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면 이혼할 수 있다” 유책과 파탄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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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7.14. 오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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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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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법의 원칙은 유책주의… 파탄주의를 전면적으로 배척 안 해



#1 70대 노인이 이혼법정 대기의자에 앉아 하소연을 시작했다. “내가 그거(며느리)한테 산후조리도 해줬는데 그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다이아 1캐럿에다 쌍가락지, 보석 3종세트까지 해줬어요. 그러면서 우리 아들은 겨우 롤렉스 시계 하나 해줘놓고 뭘 내가 못해줬다는 거야. 집 리모델링비요? 붙박이장은 원래 (그 집에) 돼 있었고, 내가 (시)부모로서 해줄 건 다 해줬는데 나 때문에 이혼한다는 게 진짜 기가 막혀서…. 나는 있잖아요, 변호사님. 나는 가는 데까지 갈 거야. 우리 애(아들)가 걔한테 월급을 단 한 장도 안 갖다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축한 흔적이 있어야지. 다 써버리고…. 그러면서 나한테 만날 빌었대. 언제 뭘 빌어. 나한테 매달 100만원을 줬다고요? 나는 기억에 없는데? 뭐 명절이나 이런 때에 얼마씩 줬겠지만 나는 기억나지도 않아요. 내가 쌀을 갖다줘도 관리를 못해서 쌀벌레가 생기게 하질 않나….”

얼마 뒤 법정경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전 11시10분 재판 오신 분 들어오세요.” 변호사는 노인을 향해 “제가 정리해서 판사님께 잘 말씀드릴 테니까 일단 어머님은 방청석에 앉아 계시면 돼요.” 두 사람은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2 오랜 시간 이혼법정 복도를 서성이던 한 중년여성이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 안 와. 당신이 언제 못온다고 했는데. 없는데? 여기가 장난하는 가게야? 하… 내가 그래서 당신이 질린다는 거야. 몇 번을 말했는데. 몰라. 오지 마.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전화를 끊은 여성은 앉아 있던 자리를 바꿔 기둥 뒤 좌석으로 몸을 숨겼다. 법정에는 여성만 들어갔다.

종영한 KBS2TV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1>의 한 장면. 경향DB


파탄 책임자는 이혼소송 청구 못해

가정법원에는 이혼 또는 상속, 재산분할 등의 재판을 받기 위해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방문한다. 법정 밖 분위기는 조용하다. 대부분 사생활과 관련된 것들이라 변호사와 나누는 대화도 조심스럽다. 법정도 당사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된다. 다만 법정 밖 복도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보면 ‘저 사람이 어떤 일로 왔구나’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협의이혼, 조정이혼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아 소송까지 가는 것이니 각자가 가진 분노의 감정은 감추기 어려워 보였다.

불행한 결혼생활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다. 식을 치를 때야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연애시절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다양한 장애물이 다가온다. 장애물을 잘 극복하면 좋지만 모든 부부가 행복한 삶을 그리며 살아갈 수는 없다. 판사 시절 가정법원을 거쳤던 중견 변호사는 “양말 돌돌 말아놓은 것만 봐도 살의가 느껴진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인 게 이혼위기 부부의 감정이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싶다고 곧바로 이혼을 할 수도 없다. 상대방이 이혼할 의사가 없거나, 오기로라도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결국 소송으로 가야 한다. 여기에도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쪽에 결혼생활 파탄의 결정적 책임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놓고 우리 법은 ‘유책주의’라고 부른다. 대법원이 1965년 “혼인관계 파탄에 책임이 있는 유책 배우자는 이혼청구를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이후 50년 이상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결혼생활을 파탄낸 것도 모자라 이혼까지 청구하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유책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파탄주의’다. 이미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가정이 파탄난 상태라면 부부 일방이 혼인생활 파탄에 큰 원인을 제공했더라도 이혼을 허용해줘야 한다는 원칙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법 감정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축출(逐出)이혼’이 가능하다는 점도 우리 법이 파탄주의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축출이혼이란 한마디로 바람난 남편 또는 아내가 법률상 배우자 자리에 내연관계인을 들어앉히려고 하는 이혼을 말한다. 결혼생활을 파탄낸 것도 모자라 유책배우자에게 이혼청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을 납득할 사람은 유책배우자밖에 없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법이 파탄주의를 전면으로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협의이혼’은 조금 넓게 보자면 소송 외적으로 ‘파탄주의’를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부부 중 한쪽이 외도를 했거나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등 결혼생활을 파탄낼 만큼의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부부 간에 합의로 이혼을 결정한다면 법원이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이혼 10건 중 8건은 협의이혼

