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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조선의 발달
is**** 조회수 3,962 작성일2009.03.13

고조선의 발달좀 가르처주세요 제가시간이없어요

 

 

 

 

고조선의 발달하고 중국과의 충돌,중국과 충도 이후의 일어난나라

 

 

 

부탁인데 빨리좀

 

 

 

선생님이내준 숙제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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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요령지방의 청동기를 통해서 합구 수원, 그리고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스키토 청동기문화 요소를 받아들여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는 청동기의 형태나 문양으로 볼 때 타가르·오르도스 청동기문화와 연결되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청동기문화에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언제부터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외래의 청동기가 수입되어 주민들에 널리 사용되는 때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잇으나 청동기를 주조한 시기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에는 채광유적, 거푸집, 주동유적의 발견과 함께 청동기의 성분분석을을 통해서 외국 제품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에 영향을 준 타가르나 오르도스 청동기문화의 연대가 기원전 7백년경이고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1천년이상 올라가고 있어 우리 민족인 예맥족의 거주지가 요령지방인 점을 고려하여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개시연대를 대체로 기원전 1천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지역에서의 고고학적인 뒷받침은 없으나 요령지방에서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이 남한지역에서는 경북 상주 충남 부여 송국리 석관묘, 전남 승주 우산리, 보성 덕치리, 고흥 운대리, 여천시 봉계동 적량동, 경남 의창 진동리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북한지역에서는 함북 금양읍, 평남 개천 용흥리, 함북 신평 선암리, 황남 연안 금곡동, 배천 대아리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 출토의 비파형 동검은 요령성 산근유적과 비교하여 볼 때 중국 춘추 초기인 기원전 8∼9세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 같은 민족인 예맥족의 제작품인 점에서 우리나라는 비파형동검의 출현과 함께 청동기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진다. 청동기 후기는 청동기와 함께 칠제품도 나타나고 있어 초기 철기시대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에는 청동제의 무기, 이기, 생활용구 등은 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할 수 없고 신분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소수의 지배계급만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주민들은 토기, 석기, 목기 등을 실생활 용구로 계속 사용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보편적으로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를 사용한 시기로 보고 이에 청동기, 석검 따위의 석기 등의 유물과 지석묘, 석관묘 등의 묘제를 관련시켜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청동도끼, 청동촉, 청동손칼, 청동끌, 청동단추, 거친무늬거울등의 청동기가 사용되었으며 민무늬토기, 가지문토기, 붉은 간토기등 토기와 돌검, 돌화살촉, 턱자귀, 홈자귀, 돌칼 등의 석기류와 함께 목걸이나 귀걸이 장식인 굽은옥, 대롱옥도 사용되었던 시기이다. 무덤은 지석묘, 석관묘, 소형 옹관묘가 쓰여졌다. 후기에는 한국식동검, 청동꺼창, 청동창, 잔무늬 거울, 손에 쥐고 흔드는 청동방울, 말방울, 동물형 허리띠 장식등의 청동기가 사용되었으며 철제품으로는 창, 도끼, 촉 등의 무기 이외에 괭이, 낫. 반달칼 등의 농기구가 있으며, 토기는 아가리띠토기, 흑색간토기가 있다. 무덤으로는 석관묘, 나무곽무덤, 독무덤이 사용 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북한에서는 함북 회령 오동 나진 초도 평북 강계 공귀리 의주 미송리 평남 승호 금탄리 황해 봉산 지탑리, 남한에서는 경기 여주 흔암리 파주 옥석리 서울 가락동 충남 부여 송국리 강원 강릉포남동 광주 송암동·전남 영암 장천리·승주 대곡리의 주거지 유적이 있다. 청동기 후기에는 대동강유역·낙동강 중류지역·영산강유역 등지가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반지하의 네모모양의 움집을 나지막한 야산이나 강가 평지에 짓고 살았으나 충남이나 전남지방에서는 둥근모양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이 시대는 수수, 기장, 조 같은 곡식 뿐 아니라 변 농사도 지을 줄 알았으며 돼지, 소, 말, 개 등을 길렀다.
전남지방에서의 선사문화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인 문화형성 단계에 돌입하게 되고 어느 시기보다도 이 시대의 유적이 가장 많이 조사되고 연구된 시대이다. 이를 유적·유물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비파형 동검은 고흥 운대리, 승주 우산리, 보성 덕치리, 여천시 봉계동·적량동·평여동의 지석묘에서 15점이 발견되었다.
승주 우산리 동검은 지석묘에서 두 점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비파형 계통이다. 1점은 아랫부분을, 다른 1점은 윗부분을 재가공한 이차전용품이다. 8호에서는 곡옥 2점, 소옥 6점과 공반되어 출토되었다. 여천시 적량동 지석묘 조사에서 동검 7점과 동모 1점 등 8점의 청동유물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지석묘에서 반제품이 발견된 것과는 달리 7호 지석묘에서 완형의 비파형동검 1점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동검의 출토로 보아 지석묘와 비파형동검과의 관련성을 시사해 준 것이며, 이러한 동검의 출토로 보아 지석묘와 비파형동검과의 관련성을 시사해 준 것이며, 지역적으로도 보성강유역과 남해안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어 영산강 유역의 청동기문화와 다름을 보여 주었다. 동촉은 보성 덕치리 지석묘에서 석검 1점, 석촉 29점과 함께 나온예가 있으나 이 동촉은 비파형동검의 파손품을 재가공한 것으로 보인다. 비파형 동모는 여천 적량동 지석묘 발굴에서 비파형 동검, 관옥 5점과 공반되어 발견되었으나 봉부쪽이 결실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초기에 해당하는 청동기의 발견은 전남비장의 지석묘 문화가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와 연결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온 지석묘가 남방문화의 요소보다는 북방대륙 문화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또 초기 청동기가 한반도내에서는 전남의 남해안지역이 가장 밀집분포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연구에 귀중한 학술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많은 연구 과제를 남겨주었다.
세형동검을 비롯한 세문경, 동과, 동모, 영패류 등 청동기가 일괄로 출토된 유적은 화순 대곡리와 함평 초포리가 있고 이외에 영암 신연리 출토 동모·동제검파두새, 나주 청송리 출토 세형동검, 고흥 소록도 출토 조문경·석부·석족, 함평 월산리·장흥 학송리 출토 동과, 강진 치흥리 출토 동모, 전영암 출토 세문경·동모·세형동검등이 알려져 있다.
청동기를 직접 제작하였음을 보여 주는 용범이 영암 월출산 주변인 적천리 또는 동구임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이 용범은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목일조의 쌍합범으로 주물을 녹여 부어 청동기를 만드는 틀이다. 이는 청동기가 실제 제작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또 영암일대가 청동기시대 문화의 중심지임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이 용범은 골석제로서 세형동검용범 1쌍, 세형동검·동과용범 1쌍, 동부·동반용범, 선형동부용범, 동부용범, 동부·동착용범, 동검사용범, 동검, 동부용범등 모두 6쌍 12점과 한쪽만 남아 있는 1점, 그리고 한쪽만의 작은 파편 1점 등 14점이다. 이는 모두 15종의 청동기를 주조하였던 용범이며, 15종 외에도 9종의 청동기를 주조하기 위한 틀에 새기다가 만 흔적이 한쪽 면에만 남아 있다. 이러한 청동기 유물의 발견으로 영산강유역이 우리나라 청동기 밀집 출토지역의 하나임이 밝혀졌다. 또한 전남지방에서만 국한시켜 본다면 영산강유역은 세형동검 등 후기청동유물이, 보성강과 남해안지역은 비파형동검 등 초기청동유물이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확인되어 앞으로 두 문화간의 상호비교 연구에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 1 절 유 적
