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이 다르니 ‘직장 내 성희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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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9.06. 오후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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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박점규의 갑돌이와 갑순이]대구 건설회사 사장 부자의 상시 ‘성희롱 발언’

항의 뒤 ‘정직→휴업→해고→고소’로 괴롭혀


2017년 12일 직장 내 여성혐오 철폐 촉구 기자회견에서 행위극을 하고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영어에 능통한 지수(가명)씨는 2017년 5월 대구에 있는 H사에 해외영업 담당으로 입사했다. H사는 신재생에너지사업과 건설 신소재 수입·판매업을 하는 회사였다. 그는 자연 채광 시스템의 주요 제품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업무를 했다. H사는 ㅎ건설과 같은 사무실을 썼다. 건물 2층 사무실에 16명 정도 근무했고 H사는 ㅎ건설의 신사업부라 했다. H사 대표이사는 ㅎ건설 사장의 아들이었고, ㅎ건설 부사장도 맡았다.

지수씨가 사무실로 출근하자 직속 상관은 ㅎ건설 사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사장은 그녀를 보더니 “퉁퉁하니 아들 하나 있으면 며느리 삼고 싶네” 했다. 기분이 상했지만 어렵게 입사한 회사의 사장에게 찍히고 싶지 않았고, 연세가 많은 분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 불편한 마음을 감췄다.

같은 사무실, 2개 회사



지수씨는 H사 대표이사와 본부장의 업무 지시를 받아 해외영업 업무를 했다. 그런데 같은 사무실로 날마다 출근하는 ㅎ건설 사장도 지수씨에게 업무 보고를 하라고 했다. 수시로 불러 해외영업에 대해 물었다. ㅎ건설 사장은 마주칠 때마다 한마디씩 했다. “니가 지나가니 건물이 다 흔들린다.” “뭘 또 그렇게 먹니, 그렇게 먹으니 살이 찌지.” 사무실 부서 책상을 옮긴 후 사장이 말했다. “의자를 앞으로 당겨봐라. 내가 지나갈 수 있나 보게.”

지난해 1월이었다. ㅎ건설 사장이 지수씨를 사장실로 불렀다. “니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시집도 안 간 아가씨가 이렇게 살이 찌면 안 된다.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나는 하루 종일 물을 많이 마시는데, 자기 전에도 물을 많이 마셔서 자는 중에도 두세 번은 일어나서 오줌을 눈다. 너도 물을 많이 마시면 살 빠질 거다.” 사장은 갑자기 손으로 지수씨의 배를 만지며 “이게 뭐냐?”라고 말했다. 지수씨는 너무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사장은 태연하게 나가보라고 했다. 지수씨가 사장의 성추행 사실을 상사에게 보고했지만, 본부장은 어떤 이의 제기도 하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는데 ㅎ건설 사장이 뒤에서 “너는 어떻게 배가 점점 더 나오냐?”고 말했다. 건설사 사장인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아들도 “우리 회사 여자들은 얼굴은 되는데 몸매가 영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지수씨는 ㅎ건설 사장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녀가 담당한 사업부문에 영업이익이 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직원들이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ㅎ건설 직원들이 있는 자리였다. ㅎ건설 사장은 지수씨에게 “너는 왜 나한테 인사 안 하냐?”고 물었다. 그녀가 인사했다고 대답하자, 사장은 “인사하기는 뭘 해, 이 새끼야! 내가 바보같이 보여도 니가 뭐하는지 다 알아, 이 새끼야. 이게 보자보자 하니깐 웃기는 인간이네”라고 소리쳤다. 지수씨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못한 채 사무실을 잠시 나오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성희롱·폭언 멈추라니까 “이제 끝이다”



지수씨가 ㅎ건설 사장에게 해외 거래처 방문 내용을 보고했다. 사장은 보고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또다시 고성으로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지수씨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으니 저에게 소리 지르지 마시고 욕설도 하지 마십시오. 성희롱, 성추행도 참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너는 이제 끝이다”라며 아들에게 해고를 지시했다.

아들인 H사 대표이사는 지수씨를 불러 “니는 사장님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것이 기분 나쁘냐?”고 말했다. 그녀는 황당했다. 켜켜이 쌓아둔 감정이 폭발했다. 그녀는 대표이사에게 “왜, 아버지 잘 만나서 뭐 사장, 부사장 소리 듣고, 랜드로버 끌고 다니고,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내가 ×같이 보이나? 어? 내가 뭐같이 보이는데?”라고 소리쳤다. 그녀의 말을 녹음한 아들은 무고, 협박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며 퇴사를 종용했다. 지수씨가 퇴사할 의사가 없다고 하자 회사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직장 상사에 대한 폭언, 규율 문란, 신뢰 훼손을 이유로 해고했다.

지수씨는 1년 넘게 근무한 회사에서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고, 대구지방고용노동청에 직장 내 성희롱으로 ㅎ건설 사장을 진정했다.

노동위원회가 “우발적으로 한 반말과 욕설이 포함된 언행 등은 정당한 해고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정하자, 회사는 ㅎ건설 고문변호사와 직원이 포함된 징계위원회를 열어 그녀에게 정직 3개월 처분을 결정했다. 정직 기간이 끝나자 그녀에게만 휴업을 내렸다. 휴업 기간이 끝나자 상시 근무자가 7명에서 4명으로 줄어 있었다. H사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5명 미만 사업장이 됐고, 회사는 그녀를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했다.

이들 부자는 지수씨를 무고죄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녀는 ㅎ건설 사장을 고소했고, 검찰은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돈이 많은 회사는 첫 공판이 열리기 직전 대구지법 부장판사 출신의 다섯 번째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을 연기했다. 회사가 선임한 노무사는 그녀에게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아느냐. 대구에서 다른 어떤 회사에 취직이 가능할 것 같냐?”고 협박하고, 6개월치 급여를 줄 테니 형사소송과 노동청 진정을 취하하라고 했다.

노동청은 지수씨가 낸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두 회사가 별도 법인이기 때문에 남녀고용평등법의 규율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직장이 아닌 어디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것이냐?”라고 물었지만 근로감독관은 “우리한테 따지지 말고 국회에 가서 따지라”고 했다.

“직장 아니면 어디서 성희롱 당한 거냐”



지수씨는 미투 운동이 터진 뒤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회사에 찍혀 잘리는 게 두려운 동료들은 그녀에게 화살을 돌렸다. 돈 많은 회사는 거액의 변호사와 노무사를 선임해 지수씨를 괴롭혔다. 근로기준법도, 남녀고용평등법도, 근로감독관도 그녀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으면 다른 피해자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을 것이 뻔했다. 지수씨는 힘이 들더라도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에게 당장 어떤 이득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정말 간절히 바라는 건 저와 같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는 없었으면 하고, 또한 근본적으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모든 사람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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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직장갑질119 운영위원

[알려드립니다] "법인이 다르니 ‘직장 내 성희롱’ 아니다?" 관련

본지는 지난 2019. 6. 20.자 “법인이 다르니 ‘직장 내 성희롱’ 아니다?”의 제목으로 H사의 성희롱 관련 보도를 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H사 측은 “노동청에서 성희롱과 관련해 H사 대표이사를 최종 무혐의 결정하였다. 또한 노동청으로부터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위반이 아니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J씨는 대표자에 대한 막말과 욕설 및 회사에서의 불성실한 태도 등을 이유로 징계처분을 받은 것이지, 성희롱에 항의하였다는 이유로 징계를 당한 것이 아니다. 또한 해당 노무사와 노동청 공무원으로부터 해당 노무사와 노동청 공무원은 J씨에게 기사 본문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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