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공무집행하다 4억 배상 판결… 맞으면 살고 맞서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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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열심히 하면 손해" 술렁이는 경찰

일러스트= 안병현

이달 초 경찰 내부망에 불만 글 30여 건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현장을 무시한 처사'라거나 '범죄자 검거에서 손을 떼란 소리냐'는 식의 하소연이 많았다. 댓글 1000여 건 중엔 '사기가 떨어진다, 순찰을 나가면 위축된다'는 내용도 담겼다.

경찰 내부가 술렁인 것은 지난달 있었던 법원의 한 판결 때문이었다. 교통 법규를 어긴 운전자가 경찰의 어깨를 붙잡는 등 불응하자 경찰이 제지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운전자가 다쳐 소송을 당하게 된 것이다. 법원은 4억4000여만원을 운전자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현장 경찰관들에게 '열심히 일하면 손해'라는 풍조가 생긴 지 오래다. 선임일수록, 챙겨야 하는 식솔이 많은 사람일수록 뒷짐을 진다. 무작정 비난할 수만도 없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괜스레 나서면 감찰받을 일이 생기고, 이렇게 소송이라도 당하면 차나 집을 팔고 대출을 받아야 할 정도로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 금고 이상 형을 받으면 옷을 벗어야 한다. 욕먹고 위협당하는 건 기본, 심지어 뺨을 맞는 등 폭력을 마주해도 어지간해선 '참을 인' 자를 쓴다. 범인 잡아오는 것만큼 잘 참는 게 능력이 된 곳, 대한민국 경찰의 현주소다.

경찰에게 물리력 행사했는데

지난 2012년 3월 경찰관 김모씨는 서울 강남구 양재전화국 사거리에서 불법 끼어들기를 한 최지연(가명)씨를 적발했다. 최씨는 김씨의 면허증 요구에 10여분간 불응하다 면허증을 냈다. 김씨가 범칙금 납부 통고서를 발부하려 하자 최씨는 이를 거부하며 운전면허증을 돌려달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최씨는 김씨 제복 주머니와 어깨 부분 등을 붙잡았다. 얼굴로 손이 온다고 생각한 김씨는 오른팔로 최씨의 목을 감고 한쪽 발로 다리를 걸어 최씨를 넘어뜨렸다.

문제는 최씨가 넘어지며 오른쪽 무릎에 골절상 등을 입어 8주 상해를 입은 것. 연소득 2억원가량의 유명 영어 강사였던 최씨는 국가를 상대로 14억원을 배상하라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지난달 서울중앙지법은 최씨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4억4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경찰 김씨는 상해 혐의로 기소돼 벌금 500만원을 냈다. 형사 합의 과정에서 공탁금 2000만원도 냈다. 운전자가 납부통고서를 받기 거부하면 경찰관은 이를 중단하고 즉결심판에 넘겨야 한다. 법원은 김씨가 납부통고서를 계속해 발부하려 한 것이 문제라고 본 것이다. 벌금형이 인정된 만큼 4억4000여만원 중 상당 부분을 김씨가 물 가능성이 있다. 국가가 김씨에게 돈을 물게 할지, 얼마나 내게 할지는 고검(검찰)이 심의한다.

지난 2017년 취객을 제압하다 부상을 입힌 경찰관이 빚더미에 오른 사례가 있다. 2016년 경찰관 박모씨는 은평구의 한 주점에서 행패를 부리던 30대 남성을 지구대로 연행했다. 남성이 지구대에 와서도 소리를 지르며 박씨에게 달려들자 남성의 목을 밀어 넘어뜨렸는데 전치 5주 부상을 입었다. 박씨는 감봉 처분을 받고 형사 합의금으로 5000만원을 내고 민사소송으로 4000여만원을 배상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경찰 내부는 부글부글 끓는다. 공무 수행 중 경찰에게 힘으로 대항한 사람을 제압한 것을 문제 삼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일선 경찰관은 "폭력에 맞서 물리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범죄자를 제압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는 4억원 배상 판결이 부당하다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11일 기준 3만7000여명이 동의했다.

경찰 때린 이에겐 무죄 선고

경찰이 소송이나 감찰 등 책임질 일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다 현장을 제압하는 데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지난해 광주 수완지구에서 일어난 집단 폭행 당시의 경찰 대응이 일례다. 공개된 CCTV에선 가해자 무리가 피해자를 폭행하는데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하는 모습이 담겼다.

경찰 등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을 체포하거나 감금, 폭행해 상해가 발생할 경우 독직 폭행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이 죄는 벌금형이 없어 인정되면 바로 퇴직 사유가 된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독직 폭행 신고 건수는 583건, 매해 100건 이상이 발생한다. 은평구 경찰관 박모씨가 형사 합의금 5000만원을 건넨 것도 독직 폭행 혐의로 기소됐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경찰관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빈번하다. 근무 중 부상당한 경찰관이 매해 1000명을 넘는다. 공권력이 경시되다 못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지난 5월 서울 구로구에선 중국 동포 장모씨와 허모씨가 경찰관 뺨을 때리고 체포하려는 경찰관의 공무 집행을 방해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 계동에선 현대중공업 노조원들과 대우조선 조합원들이 출동한 경찰과 충돌해 경찰관의 치아가 부러지는 일도 벌어졌다.

법이 경찰관을 지켜준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지난 4일 대법원은 가정집에 출동한 경찰관을 폭행한 마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간 경찰에게 마모씨는 '누구냐'며 유리병을 던지고 주먹으로 뺨과 턱 부위를 때렸다. 법원은 경찰이 영장을 소지하거나 제시하지 않았고 실제론 이 남성을 현행범으로 볼 상황도 아니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외국에서 경찰 때린다면

경찰을 향한 폭행은 외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체포에 불응하는 행위나 모욕적인 말도 폭행으로 본다. 벌도 무겁다. 주마다 다르지만 캘리포니아주에선 경찰을 상습적으로 폭행하면 종신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 피의자보다 단계가 높은 물리력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주먹을 휘두르면 경찰봉을 사용하고 칼을 들고 있으면 총을 쓰는 식이다.

일본은 공무 집행 방해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이 가해자와 합의할 수 없다. 개인이 아닌 국가가 피해 본 것으로 여긴다. 영국에서도 경찰관 폭행엔 종신형 선고가 가능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찰이 폭행이나 욕설을 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문제가 된 '광주 데이트 폭력 사건'에선 경찰이 피의자로 지목된 30대 남성에게 욕설하거나 부적절한 언행을 한 것이 드러났다. '버닝썬 사건'의 단초가 된 제보자 김상교씨도 체포 과정에서 폭행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경찰 스스로 강압 수사 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부터가 문제 해결의 전제라고 얘기한다. 법무법인 민주의 서정욱 변호사는 "경찰을 향한 송사와 폭력 등은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생긴 현상이기도 하다"며 "경찰 역시 강압이나 권력 남용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공무 집행 시 조사받는 사람이 부상 등을 당하면 경찰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구조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폭력이나 송사 탓에 제대로 범죄에 대응하지 못한 손해는 그대로 국민에게 전가된다"며 "공무 집행 시 생긴 문제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해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김아사 기자 asa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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