1. 생활유적
생활유적으로는 주거지를 비롯하여 농경, 수렵, 어로와 관련된 유적 등이 있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것으로는 주거지와 유물산포지밖에 없다. 이는 주거생활 유적이여서 식생활이나 의생활은 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다.
전남지방에서 조사 확인된 주거지는 광주 송암동, 영암 장천리, 승주 대곡리, 우산리, 화순 복교리가 있으며 아직 발굴이 안된 상태이나 주거지가 노출된 곳이 광주 운암동, 장흥 건산리 등이고 이외에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는 담양 제월리 등 수십곳에 이르고 있다.
광주 송암동에서는 원형 1기, 말각방형 1기등 2기가, 영암 장천리에서는 원형·타원형 11기와 고상유구 1기가, 승주 대곡리에서는 원형 15기, 장방형계 47기, 소형유구 60기가 발굴되었다. 특히 승주 대곡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의 주거지 발굴로서 주거지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전남지방의 청동기시대에 속한 주거지는 땅을 20∼40㎝정도 파고 들어간 움집이며, 그 형태는 직경이 대개 4∼6m의 원형이나 타원형의 주거지로 중앙에 기둥구멍 2개나 4개가 있는 원추형 모양의 움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주거지는 충남 서산군 해미, 부여 송국리, 경남 대야리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어, 충남·전남 등 서해안지역과 남해안에 집중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원형주거지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일반적인 움집과는 그 형태나 내부시설등에서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고, 전남을 비롯한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다른 지방과는 다른 하나의 문화적인 배경과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1) 광주 송암동 주거지
광주 서구 송암동과 광산구 원산동의 경계지역에 있는 표고 약 20∼30m의 나지막한 구릉인 규산에 위치한 이 유적은 1977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이 유적에서 지표채집된 약 80여점의 선사유물은 현재 광주 동신고등학교 민속관과 송암동 임정부락 전득김씨 집에 분산되어 소재하고 있는데, 출토유물로 본 유적의 성격은 대략 무문토기시대, 그것도 혈구가 있는 유경식 마제석촌의 예로 보아 초기철기시대의 상한인 서기전 4∼3새기 경의 유적으로 막연히 추측되어 왔다.
발굴 결과 원형수혈주거지, 장방형수혈거주지, 석곽묘의 세 유적이 밝혀졌으며, 유물은 송암도 1호 주거지에서 연석을 비롯해서 석기 200여점이 출토되었다.
광주 서구 송암동 1호 주거지는 가산의 거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도로 옆 좌측 숲에서 이전부터 무문토기편과 마제석기편 등이 자주 표면채집되어 지표를 깎고 조사해 본 결과 여기에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는 풍화된 화강암반을 약 20㎝ 가량 깎고 들어간 직경 약 4.3m의 거의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의 주거지로서 북벽 가까이에 감실이 있으며 가운데 중심이 되는 기둥구멍 두 개를 북쪽에 두 개, 남쪽에 두 개의 기둥구멍을 대칭되도록 파 놓았다.
그런데 이 수혈거주지의 깊이가 20㎝정도 밖에 안되는 것은 지표의 상당부가 이미 깎여져 나간 때문으로 짐작되며, 어깨턱 주위에서도 이와 같은 원형거주지에서 흔히 발견되는 보조기둥 구멍이 발견되지 않는 점 등은 지표면이 거의 유실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기둥구멍은 북쪽의 것이 직경 11㎝와 6㎝, 깊이 12㎝이며, 남쪽의 것은 직경 12㎝와 8㎝이고, 깊이는 역시 12㎝가량이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기둥구멍은 남북장축 1.0m, 폭 52㎝, 깊이 약 27㎝의 장타원형의 좌우 끝에 2단으로 파여진 기둥구멍이다. 상단에 해당하는 기둥구멍의 직경은 30㎝이고, 실제기둥이 꽂힌 부분의 직경은 18㎝이며, 깊이는 각각 38㎝, 42㎝이다.
그리고 이 함몰부 중앙에 반토막이 난 연석이 길이에 알맞게 놓여 있었다. 기둥을 보면 주거지 내의 기둥구멍은 모두 수직으로 되어 있어 수직으로 된 기둥의 밖에 있는 보조기둥이 안쪽으로 합쳐져 그 위에 천막과 비슷한 시설을 갖춘 원형의 움집으로 원추형 지붕으로 생각되어 진다. 그리고 바닥은 약 5∼10㎝정도의 진흙을 다져서 만들었는데, 대개 가운데 기둥구멍과 북쪽 벽 사이에 폭 19㎝, 길이 23㎝의 타원형으로 약간 움푹 패인 곳이 있다. 이 근처를 중심으로 무문토기편이 집중 분포되어 있어 타원형의 구덩이가 노지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탄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주거지의 폐기는 화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염병과 같은 것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유물은 바닥 전면에 분포되어 있으나 대개 가운데 기둥구멍을 중심으로 해서 연석, 그리고 석설편, 태석 같은 것이 북서쪽에 몰려 있어 대개 부엌이라고 생각되며, 동남쪽은 제석, 점판암제 석설편 석기를 만들던 제작도구들이 집중분포되고 있어 대략 석기를 제작하던 곳으로 보여진다. 이 주거지는 넓이가 약 14.86㎡로 이곳에 살던 인구수는 약 4인이 되며, 1인이 점유하는 면적을 5㎡로 하면 약 3명으로 5인으로 구성되는 핵가족도 안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출토된 무문토기는 굵은 모래가 섞인 전형적인 심발형 토기로 무문토기 중 연대가 비교적 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진 무문토기시대에 속하는 원형 주거지는 충남 서산군 해미라든가, 부여 초촌면 송국리에서 발굴된 바 있다.
현재 초촌면 송국리 주거지의 연대는 이웃 석관묘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이라든가 주거지는 충남 서산군 해미라든가, 부여 초촌면 송국리에서 발굴된 바 있다.
현재 초촌면 송국리 주거지의 연대는 이웃 석관묘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이라든가 주거지에서 출토된 무문토기편 등으로 미루어 서기전 6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곳의 주거지는 기원전 6세기보다 더 떨어지는 시기로 보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대개 이 주거지와 연대가 일치하는, 다시 말하여 이곳 주거지에 살던 사람들이 축조했으리라 믿어지는 분묘인 지석묘가 효덕동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어 이 주거지의 연대도 전남지방에서 이제까지 발굴된 지석묘의 연대인 서기전 3∼1세기 경으로 추청된다.
광주 광산구 원산동 1호 주거지는 말각방형의 수혈거주지로서 현재 남아있는 규모는 남북 1.9m, 동서 2.3m의 장방형인데, 동쪽 사면의 경사로 보아 후일 산사태로 인하여태반이 유실되었던 모양이다. 바닥은 풍화된 화강암면을 깎고 약간의 진흙을 깔아 형성했던 것 같으며, 현재 벽은 약 10㎝ 가량의 높이로 남아 있다.
원래 이 주거지의 동서장축의 길이는 알수 없으나, 남북 1.9m 남쪽 끝 기둥이 있는 곳까지 넣어 동서 2.6m로 환산하여 넓이를 내어보면 4.94㎡로 이 주거지의 인구수는 약 0.65명으로 기껏해야 1∼2명 정도가 살던 조그마한 움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주거지가 너무 작아 경사면 경계의 중앙에 있는 기둥구멍은 이 주거지의 남벽의 것이 아니라 중아에 있던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수혈거주지에 나타난 기둥구멍에 의해 복원해 보면 대체로 중심부에 동서방향으로 용마루가 있고 용마루에서 남북으로 경사져 지붕이 내리고, 다시 용마루 양단에서 동서에 각각 삼각형 지붕이 덮이는 우진각 지붕을 가진 것으로 보여지며, 바닥에서 용마루까지의 높이는 대개 기둥구멍의 각도에 의해 2.5m 정도로 추정된다. 만약 전기한 것과 같이 남벽의 기둥구멍이 중앙에 위치한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파주교하리나 옥석리 주거지의 축소판과 같은 형태가 되겠다.
광주 서구 송암동 원형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연석을 비롯하여 기타 석기편까지 합치면 모두 272점이나 된다. 유물이 출토될 때마다 그 위치를 도면에 표시해 본결과 출토 범위는 대개 네 지구로 구분될 수 있었다.
