많았고 상대적으로 전사들을 부양할 초지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13~14세기 차가타이 울루스 일대의 분쟁이 세계사적으로 끼친 유일하게 좋은 영향은 바다의 길이 넓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분쟁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서아시아/인도(델리술탄국)와 중국의 상인들은 바닷길을 넓힘으로써 대응했다.

각지의 칸들이 보편 규범을 확립하려 노력하던 바로 그때 몽골 세력은 전 세계에서 퇴조를 겪었다. 14세기 중반 훌레구 울루스가 붕괴했고, 칸 울루스(원나라)는 한인 반란군에게 밀렸으며, 주치 울루스와 차가타이 울루스는 분할되었다. 간단히 말해 몽골은 기존의 파괴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전반적인 몽골의 퇴조 시기, 최악의 혼돈을 자랑하는 차가타이 울루스 안에서 유목민과 정주민의 잔인한 점만 습득한 희대의 정복자 티무르가 태어났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는 티무르 제국의 중심이며 세계의 부가 모이는 저수지였다.


■ 티무르 대(對) 오스만

14세기 몽골 퇴조하는 혼돈의 시기

차가타이 울루스서 태어난 티무르

숙부 배신하고 몽골인들 몰아내

군주 되지만 ‘칸’이란 칭호 못 얻어


초지가 없는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태어난 티무르는 비록 바를라스부 출신 튀르크 귀족 전사였지만 사실상 정주민에 가까웠었다. 칭기즈칸 가문에 낀 튀르크 군벌들의 기회주의를 제대로 배운 그는 경력의 출발조차 배신이었다. 투글룩 티무르가 튀르크 군벌들의 혼란을 이용하여 차가타이 울루스를 재통하려 오자 그는 숙부 핫지 바를라스를 배신하고 재빨리 항복했다(1360년). 투글룩 티무르가 떠나고 핫지 바를라스가 돌아오자 티무르는 다시 그에게 항복했다. 유리하면 싸우고 패하면 항복하는 떠돌이 군벌 생활을 했지만, 이 영민한 군인은 승리의 냄새를 맡는 재주가 있어서 기어이 튀르크 경쟁자들과 몽골인을 몰아냈다.

1379년 우르겐치 무슬림 학살 시작

30년간 수십만명 살육 자행했던 건

정복지서 리더로 인정 못 받은 방증


칭기즈칸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방대한 땅을 차지하고도 칸이라 칭하지 못한 이 사람에게 이슬람은 구원이었다. 티무르 사후 얼마 안 있어 나온 샤라프 앗 딘의 <승전기(ZafarNama)>(영문 역서명 The History of Timur-Bec)는 티무르의 갖은 잔학행위와 배신을 이슬람을 위해 기획된 것으로 꾸며 놓았지만, 그의 살육 대상은 대개 무슬림이었다. 초지일관한 칭기즈칸과 달리 이 기회주의자는 힘을 얻은 후에야 본능을 드러냈다.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다 차지한 후, 1379년 우르겐치를 함락시켰을 때부터 본격적인 살육과 약탈이 시작되었다. 동부 이란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원정하여 세이스탄 자란지의 주민을 모두 죽였고, 이스파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7만명의 머리를 성벽 밖에 쌓았고, 시내 곳곳에 해골무지가 생겼다”고 한다. 1393년 바그다드 학살, 1396년 사라이학살 등 그의 학살 행각은 도를 더해갔다. 1398년 델리술탄국 원정의 이유는 유독 기괴했는데, 델리의 튀르크인 지배자들이 ‘이교도(힌두교도)에 대해 너무 너그럽다’는 것이었다. 결전을 앞두고 힌두교도 포로들을 집단 처형했고, 델리 함락 후 군인들이 약탈과 살육을 감행했다. 어떤 자료는 죽은 이가 10만이라 하고 어떤 자료는 20만이라 한다. 1401년 바그다드가 다시 배반하자 그는 9만명 학살로 화답했다. 악순환의 원인은 간단하다. 중앙아시아의 생산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 큰 규모의 군대와 원정을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약탈이 필수적이었다. 반란과 재정복이 반복되었다는 것은 정복지 주민들이 이 약탈자를 지배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다.

1402년 그는 셀주크가 사라진 땅에서 커가고 있던 신생 오스만 튀르크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오스만의 술탄 바야지드에게 경고를 보냈다. <승전기>에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알라께서 네게 주신 것과 불신자들에게서 빼앗은 것에 만족하고, 알라께 은총을 받으려거든 다른 통치자들에게서 빼앗은 것을 당장 토해내라. 안 그러면 내가 알라의 도움으로 복수하리라.’

바야지드는 역시 격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우리가 와서 너를 찾아내어 타브리즈와 술타니야까지 추격해 주겠다. 그때는 하늘이 누구를 보우하시는지 보게 되리라.’

하지만 소아시아의 오스만 혼성 군단은 몽골 군대의 규율을 장착한 노련한 침략군을 견디지 못했다. 오스만 혼성 군대는 패해 기독교인 보조병들은 모조리 살해되었고, 술탄 바야지드는 생포되어 철창에 갇혔다가 자살했다.(1402년)

1402년 신생 오스만도 정복하지만

3년 뒤 티무르 죽고 제국 사분오열

오스만은 부활, 20세기까지 이어져

“종교국가 아닌 실용국가 목표”

오스만 왕조 지속 비결은 관용통치


이제 티무르를 가로막는 것은 없어 보인다. 이듬해 1403년 티플리스에서 다시 학살을 벌이고, 1405년에는 급기야 파미르를 넘어 명나라를 치려 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원정 직전에 티무르는 사망했다. 파미르를 넘었다 해도, 일전에 시체로 산을 쌓은 후 황금만 챙겨 인도를 떠났듯이, 비(非)이슬람권 점령지를 다스릴 의지나 능력이 없는 티무르는 약탈 자체로 만족하고 떠났을 것이다.

바야지드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의 원리는 오묘하다. 티무르 사후 제국이 순식간에 사분오열하고 백 년 후 완전히 사라졌지만, 오스만 튀르크 집단은 패배 후 50년(1453년) 만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더니 20세기까지 살아남았다. 14세기 초 겨우 몇만 장(帳)의 유목집단에 불과했던 오스만이 어떻게 그런 성취를 얻었을까? 그들 역시 수없이 싸웠지만 전반적으로 티무르와 반대의 길을 갔다. 오스만사 대가의 평가는 명백하다.

“오스만 제국에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야 하는 더 명확한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그 역사의 거의 대부분에서 보여준 관용적인 통치의 모범 때문이다.…무슬림과 기독교인 모두 아나톨리아와 그 너머에서부터 오스만의 깃발 아래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몰려들었다.…이 오스만 왕조의 대업은 종교적인 국가가 아니라 실용적인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전반적으로 오스만 신민들이 된 사람들은 이전 군주의 관료들에게 냈던 것보다 세금을 적게 내고 있음을 느꼈다.” (이상 도널드 쿼터트 <오스만 제국사>, 이은정 역)

한마디 보태자면,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처절하게 약탈하지 않았다면(1204년) 오스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 필자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11권)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말, 바퀴, 언어> 등 다수를 번역했다. 유라시아 유목문명에 관한 저술을 준비하는 동시에 파미르 고원에 장기 거주하며 현지 환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원국 | 역사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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