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폭염에서 우리를 구할 자, 드라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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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7.10. 오후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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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17일부터 사흘간 국제 드라큘라 콘퍼런스가 루마니아 브라쇼브에서 개최되었다. 15세기에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이 살았다는 곳에서 멀지 않은 도시다. 드라큘라의 역사와 신화를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하기 위해 1995년부터 국제대회가 열렸다고 하니 호사스러운 인간의 호기심을 판매하는 시장에서 드라큘라에 제법 상품성이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드라큘라는 유럽의 역사에서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인 뱀파이어와 생물학적으로 동등한 이미지를 획득했으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영화나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기 때문에 햇빛을 싫어하고 빈혈이 심한 데다 잇몸이 점차 줄어들면서 이가 길어지는 현상에 주목한 의학사가들은 드라큘라가 포르피린증(porphyria)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의인화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정한다. 짐작하다시피 포르피린증은 인간의 몸에 포르피린이라는 물질이 많아서 생기는 증세를 칭하는 의학 용어이다.

화학과 생물의 경계에서 20년 넘게 공부한 내 입장에서 보면 포르피린(porphyrin)은 우리 인류에게 단연 가장 중요한 화합물 중 하나이다. 간단히 숫자로 예를 들어보자. 우리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세포이다. 인간이 가진 전체 세포가 약 40조개라면 그것의 절반이 넘는 약 25조개의 세포가 적혈구이다. 순전히 산소의 운반만을 목적으로 진화한 적혈구 안에는 세포라고 규정할 만한 소기관이 아무것도 없다. 유전 정보를 함유하는 핵도 없고 세포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도 없다. 대신 세포 하나당 2억개의 헤모글로빈 분자가 들어 있다. 헤모글로빈(heme+globin)은 네 개의 글로빈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고 글로빈 하나당 한 개의 헴(heme) 분자가 할당된다. 헴이라는 화합물이 글로빈 단백질 하나와 일대일로 결합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적혈구 하나에는 8억개의 글로빈 단백질과 8억개의 헴이 들어 있다. 적혈구 세포 숫자에 헤모글로빈 분자 수를 곱하면 20,000,000,000,000,000,000,000이다. 0이 무려 스물두개다. 이 계산에 따르면 우리 몸 안에는 최소한 저만큼의 헴 분자가 들어 있다.

그럼 포르피린은 헴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간혹 나는 수업시간에 포르피린의 화학적 구조가 네 잎 클로버를 닮았다고 비유적으로 말한다. 이 클로버 중앙에 철이 들어가 있는 물질을 우리는 헴이라고 부른다. 헤모글로빈에서 산소와 결합하는 부위가 바로 헴 안의 철이다. 그러니까 헤모글로빈 안에 헴이 그리고 헴 안에 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헴 안의 철 대신, 눈자위 아래가 파르르 떨릴 때 복용한다는 마그네슘이 포르피린 분자에 들어오면 엽록체라는 화합물이 된다. 동물의 몸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헴과 태양 복사에너지를 수확하는 엽록소의 기본 골격이 바로 포르피린이다. 호흡과 광합성이 없는 다세포 생명체가 없듯이 포르피린이나 헴을 만들지 않는 생명체도 존재하지 못한다.

상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헴은 세균이나 식물, 동물 모두 몇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매 단계마다 효소가 일을 한다. 따라서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완제품인 헴의 양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헴 전구체 불량품의 비중도 상대적으로 늘어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증세를 포르피린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햇빛 아래에서 단백질 강보에 싸인 헴은 안정적이지만 자유롭게 활보하는 불량 포르피린은 화학적으로 매우 극성스러워서 세포 입장에서는 위험한 물질이 된다. 또 헴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아 헤모글로빈의 재료가 적은 포르피린증 환자는 자주 빈혈에 시달린다.

포르피린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햇빛에 노출되면 살기가 괴로워지니까 빛을 피하는 드라큘라의 행동적 특성은 이해가 간다. 십자가를 기피하는 일은 종교적인 이유가 있다고 해도 드라큘라가 왜 마늘을 싫어하는지는 잘 모른다. 최근에 게재된 한 의학 논문에 마늘 성분이 헴을 분해하도록 도와서 빈혈 증세를 더욱 심하게 할 것이기에 이들이 마늘을 피할 것이라는 자못 ‘비장한’ 추론이 실리기도 했다.

좀 생뚱맞긴 하지만 포르피린증을 앓는 사람들은 잘 먹어야 한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으면 헴을 합성하라는 개시 신호가 전달되고 그에 따라 포르피린의 양이 늘면서 위험 물질이 축적된다는 연구 결과가 ‘셀’ 자매지에 발표되기도 했다. 이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들은 18~19세기에 걸쳐 장기간 영국을 통치했던 조지 3세의 행적에서 영양 결핍에 따라 악화되는 전형적인 포르피린증 증세를 찾아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극적인 소재에 본격적으로 과학적 잣대를 들이댄 매우 흥미로운 결과이기도 했지만 헴의 존재가 생명체의 ‘먹고사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겠느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 멋진 연구였다.

현재 유럽에선 40도를 넘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사람의 체온에 육박할 정도의 더운 날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드라큘라처럼 우리도 이젠 여름 햇빛을 피해 다녀야 하나 중얼거리며 멍하니 창밖을 보는데 드라큘라의 저변에 깔린 생물학에서 뜨거워지는 지구를 식힐 어떤 묘수를 깨우칠 순 없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산소와 강하게 결합하는 헴 분자를 개선해 태양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포획하는 동시에 이산화탄소를 고정해 온 식물의 엽록소처럼 포르피린 구조를 흉내 낸 모종의 화합물을 합성할 수는 없을까? 선크림을 바르는 대신 하마처럼 자외선을 차단하는 붉은색 색소를 분비해 태양과 세균으로부터 인류의 피부를 보호할 수는 없을까? 줄기는 모래와 자갈에 꼭꼭 숨겼지만 옥살산 결정의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햇빛을 받아들인 다음 광합성을 수행하는 나미비아 나미브(namib) 사막의 선인장을 어떤 식으로든 모방하는 건 어떨까?

전 지구적 차원의 오싹한 납량(納凉) 특집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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