가운데 기둥구멍을 중심으로 하여 북서쪽에서 무문토기편, 노지, 태석 기타의 일상용구 등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고, 반대편 동남쪽에서는 석촉을 비롯한 점판암제의 석기류와 그 석기편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북서지구는 취사를 하던 곳이라 여겨지며 동남지구 석기를 자가제작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동남쪽 하단벽 가까이에서 무문토기편이 엎어진 채로 깨어져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경우는 무엇을 저장했던 저장용구이거나 주거지가 폐기될 때 지붕에서 떨어져 거꾸로 박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서남쪽 일대에서는 도로를 만들 때 깎여 나간 때문인지 출토유물이 거의 없었던 점이 특징이다.
이 주거지가 속하는 시기는 전형적인 심발형토기나 반월형석도편, 마제석촉, 유단석부, 전석, 기타 마제석기류 등 반출유물로보이는 무문토기사회로 청동기시대 후기나 초기철기시대에 해당된다. 시대는 서기전 6세기에서 1세기 경으로 넓게 잡아도 될 것 같으나 실연대로는 청동기시대 후기, 다시 말하여 서기전 3∼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좁혀 생각해도 무방할 듯 하다. 이곳 취락민들은 여타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된 유적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월형석도, 유단석부로 대표되는 농경, 마제석촉으로 이루어졌던 수렵, 또 간단한 보조식량의 획득을 위한 어로 등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간듯하며, 또 겨울이나 한가한 때에는 교역을 통해서 얻어진 원석을 숫돌에 가공하여 필요한 도구를 스스로 제작하는 자급자족의 생활상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묘제는 인근 효덕동 등지에서 발견되는 지석묘가 묘제로 채택되었던 것 같다.
2) 광주 운암동 주거지
공주 어린이대공원은 광주 북서부에 위치한 광주시 북구 운암동·매곡동·용봉동의 경계지역으로 북쪽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서쪽으로는 광주 진입로가 있으며, 남쪽과 동쪽은 야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이 일대는 영산강의 일지류인 극락강 주변에 전개된 저평한 구릉지대로서 노년기 지형에 속하며 동쪽과 북쪽에 표고 100m이상의 산으로 둘러싸여 일종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요인은 일찍부터 선사인들의 생활에 적합하여 극락강변의 평야와 구릉지대의 비옥한 농경지대을 중심으로 귿르의 생활무대가 이루어져 왔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유적은 광주 어린이대공원 남쪽에 있는 야산북동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즉 남쪽에 있는 야산이 다시 동에서 남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유적은 동서·남북방향의 야산이 만나는 지점으로 북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에 해당하는 산 경사면에 있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광주시 북구 운암동에 속한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연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문토기 뿐이다. 토기편은 저부편이 4점, 구연부편이 12점, 그 외 동부편이 다수이다. 토기의 태토는 굵은 석립이 섞인 사질토와 고운 태토로 만든 점토질로 대별된다. 또 기벽은 석립이 나타나는 거칠은 표면을 적갈색이나 황갈색 태토를 씌워서 고르게 한 것, 또 소성도의 차이인지 확실치 않으나 동일한 태토에 기벽부분이 흑색을 띠고 있는 것등 다양하다.
연석은 현 지표밑 85㎝에 출토되었는데 연석 주변에 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약간의 목탄편이 발견되었다. 현재 노출된 흑갈색층의 길이가 약 14m 내외이다. 또 연석이 지표밑 85㎝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아래에는 화강암이 부식되어 나나난 사질토를 생토로 생각한다면 야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밭으로 경작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60㎝ 이상을 파고 설치한 수혈주거지라고 추측된다.
출토유물은 연석 이외에 토기편들 뿐이고 석기류는 한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연석은 석영반암으로 그 형태는 상부 폭은 좁고 하부폭이 넓으며 중앙은 마연으로 인하여 요상을 보이고 있다. 사용면의 범위는 길이 30㎝, 폭 17㎝로 하부쪽으로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상부쪽에 석봉이 미치지 못한 곳에 약간 외상을 하고 있다. 이 연석은 인근 극락강변의 비옥한 농경지에서 수확한 곡식이나 야산에서 채집한 열매 등을 빻는데 사용한 일종의 생활용구로서 농경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유물이라 하겠다.
토기는 점토에 굵은 석립이 섞인 것이 대부분이고 고운 점토만 사용해서 만든 것도 보인다. 태토에 굵은 석립이 혼입된 것은 토기를 빚어서 말릴 때 쉽게 마르게 하고 균열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구연부를 보면 굵은 석립이 섞여 있는 것은 두께가 두껍고 직립이며 고운 점토와 세사립이 혼입된 것은 내벽이 밖으로 바라져 잘 다듬어져 있고 외벽에는 정면한 것이 많으며 약간 내경한 것과 정면한 것이 많으며 약간 내경한 것과 이중구연을 가진 것도 있다. 저부를 보면 동부에서 좁혀지면서 저부에서 일단 축약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또 굽이 달려있는 것도 출토되었다. 굽이 있는 것은 고운 입토만 사용해 만든 것으로 기벽도 앏다. 기형을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나 구연부나 저부로 대개 추정해 보면 양발형과 발형으로 생각된다.
여기 토기들도 다른 무문토기와 같이 권상법이나 윤적법을 사용해 성형한 흔적이 나타난다. 기벽의 단면은 동일한 색조로 된 것과 2개 이상의 색조를 띠는 것이 있다. 둘째 흑색이 황갈색이나 적갈색인 것 등이 보인다. 첫 번째 것은 흑도와 같이 표면이 잘 마연되어 있는 흑색토기 계통과 소성시 화도에 의해 나타난 것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 것은 내면은 얇게 외면은 좀 두껍게 입혀져 있는 흔적이 뚜렷이 구별되어 소성시에 나타난 것으로 보다는 토기성형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 것은 표면을 정면하기 위해 적갈색 고운 점토를 사용한 것이다.
이 유적은 무문토기 시대의 주거지로 생각되는데 이는 적어도 길이가 10m 이상이며 60㎝ 이상 파고 설치한 수혈주거지로 추정된다. 연석의 출토는 그 당시 식생활의 일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산강유역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한 토착농경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 유적의 상한 연대는 출토된 토기나 인근 유적과 비교해 볼 때 광산 신창리나 담양 제월리 보다는 연대가 앞서며 송암동과 거의 같은 시기이거나 조금 떨어지는 시기인 청동기후기 즉 실연대로 대개 서기전 2∼3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3) 광주 우치동 유물산포지
우치동 용강부락의 무문토기유적은 광주 북구 우치동 용강부락 뒷산 일대이다. 이 유적지의 주위는 영산강의 일지류인 극락강의 상류이나 충적평야가 강을 중심으로 널리 펼쳐져 있다.
또 여기 극락상류는 예부터 피리, 모래 무지, 장어가 잘 잡히고 있어 천렵꾼의 명소가 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출토된 풍부한 어망추를 보아도 여기 무문토기인들의 생활이 농경 이외에도 수렵이나 어로가 중요한 생업이 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무문토기의 저부편은 굵은 사립이 섞인 태토지르 손비짐의 성형, 저부에서 동부로 이어지는 일단 축악되는 형식 등으로 보아 전형적인 무문토기라 할 수 있다. 우각형파 수도 저부편과 같은 무문토기말기에 나타나 김해패총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경질의 우각형파수이다. 여기의 경우 김해시대로 이어지는, 다시 말하여 여기 유적지 연대의 하한을 나타내어 주는 좋은 자료라 하겠다.
토제 어망추는 횡구유공토제어망 2점, 횡구무공토제가 1점, 유공구형토추가 1점, 모두 4점이 채집되었는데 유공토구는 혹시 어망추가 아니라 방추자 계통의 것이 아닌가 생각될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전자 횡구유공어망추와 함께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혼암리 주거지 무문토기시대의 주거지에서 발굴된 바 있어 주목되며, 그곳에서는 분명히 방추차와 함께 실을 감는 가락이 발견되어, 여기 토구는 방추차가 아니라 어구에 관계된 것 같다.
마제석기류는 석착, 편평무경삼각형석촉, 역자식 석촉편편, 제석, 환색편, 기타 석제편들이 채집되었는데 우선 마제석착을 보면 사암제로 장방형이며 하부에 한면만 사면으로 갈아 예리한 편도를 달고 있으며 상부에는 타격으로 인한 약간의 타흔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착은 끌에 해당하는 목공구였을 것으로 믿어지는데 선사시대말기로 들어가면서 증가하는 목공구의 하나라 하겠다.