통계청이 지난 3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협의이혼한 건수는 전체 이혼(10만8700건)의 78.8%인 8만5600건으로 나타났다. 재판이혼은 21.2%인 2만3000건이었다. 이 같은 비율은 약간의 증감차만 있을 뿐 매년 거의 비슷하다. 2008년 협의이혼 비율은 77.9%, 재판이혼 비율은 22.1%였다. 10년 새 협의이혼이 1%포인트 가량 늘었을 뿐이다. 결국 10쌍 중 8쌍은 협의이혼으로, 2쌍은 판결을 받아 이혼한다는 얘기다.

다만 애매한 ‘유책배우자’는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별거기간 중 ‘다른 사람’이 생긴 경우다. 이미 성격차이 등으로 떨어져 살면서 법적 혼인관계만 유지하고 있는 와중에 나에게 배우자 외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다. 이때 (편의상) 나는 배우자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까. 소송을 내는 것은 자유지만 법원의 판단은 기각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배우자가 “비록 떨어져 살고 있지만 나는 남편(또는 아내)을 여전히 사랑하고, 언제든 관계를 회복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점을 강조할 경우 법원이 이혼을 강제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부부가 협의이혼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고, 숙려기간 중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경우에는 어떨까. 들키지 않고 1~3개월(자녀가 있을 경우)의 숙려기간을 넘겨 이혼신청을 하면 다행이지만 배우자에게 다른 사람의 존재를 들켰다면 이 경우 들킨 사람은 유책배우자가 된다. 협의이혼 숙려기간은 이혼을 할지 여부를 고민하는 기간이지, 이혼이 확정된 후 절차를 밟기 위해 마련된 기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배우자가 “이혼 못하겠다”며 협의이혼을 철회할 경우 소송으로 가야 하지만 이때도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혼전문 변호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배우자가 실제로는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 ‘내가 너희들 잘살게 놔두나 봐라’는 식으로 오기를 부리거나 보복하기 위해 겉으로만 이혼을 거부한다면 이혼이 받아들여질 수는 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버티면 이혼할 수도 있다.” 서초동의 한 이혼전문 변호사는 유책배우자가 이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버티기’를 꼽았다.

실제 이미 10년 넘게 별거하며 각자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만 가끔 아이를 만나온 ㄱ씨는 직장에서 호감 가는 사람을 만났다. ㄱ씨는 아내에게 이혼해줄 것을 요구했고, 협의이혼을 하기로 했다. 아내가 원하는 위자료와 양육비를 모두 지급하기로 합의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재산의 절반을 현금으로 지급했다. 그러나 숙려기간 도중 아내가 ㄱ씨의 여자친구를 상대로 ‘상간자 소송(내연관계인을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소송)’을 벌여 승소하고, 협의이혼도 취소했다. ㄱ씨는 이혼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ㄱ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법적으로 유책배우자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판사는 “지금은 기각하지만 계속 그 상태로 각자 살면 언젠가는 이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라”고 했다. 아내는 결국 ㄱ씨의 나머지 재산을 전부 받고, 양육비도 받는 것을 조건으로 협의이혼을 했다.

이 부분이 이혼에서 가장 애매한 부분에 해당한다는 게 변호사들의 말이다. 설령 둘 중 한 명이 결정적 유책배우자라 하더라도 혼인 파탄의 기간이 길어 유책의 정도와 파탄의 기간이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갔다면 이때는 이혼을 허가하는 게 법원의 추세라는 것이다.