다음 편평무경삼각형석촉은 회흑색점판암제로 단면은 편육각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무경삼각형석촉은 대전시 괴정동에서 청동기 일관유물과 함께 반출한 석촉의 형식과 똑같아 청동기유적과 관계가 있는 석촉으로서 이 유적에서도 청동기 유물의 출토를 예시해 준다. 또 점판암제의 역자식석촉편과 석촉을 만들다 만 석재들이 자가제작 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지석은 2점으로, 하나는 장방형의 완전한 것으로 전면에 사용한 요흔이 나있다. 또 다른 하나는 파손된 것으로 현 형태는 부정형삼각형이다. 기타 여러 가지 점판암제의 미완성석재편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중에는 점판암제를 처음 모석에서 떼어 낼 때 생긴 인공와흔이 나 있는 석재편과 석촉의 미완성 촉신 등이 있다. 그중 재미있는 것은 석재편의 측면에 나타난 요형의 마찰흔적이다.
그러면 이상 소개한 몇가지 유물들로서 여기 용강부락 선사문화를 살펴보면 괴정동에서 청동기유물과 함께 반출된 편평무경삼각형석촉이라든가 우각형파수의 존재로 보아 이미 청동기문화의 유입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횡구유공토제어망촉는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청동기의 모작으로 보이는 혈구있는 마제석검이 있어. 더욱 용감부락 선사문화의 단계를 짐작케 하고 이 연대의 일단이 세형동검의 연대와 겹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토제어망추는 지금도 장어가 잘 잡히는 영산강 상류에서 수심이나 유속에 따라 어망추의 무게를 달리하는 일본구나 연승구를 사용하고 있어. 고대 어로 기술의 일단면을 보여주며, 농경을 기본으로 하던 토착농경사회에 있어 식량획득의 보조역할을 담당하는 도구이다.
4) 광주 구소동 유물산포지
구소동 유물출토지는 내촌마을과 도장마을 사이의 해발 30m 미만의 얕은 구릉지대로서 영산강 지류인 지석천변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은 모두 지표에서 수습되었거나 홍수로 인해 식토된 곳에서 채집된 것이다. 유물들이 출토된 지역은 직경 100여미터 내이며,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편 30여점, 어망추 2점, 돌끝 1점, 석봉 1점이다.
구소동 내촌부락 구릉지대 일대에서 수습된 무문토기는 조질무문토기편 10점, 회색무문토기편 6점, 우각형파수 6점인데 이 유물들은 마제합민석부 1점과 석착 1점, 석봉 1점, 어망추 2점과 한 지역에서 수습되었다. 기형별로는 동부 3점, 서부 3점, 구연부 2점인데 이 가운데 공열토기편 1점이 포함되어 있다.
태토는 고운 점토에 굵은 모래가 섞인 것과 가는 모래를 점토와 3:1로 혼합하여 성형한 것이 있다. 또한 기병내외부에 피막을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이 있다. 색조는 황갈색계통과 기벽내에 흑색을 중심으로 내외벽에 회갈색점토를 입힌 것, 황갈색에 약간 흑색이 섞인 것, 기벽 전체가 회갈색조의 태토 한가지로 이루어진 것 등이 있다.
우각형파수는 6점이 수습되었다. 우각형파수는 무문토기의 기본 태토와는 달리 고운 점토만 가지고 형성된 까닭에 석영이 섞이지 않았으며, 시루나 팽이형 토기 등에 별도로 제작하여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각형파수는 소성도가 비교적 높은 고온에서 구워졌고, 비교적 경질이며, 회갈색의 색조를 띠고 있다. 6점의 파수 가운데는 내부에 흑색의 심을 넣은 흔적이 있으며 손으로 잡기에 적합하도록 적절하게 구부러져 있다. 형태별로 보면 손잡이 끝이 뾰족한 것이 5점, 둥글게 된 것 1점이며,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는 것이 1점이다. 이와같은 우각형파수는 원래 초기철기시대에 속하는 유물로서 점토대토기와 함께 공반하여 출토된 예가 많다.
무문토기편 가운데 공열토기로 보이는 것이 1점인데 구멍이 완전히 관통되지 않은 우공열토기이다. 색조는 회갈색계통의 연질무문토기인데, 구연부 2㎜ 아래 부분에 외벽쪽에서 1개의 구멍을 뚫었던 것으로 보이나 파편에 불과하다.
구소동 내촌부락에서 무문토기와 함께 채집된 어망추는 2점이다. 형태는 원통형의 토제 어망추인데 태토는 무문토기보다는 고운 점토을 사용했으며, 약간 흑갈색과 회색을 띠고 있다.
마제합인석부는 1점이 구소부락의 유물 산포지에서 무문토기편, 우각형파수, 어망추등과 공반되어 수습되었다. 석부는 손으로 쥐기에 알맞게 정제되어 있는데, 인부는 양쪽을 날카롭게 마연하였으나 자주 사용한 관계로 인부 좌우측이 상당히 마모되었고 중앙은 약간 튀어나와 있다. 석부의 석질은 화강암제이며, 크기는 길이 11.5㎝, 직경 4.5㎝, 두께 2㎝이다. 인부에서 상단 8㎝ 부분에는 자루를 메어 사용한 흔적이 나 있다.
돌끝은 점판암제로서 구릉 경사면에서 수습되었다. 이 돌끌은 사면을 정교하게 절단하여 중앙을 약간 볼록한 형태로 마연하여 윗부분을 도구로 쳤을 때 부러지지 않도록 기하학적으로 제작하였다. 인부는 직경 0.7㎝, 크기로 예리한 날을 이루고 있으며, 사용목적은 특수목적에 사용된 실용수공구로 보인다. 크기는 길이 7센, 폭 0.7㎝∼1.5㎝이다.
석봉은 돌끌과 함께 구릉 경사면에서 수습되었다. 석봉의 용도는 당시 곡식의 낱알껍질을 벗기거나 빻는데 사용한 일종의 조리구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단면은 4면으로 구획되어 마름모꼴 형태이며, 석질은 규암제이다. 확독에 직접 닿는 봉끝 부분은 사용에 의해 달아져서 반들거리며, 봉두는 손으로 잡기에 알맞고, 봉두에서 6㎝ 아래 한면에는 손으로 자주 잡았던 까닭에 매끄럽게 마모되어 있다. 그밖에 석질표면에는 유기물질이 썩어 침식한 듯한 흑색의 색깔이 군데군데 보인다. 크기는 길이 20.5㎝, 두께 4㎝, 둘레 14.3㎝이다.
이 구소동 유물산포지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에 해당되는 토기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강변의 구릉지대에서 사람들이 계속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주거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어망추의 출토는 지석천에서의 고기잡이 생활을 하였음을 말해 준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열토기의 존재이다. 이 토기편은 영산강 유역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청동기시대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5) 담양 봉산면 제월리 유물산포지
담양 제월리 유적은 서봉마을 뒷산 표고 약 20m 남짓한 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 행정구역상 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2구에 속한다. 주위환경을 살펴보면, 제월리 앞 마을을 흘러 내리는 [오례천]은 장장 11.5㎞ 되는 영산강을 이루는 8개소의 발원지중 하나인 담양 무정면 동산리 쪽에서부터 출발하는 영산강의 상류이자 일지류이며, 이 천의 서남향 약 1.5㎞ 떨어져 있는 곳에 이르러 월산면 광암리에서 흘러 나오는 다른 지류와 합쳐 극락강을 이룬 후 비로소 영산강의 본류로 합치게 된다.
서봉마을 주변에는 노령산맥의 한 줄기인 표고 822m의 병풍산, 564m의 삼인산, 불대산이 서북향으로 2㎞ 내외의 지척간에 을립하여 있고, 뒤 동남향으로 영천산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 영산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보고인 풍요한 담양평야를 볼 때 여기 유적지 출토유물의 대소 각종의 석촉, 반월형석도 등의 존재와 결부되며 농경과 수렵을 위주로 한 생활을 영위해 나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유적지를보면 산사면을 이용해 만든 조그만 수혈거주지였던 것 같다. 이 유적은 광주와 인접되어 있고 또 영산강의 같은 지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광주시의 선사문화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로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출토유물은 석기류와 토기의 두가지가 내토되고 있는데, 석기류는 석부, 석착, 유구석부, 석검 등 모두 70여점이고, 토기는 완형 1개 밖에 출토되지 않았다. 그러나 석기류중 미완성인 석기원료가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어 자급자고하던 그 당시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보여 주고 있다.
석부는 2점은로 모두 규암제 마제 합인석부로 기신전면을 쪼아서 정형한 다음 정약간 외만하게 연마를 가해 합인를 만들었다. 단면은 타원형을 보이고 있지만, 하나는 잘 정형하여 자루에 부착하기 좋게 편평형을 보이고 있다.
편인석부는 규암제 마제 석기로서 모석에서부터 떼어낸 박편을 이용하여 일면은 자연 그대로 두고 다른 한면에 수정을 가해 단며을 거의 사각형의 형태로 만든후 인부에 마연을 하여 삼각형의 단인을 달고 있으며, 전면은 마연으로 인해 반들거리고 있다.
유구석부는 2점인데, 하나는 자연석의 일면을 그대로 이용하여 단면 제형으로 만들고 부신과 부두를 정교하게 마연하였다. 구부의 위치는 전장의 길이에서 G에 중심을 두고 있다. 또 다른 일례는 응회암으로 전자와 달리 표면에 마연을 가하기 전의 타흔이 보이며, 전자 횡구에서 부두에 약간 경사져 두폭이 좁아지는 반면 앞으로 돌출하는 면을 보여 착장할 때 더욱 견실한 감이 있다. 구부의 위치는 전자와 달리 1/5의 위치에 중심을 둔 것으로 구부의 위치가 부두 가까이에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제석검은 모두 5점인데, 하나는 봉부가 결실되어 없고 검신도 단절이 되어 있다. 그러나 검신의 단면을 보면 호가 뚜렷치 못하여 타원형이고 자세히 보년 양편에 희미하나마 혈구가 나 있고, 또 경부에는 자루에 착장하기 좋도록 홈이 파 있다. 다른 3개의 예는 모두 황회색의 점판암제로 검신부에서 떨어져 나온 일파편이며, 단면은 능형, 타원형이다.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장석입자가 전면을 덮고 있는 반암이며, 봉부가 결실되어 있다. 그런데 검신부가 경부 가까이에 오면서 외만해지며, 경부도 보통 석검예와 달리 작은 편이고 형태상 매우 특이하다. 또 신부는 호가 뚜렷치 못하고, 인부를 형성하고 있는 석질로 인해 인부 가까이에 돌려 있는 흑색반이 떨어져 나가면서 생긴 거치형을 보여 주고 있다.
석도류는 2점으로 하나는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으나 다른 하나는 인부만 남아 있다. 전자의 경우 청회색 점판암제로 상부와 하부에 마연을 가해 삼각형의 인을 달고 있으며, 상부 가까이에 공이 보이고 배면에는 공을 뚫다만 흔적이 보인다. 또 후자는 청회색 점판암제이고 인부만 알아볼 수 있는 소형석편으로 인부의 단면은 삼각형으로 예리하게 마연되어 있다.
고석은 화성암제로 장수원형의 형태이며 단면은 각이 무딘 제형이다. 전면은 불에 탄 흔적을 보이고 있어 출토당시 화재로 인하여 주거지가 폐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환석은 편암제로 정교하게 마연을 가해 배면은 편평하여 상부가 공에 이를수록 내경을 보이고 있으며, 외부에는 단면 고형으로 날이 갈리지 않고 있다.
지석은 모두 5점으로 그 중 본래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1점이고, 나머지는 모두 파손되었거나 일부만 알아볼 수 있다. 하나는 전체 형태는 장방향이고 단면은 제형으로 상부가 약간 파손되었다. 또 하나는 편암제로 상부와 하부가 심하게 파손되어져 있으나 전자와 같은 형태의 소형지석이며 단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표면의 마연으로 보아 장기간 사용되지 않은 것 같다. 석촉은 전체 39점으로 황회색· 흑회색의 색조만 다를지언정 석촉 특유의 재료인 점판암제로 만들어지고 있다. 석촉은 단면 편육각형의
무경석촉, 무경역극식석촉, 유경석촉으로 단면이 종형이며, 촉신이 긴 유엽형, 석촉, 경문토기와 공반하는 무경석촉, 무문토기와 결합하는 유경석촉, 촉신 단면이 종형 경부단면이 육각형을 보이고 있는 유경석촉의 존재 등 다종다양한 석촉이 출토되었다. 여기서 하나 재미있는 것은 촉신의 단면이 주로 경문토기와 함께 반출되는 고식인 단면 육각형형태를 보여주고, 거기에 역극식의 촉신이 또 경부가 이어지는 부분은 단면 육각형이며 그 밑에 병에 삽입되는 장방형의 꼬다리가 달린다. 그리고 경부 끝은 좌우로 조그만 돌기가 달려 있어 자루에 끼울 때 좀 더 튼튼하게 접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석촉은 발달양식상 이 이상 더 발전할 수 없이 이제까지 발견된 석촉양식의 장점만 종합하여 만들어져 있다.
석기원료는 모두 10점으로, 석질은 한점만 층리가 잘 발달된 Shale이며, 나머지는 모두 점판암이다. 이것들은 전부 석기를 만들기 이해 원석에서 떼어낸 일부 석편들을 마연하거나, 부분가공을 한 후 필요시나 한가한때 꺼내서 지석에다 갈아 필요한 석촉이나 마제석기를 만들어 쓴 저장용 석기원료로서 그 당시 자기제작의 과정을 보여주는 실예이다. 또 재미있는 것은 조그만 석편의 요의 홈이 길게 나 있는데 이것은 조그만 석재를 떼어내기 위하여 계속 마찰시켜 절단한 흔적이다.
토기는 완형 1점만 발견되었을 뿐 유적지 근처에서 무문토기 한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토기를 보면 구연부는 직립하고 저부는 평저로서 전체가 비교적 균형이 잘 잡힌 호이다. 색조는 황회색을 보이고 있으며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여 녹노를 이용해 만든 것 같다. 그런데 기표면에는 격자문의 무늬가 있는 타인구를 사용해 기표면 전체에 시문을 베풀고 있는데, 이것은 본래 타인구가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예처럼 문양이 주가 아니라 굽기전 기벽을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두들겨 생긴 부차적인 것이다.
이상에서 제월리 출토 마제석부, 편인석기, 유구석부, 석검, 석촉, 환석, 격자문조질토기 등의 유물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단편적으로 그 문화의 성격을 살펴 보았다. 이 유물들은 구릉의 사면을 이용하여 구축한 수혈주거지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출토된 일괄유물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조사에 따라 단위가 확실한 주거지군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여기 출토 마제석촉, 석도의 존재로 보아 당시 주위환경을 이용하여 수렵과 농경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갔으며, 미완성 석재로 보아 그들 주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자급자족 하였던 것 같다. 김해토기 시대의 전단계에 속하는 격자문조질토기, 석촉의 제형식, 환석의 존재가 청동기문화를 강력히 시사해 주면 이 문화가 속하는 연대는 석기시대 말기에서 김해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즉 실년대로 B.C. 1∼2세기 정도가 됨을 추측할 수 있겠다.
6) 영암 장천리 주거지
이 유적은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에 위치한 주거지로 1985년과 86년 2차에 걸쳐 발굴되었다. 확인된 주거지는 모두 12기이나 규모를 알 수 있는 것은 원형·타원형 주혈주거지 7기, 고상가옥 1기이다.
수혈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원형 내지 타원형으로 청동기시대의 일반형인 장방형 주거지는 하나도 없다. 수혈의 깊이는 15∼32㎝로 얕은 편이며, 주거지 내부 가운데에 길이 100∼140㎝, 폭 60∼90㎝, 깊이 24∼28㎝의 구덩이가 있고, 그 양단에 각기 기둥 구멍이 있다. 이 기둥구멍은 지붕의 천정부를 받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거지들에서는 출입시설이라던가 화덕자리와 같은 부대시설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 주거지의 직경은 430∼550㎝이며, 그 면적은 11.8∼20.3㎡이어서 이곳에서는 대부분 소가족 집단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토유물은 토기류와 석기류 뿐인데, 토기류는 복원이 된 송국리형 무문토기 호형이외에 소형장경호, 심발형 및 발형이 있다. 토제품으로는 어망추 1점과 토제관옥 1점이 있으며, 석기류는 연석, 석촉, 반월형석도, 삼각형석도, 방추차, 돌끌, 대패날, 유단석부, 숫돌 등 70여점인데 불탄 주거지인 2호와 7호에서 가장 많이 출토 되었다. 이러한 출토유물로 보면 해안변이면서도 농경과 관련된 유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농경에 기반을 두었던 주민이 살았던 주거지로 생각된다.
7) 승주 대곡리 주거지
승주군 송광면 대곡리 도롱마을 앞의 충적평지에 있는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에 걸친 대규모 집단취락지를 1986∼1989년에 걸쳐 주암댐수몰지역발굴 조사 일환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곳은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에 걸쳐 형성된 집단취락지로서 강변 충적평지의 주거지 이외에 석기제작소, 토기요지, 저장공 발견되어 전남지방 뿐 아니라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주거지 상호간의 기능분화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청동기시대에 속한 유구로는 수혈주거지 72기, 소형유구 50기, 석기제작소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원형이 23기, 방형계통이 47기, 기둥구멍만 있는 것이 2기이다. 원형주거지는 중아에 작업공으로 생각되는 구덩이와 양옆에 기둥이 각각 있는 형식으로 충남, 전남 등 주로 서남해안지역에서 보이는 것들과 같은 형태이다. 기둥구멍이 두 개만 있는 것과 이 기두구멍 주위에 2개 또는 4개가 대개 방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있다. 장방형주거지는 작업공이라든지 기둥구멍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소형유구는 저장공으로 생각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석기제작소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은 석기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는 석기제작과, 관련된, 다시 말해서 당시 촌락의 석기 공동창고로서의 기능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곳의 주거지들은 평면형태가 원형에서 장방형으로 변천되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무문토기 전기에서 말기까지 오랫동안 형성된 대단위 취락지이다.
이는 주거지 형태변화와 생활상의 발전 추이를 추론해 볼 수 있으며, 공동체적 유대속에서 형성된 일반 서민계층의 생활터전으로 생각된다. 그 시기는 대개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에 걸친 것으로 추정된다.