다른 여성과 25년간 사실혼 관계 경우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015년 9월 15일 유책주의를 재확인한 판결을 내놓았지만 그해 11월 서울가정법원 가사1부(재판장 민유숙 수석부장판사)는 여기에 예외를 둔 판결을 내렸던 것이 그 계기다. 가정법원은 법적 배우자 외의 다른 여성과 25년간 사실혼 상태로 살아온 남성이 낸 이혼청구소송에서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며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뒤집고 두 사람의 이혼을 허용했다. 재판부는 “혼인제도가 추구하는 이상과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춰봐도 그 책임이 반드시 이혼청구를 배척해야 할 정도로 남아있지 않는 경우엔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가 허용될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비록 남편에게 파탄의 주된 책임이 있지만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헤어져 살아 유책성마저도 상당히 약화됐다면 이혼을 하는 게 맞다고 본 것이다.

최근 이혼소송 항소를 포기한 홍상수 감독 측은 “사회적 여건이 갖춰지면 다시 법원의 확인을 받으려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이혼소송 중인 최태원 SK 회장 역시 내연녀의 존재를 공개하면서 장기전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둘 사이에는 혼외자도 있다. 두 사람 모두 별거가 길어지면 언젠가는 이혼을 할 수 있다는 ‘파탄주의’에 기댄 버티기인 셈이다. 법의 추세에 따라 상황을 잘 만들어가면 언젠가는 정말 이혼판결을 받아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의 감정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신뢰를 저버린 자에 대해서까지 법이 보호를 할 필요가 있까. 법이 이혼을 허용하더라도 ‘유책배우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혼 전체 건수는 줄어도 ‘황혼이혼’은 는다

우리나라에 ‘황혼이혼’이라는 개념이 처음 소개된 것은 정확히 20년 전인 1999년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서다.

당시 70대 노인이었던 부인은 90세 남편을 상대로 “당장 내일 죽더라도 오늘 이혼하고 싶다”며 재산분할 및 이혼청구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황혼의 여생을 해로하시라”며 부인의 청구를 기각했다. 40년간 남편으로부터 욕설 및 폭력에 시달리고, 경제권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왔지만 ‘이미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니 여생도 함께하라’는 취지로 남편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남편은 부인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한 대학에 36억원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3년 뒤인 1999년 8월 25일 서울고법 특별8부는 원심을 깨고 “이혼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또 이혼과 함께 위자료 5000만원과 현금 3억원, 부동산 지분의 3분의 1을 재산분할로 받아냈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 판결을 계기로 ‘황혼이혼’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살던대로 살면 되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는데 남보다 못하게 살더라도 이혼은 하지 말자던 노인세대의 인식이 변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여전히 ‘이혼은 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혼을 인생의 선택지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실제 통계상으로도 전체 이혼에서 60세 이상의 ‘황혼이혼’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3월 발표한 혼인·이혼 통계 결과 분석자료에 따르면 1990년 만 60세 이상 이혼건수는 879건으로 전체 이혼의 1.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남성 기준). 그러나 28년 후인 2018년 만 60세 이상 이혼건수(남성 기준)는 1만6029건으로 전체 이혼(10만8684건)의 14.7%까지 높아졌다. 흥미로운 부분은 1990년 이후 점점 증가하던 전체 이혼건수는 2003년 16만6617건을 정점으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결혼인구가 줄어들면서 이혼 역시 자연스럽게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가운데 28년째 이혼건수가 늘어나는 연령대는 만 55~59세 및 만 60세 이상의 노령층이다. 나머지 연령대는 전체 이혼건수가 줄어드는 만큼 소폭 감소 추세다. 통계청 역시 “전체 이혼건수 상승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노령층 이혼 증가”라고 밝혔다. 노령 이혼자들은 자녀가 대부분 성인이라 양육부담도 사라졌고, 노년 시기부터라도 각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이혼이라는 선택에 부담이 덜하다는 분석이다.

결혼 41년 만에 이혼을 택한 정순분씨(67)는 “애들 다 시집 장가 보내고, 나도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며 여유롭게 살고 싶은데 집에 틀어박혀 있는 남편 삼시 세끼 차려주고, 청소하는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이혼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젊은 시절 남편이 바람 피고 다니고, 술 먹고 들어와 자는 애들까지 깨워가며 폭력을 행사해도 참아온 세월이 40년인데 나도 내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남편도 시골로 내려가서 자기 삶을 살고 있고, 나도 여기서 애들(손주)도 보고, 친구들과 계를 만들어 여행 다니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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