8) 장흥 건산리 유적
장흥군 장흥면 건산리 장흥중학교안에 있는 이 유적은 탐진강변에 형성된 저평한 구릉상에서 위치해 있다. 이 구릉의 곳곳에서 토기편들이 산재되어 있어 집단취락지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수습된 토기들은 호형, 우각형화수부본형, 탐보형, 본형, 두형, 흑색마연토기, 점토제토기 등으로 종류에 있어서는 매우 다양한 경질무문토기들 이어서 무문토기의 전통을 계속 이어 받으면서 김해식토기로 넘어가는 단계의 유적으로 생각된다.
2. 무덤 유적
청동기시대 무덤유적으로는 지석묘, 석간묘, 도광묘, 옹관묘등이 있으나 전남지방에서는 지석묘와 적석석관묘가 발견되고 있으며, 옹관묘는 철기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전남지방에서 가장 많이 쓰여지 무덤은 지석묘인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밀집되어 있고 수적으로도 월등히 많이 분포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의 전남지방은 지석묘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남지방 지석묘는 조사된 수나 발굴된 유물에서 여타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기에 이를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1) 지석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의 하나가 지석묘이다. 지석묘는 고인돌, 돌멘이라고도 부르며 선돌과 함께 큰돌문화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지석묘는 땅속이나 땅 위에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형식의 무덤이다.
이처럼 지석묘는 유럽, 북아메리카, 지중해연안, 아시아 등 거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나 각 지역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아시아지역에서는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집중적으로 밀집분포되어 있다. 전남지방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지석묘 수 만도 1만3천여기 이상이어서 세계적으로 가장 민집된 황해도가 1천2백여기이며, 전북지방 7개군에 1천4백여기가 집중되어 있어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남지방에서 발견된 선사유적 중 지석묘가 가장 많고 또 1970년대부터 시작된 국토종합개발사업으로 인하여 파괴돌 지석묘에 대한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져 지금까지 48개 지역에서 5백34기의 무덤방이 확인 조사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와 지석묘 연구에 있어 중요한 학술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으며 또한 지석묘의 중심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전남지방에서 발견된 지석묘의 분포와 그 구조적인 유형에 대해 살려봄으로써 전남지방 지석묘 특징들의 일부를 밝혀보고자 한다.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는 지형은 평지, 구릉, 산기슭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평지에 분포한 경우는 넓은 평야지대의 평지나 하천을 낀 산악지대의 협소한 평지에 분포되어 있다. 평지에 위치한 지석묘는 대부분 주변의 하천이나 강과 평행하게 열을 지어 배치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구릉상에 분포된 지석묘는 평야지대의 저평한 구릉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대부분 산에서 뻗어내린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군집배열은 구릉과 같은 방향인 것과 직각방향인 것으로 대별된다. 전자는 곡류된 강으로 뻗는 세장한 구릉상에 있는 것이 공통점이며, 후자는 산사면에 형서된 구릉으로 강과 평행하면서 수열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다.
산기슭에 위치한 지석묘는 평야지대나 산악지대의 산 말단부에 분포되어 있다. 지석묘군의 석실배치는 산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입지 이외에 지석묘가 산의 고갯마루에 있는 경우가 있는데 고개 양쪽 지역에는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또 다른 지석묘 위치는 골짜기 끝지역의 평지에 1기 또는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모두 고개 남쪽이고, 괴석형 남방식이 있는 것이 공통적이다. 이들 지역과 경게를 이룬 산의 북쪽에서는 지석묘가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고 또 발견되더라도 수 기에 불과하다.
지석묘가 축족된 것은 거의 대부분 덮개돌을 채석하기 쉬운 산과 인접한 평지, 구릉, 산기슭이어서 지석묘 축조에 따른 인력동원 등의 어려움을 덜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남지방 지석묘의 분포상은 지리적으로 소백·노령산맥이 동과 북으로 가로 막혀 있어 크게 영산강 유역, 보성강 유역, 서해안 지역, 남해안 지역 등 4개 지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따.
지금까지 조사된 지석묘의 분포 수는 남해안 지역이 가장 많고, 영산강, 보성강, 서해안 지역 순으로 많다. 군집별의 평균분포수도 남해안 지역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보성강, 서해안, 영산강 유역순이다.
이러한 지역별 분포에서도 일정한 지역에 지석묘가 밀집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그 지역에서 지석묘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축조되었은다는 것을 추정 할 수 있게 한다.
지석묘가 밀집분포된 것을 보면 내륙지방에서는 영산강 하류지역과 보성강 중·상류에서 집중분포를 이루고 있으면서, 남해안은 대개 만을 이루는 지역에 밀집분포되고 있는데 내륙지방보다는 뚜렷한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분포상황과 전남지방의 지석묘 밀집분포로 볼 때 지석묘가 바다나 강을 따라 전파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전남지방의 지석묘 전파과정을 추정해 보면 영산강과 해안지역은 해안을 따라서, 또한 만이나 강을 따라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고, 보성강 유역의 지서묘는 섬진강을 따라 전파되었다기 보다는 내륙지방이나 남해안에서 전파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전남지방 지석묘의 밀집분포지와 천관우씨가 비정한 마한 소국 13개 지역중 10개 지역이 일치하고 있는데 이는 마한 소국과 지석묘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지석묘 축조집단과 마한 소국들과 직접적인 관련여부는 여기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지역적인 면에서 일치하고 있어 지석묘 사회에서 계승 발전되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전남지방 지석묘의 특징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석묘들이 분포된 입지지역은 평지, 구릉, 산기슭 등이나 덮개돌을 떼어낼 수 있는 암벽 등이 있는 산 근처인 것이 공통적이다. 이는 덮개돌로 이용된 바위를 인근의 암벽에서 떼어 내거나 자연암석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 지석묘축조에 따른 인력동원이나 이동의 어려움을 덜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돌을 떼어내는 방법으로는 바위틈이나 인공적인 구멍에 나무쐐기를 박아서 물로, 불리어 떼어낸 것이 일반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이고 덮개돌의 운반은 지렛대, 통나무, 칡덩굴 같은 것으로 꼬아 만든 밧줄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업과정은 돌을 잘 다룰 수 있는 석공 등 전문인과 축조에 따른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 협동과 공동작업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고 이에 따른 경제적인 부의 축적과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지배자가 나타났을 것이다. 또한 지석묘가 위치한 곳이 평지나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농경생활을 영위한 공동체사회의 성격을 띤 사회였다고 하겠다.
지석묘들이 분포되어 있는 곳에는 적게는 1기도 있지만 10기에서 20기 정도가 대부분이며, 많게는 50기에서 1백 여기 정도가 한 곳이 밀집된 곳이 있다. 또한 지석묘들이 군집된 지역이 일정한 범위안에 큰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는데 적게는 2백여기에서 9백여기까진 있다.
이러한 면은 지석묘 축조집단들이 오랫동안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계속 그들의 무덤으로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지석묘가 밀집분포권을 이루고 있는 곳과 천관우씨가 비정한 마한 소국 13개 지역 중 10개 지역이 일치하고 있는 점에서 지석묘 축조집단과 마한 소국들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단정하기 어려우나 지역적인 면에서 일치하고 있어 적어도 지석묘 사회에서 계승 바전되어 마한 소국사회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석묘의 분포가 해안가 특히 만을 이루고 있는 곳에 집중되고 있으며 강을 따라 내륙의 곳곳에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어 지석묘의 전파가 바다와 강을 따라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지석묘의 기원을 시베리아 돌널무덤에서 발전하였다고 하는 북방설과 난생설화·세골장과 함께 동남아시아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는 남방설, 그리고 우리나라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고 하는 자생설 등이 있다.
지석묘의 외형적인 형식 중, 북방식 지석묘가 영산강 유역까지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형식은 한강이북지역에서 주류를 이루나 그 이남을 올수록 그 빈도 수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전라·경사도 지방에서는 거대한 덮개돌에 지석이 고인 남방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두 형식간의 지역적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면들은 하부구조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돌널형 무덤과 부장유물이 빈약한점에서 한강, 금강, 영산강 등 서해안지역 지석묘의 특징적인 면을 지니고 있고 돌덧널형 무덤과 부장유물이 비교적 풍부한 점에서 보성강을 비롯한 남해안 등 전남 동남부지역이 경남지방의 지석묘들과 상당히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지석묘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부분 부장하지 않거나 석검등을 1점씩만 넣어두는 경우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묘제가 전통성과 보수성을 강하게 띄고 있기 대문으로 보인다. 즉 껴묻거리가 빈약한 지석묘와 세형동검등이 풍부하게 부장된 석관묘는 출토유물의 종류나 수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기본적으로 지석묘는 석기문화로 석관묘는 청동기문화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극소수이긴 하지만 지석묘에서도 청동기가 나오고, 석관묘에서도 석기가 출토되는 점에서 문화나 시시적인 또는 출자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석묘의 출토유물을 통해서 피장자의 성별, 신분, 머리방향 또는 그 당시 매장풍습등을 밝혀낼 수 있으며 각 유물의 편년을 통한 연대규명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석묘 출토유물은 크게 석실내에 부장된 의레용유물과 석실주변에서 발견되는 실생활유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의례용유불은 석검, 석촉, 홍도, 채문토기, 청동기, 옥류등이 있으며 실생활유물로는 석촌, 석도, 유구석부, 석착, 지석, 연석, 방추차, 어마추 등 다양한 석기류와 토기파편들이 있다.
지석묘에서 출토되는 의례용유물들은 거의 대부분 석검 1점씩 부장시키고 있으나 석검 1검과 석촉 수점 또는 수십점씩이 한 석실안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지석묘에서 표식적인 유물은 석검과 석촉인데 석촉이 석검과 공반되는 경우는 세장형 석촉들 뿐이다. 석촉만 석실안에 부장된 경우는 없고 출토되더라도 석실벽에 꽂혀져 발견된다. 그리고 최근 전남 남해안 지역인 여천시 적량동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부장유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면들은 시기적인 차이도 있으나 집단이나 신분적인 면에서 각기 다른 유물이 출토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부장된 유무들이 놓인 위치는 거의 대부분 한쪽 단벽쪽에 치우쳐 있는데, 석검의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석검이 부장된 위치는 석실바닥에서도 발쪽이나 오른쪽 허리 부근이 많으나 석실 모서리에 꽂혀져 나온 예도 있다. 청동기는 대개 오른쪽이나 왼쪽발 부근에 놓여 있으며, 장신구인 옥류들은 얼굴 양쪽, 목, 가슴부근 등에서 발견되고 있어 귀거리나 목걸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이 부장된 석실들을 보면 전남지방에서는 모두 석곽형석실에서만 나오며 석곽형석실중에서도 신전장 할 수 있는 규모나 깊이가 깊은 것에서 거의 대부분 출토되고 있다.
부장유물의 위치는 석검·석촉은 오른쪽 허리부근 또는 발쪽에, 청동기는 발쪽에, 옥류는 머리부근에, 채문토기나 홍도는 머리위쪽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아 이를 통해 묻힌 사람의 머리방향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로 보면 석검이나 서곡등 무기류는 남자에, 토기나 옥들은 여자에 부장시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남지방 지석묘에서 출토된 유물상을 보면, 비옥한 평야지대인 영산강유역과 산악지대인 보성강·남해안지역으로 대별된다. 영산강유역에서는 유물이 출토된 경우가 매우 빈약한 반며에 보성강이나 남해안지역은 비교적 부장유물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지금까지 영산강유역에서는 석검이나 비파형동검, 옥류가 출토된 바 없으나 보성강·남해안지역에서는 출토된 유물들은 대체적으로 석실 주변등에서 실생활용품들이 출토된 반면에 보성강·남해안 지역에서는 석실내의 부장용과 석실주변의 실용품들이 출토되고 있어 양 지역간의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영산강유역에서는 화순 대곡리, 함평 초포리 석관묘에서 세형동검등 청동기가 일괄로 출토되고 또 장천리 지석묘에서 세형동검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셋형동검문화가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남해안이나 보성강 유역에서 확실한 세형동검문화와 관련된 유적이 발견된 방 없고 단지 지석묘에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문화가 유행하지 않았나 한다.
비파형동검은 1점씩 부장되어 있고 공반된 경우 곡옥이나 소옥, 관옥등 옥류뿐이며, 청동촉은 석촉, 석검과 공반되고 있다. 석검은 보통 1점씩 부장된 것이 보편적이나 보성 죽산리 하죽 12호에서는 유병식과 유경식이, 15호에서는 유경식 2점과 석촉 3점이 공반도니 예도 있다.
석검과 석촉이 공반된 예는 보성 척치리 15호에서 석검 1점, 석촉 29점, 청동촉 1점이, 여천시 주삼동 대곡 4호에서 석검 1점과 석촉 6점이, 보성 죽산리 하죽 15호세어 석검 2점, 서곡 3점이 각각 공반되어 출토되었다.
이와같은 유물의 부장풍습과 공반관계를 통해서 보성강유역과 남해안지역은 경나미방과 남해를 통해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영산강유역은 유물이 출토된 에가 극히 드문 전북 고창지방과 통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전남지방의 지석묘사회는 영산강유역과 보성강 유역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광주시에 분포된 지석묘는 48개 군집지역에서 356기가 확인되었다. 이 지석묘들은 뚜렷한 밀집 군집상태를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광산구 서창동·용두동 등 옛 서창면일대와 삼거동·대산동 등 엣 삼도면 일대에 비교적 밀집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석묘의 분포된 수도 10기 이상이 노대동 노대, 지평동 용강골, 삼거동 칠성, 동호동 본촌, 양산동 원동, 압촌동 압촌, 용두동 학동, 매월동 화산, 내산동 우치 등 10여 군데 밖에 안된다.
지석묘의 형식들은 괴석상의 상석하에 지석이 4개 고이고 있는 용두동 지석묘와 같은 전형적인 남방식도 있으며, 단면이 장타원형에 가까운 렌증형 상석하에 지석이 있는 형식, 거대한 상석하에 주형지석이 있는 형식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 2m 내외의 소형 상석들이 많고 지석이 없는 개석식 지석묘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광주시에 분포된 지석묘 중에서 북구 충효동 지석묘만이 발굴조사되었다. 이 지석묘는 하천방향으로 나란히 열을 지어 있는 7기중 6기에 대해 조사한 것인데, 지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1기는 4개의 지석과 그 사이에 냇돌로 메꾸어 놓은 소위 위석형 석실을 하고 있다.
광주시에 분포된 지석묘의 분포수와 특징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광주시에 분포된 지석묘 현황표




(1) 광주 북구 충효동 지석묘
충효동에서 지석묘가 분포한 곳은 광주와 담양군 남면과 경계를 이루는 창계천이 흐르는 곳으로서 현재 광주호 상류의 물이 잠기는 곳에 해당된다. 또한 지석묘가 위치한 곳의 북쪽에는 송강 정철의 식영정이 있고, 동북쪽에는 환벽당 북쪽으로는 무등산이 솟아 있으며 남면 지곡리에는 무진읍터를 비롯 충효마을은 주위가 토성으로 둘러 싸여 있다. 지석묘 7기 가운데 1호는 송강의 성산별곡에 언급되고 있는 부엉바위로서 이곳 지석묘를 지칭하고 있다. 나머지 6기는 1978년 4월 30일∼5월 9일까지 10일간에 걸쳐 전남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바 있다. 1호 지석묘는 식영정 앞에 동서2열로 배치된 지석묘 가운데 부엉바위라고 음각되어 있는 석비가 개석상부에 서 있는 것으로서 동서장축 방향을 취하고 있으며 하부에는 지석 2개가 받치고 있는데 지석은 길이 40㎝의 크기이며 당시 주민들의 반대로 발굴은 되지 않았다.
2호는 지석묘는 1호와 동서로 7m 떨어져 있으며 상부개석이 두쪽으로 파괴되어 있다. 동쪽 개선은 남북 2m, 동서 1.3m, 두께 0.8m 서쪽의 것은 남북장축 3m, 동서장축 1.8m, 두께 1m의 부정형으로 지석은 길이 50∼70㎝정도의 크기로 2개가 보인다. 개석은 화강암제의 석질로 평면상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발굴시 개석을 드러낸 결과 5개의 지석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지석 크기는 1.0×0.6×0.5m, 0.6×0.6×0.4m 정도의 천석들이며 지석과 지석사이가 다소 떨어진 곳에서는 지석보다 작은 천석이 마구리 돌로 둘러져 있었고 그 위에는 적석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석 바깥쪽도 0.3×0.3×0.1m 크기를 가진 천석이 폭 1m 정도로 지석을 둘러 싸면서 원형을 이루며 평탄하게 깔려져 있었고 적석부 30㎝ 깊이에서 무문토기편이 다수 발견되었다. 또한 지표를 파 들어가 0.5×0.5㎝ 크기 정방형 석실을 짜서 만들고 세골장을 한 후 목개를 다시 덮고 다시 그 위를 적석한 다음 다시 두께 15㎝ 정도의 두께로 갈색 사질토를 덮고 있었다. 그위에 또 다시 적석을 하고 적석부를 돌아 가면서 고임돌을 밑에 고이면서 지석을 놓고 또 지석과 지석 사이가 떨어진 곳은 마구리 돌로 막고 개석을 올렸는데 지석 바깥쪽은 돌아 가면서 원형으로 묘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포석을 1m 정도로 평평하게 깔아 놓았다.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편은 모두 사립이 흔입된 갈색무문토기 태토질로 형성된 것으로서 경도는 비교적 높으며 그중에는 마연한 토기편 2점이 있는데 역시 사랍 혼입의 태토질이나 표면에 붉게 산화철을 칠한 토기편이 포함되어 있다. 2호에서 출토된 토기편 가운데는 또 무문토기 저부편 1점, 동부편 6점, 홍도편은 사립이 비교적 적게 섞인 것으로서 황갈색의 색조를 띠고 있으며 경도가 강한 점으로 보아 무문토기중 후대에 속하느 ㄴ조질무문토기라 할 수 있다. 저부편은 바닥의 두께 1.5㎝, 복원직경 4.25㎝ 그의 동부편은 두께 0.6∼0.8㎝ 정도였으며 석실내에서 출토된 홍도편의 태토는 무문토기와 같으나 표면에 산화철을 입힌 후 붉은 색을 띤 것으로 두께는 0.7㎝ 정도이다.
3호 지석묘는 2호와는 동서로 40m 떨어져 있으며, 동서장축 3.10m, 남북 3.20m, 높이 1.6m이며 서쪽에 크기 5㎝ 정도 장타원형 지석묘 2개가 지표조사시 보였으나 발굴시는 3개였다.
그리고 개석위에 길이 10㎝, 폭 4㎝, 길이 5㎝ 정도의 장방형 수혈공이 남쪽에 일렬로 나 있었으나 후대에 인위적으로 파괴를 위한 흔적임이 드러났다. 3호 개석 무게의 추정중량은 1㎡를 2.7ton으로 환산하며 24.54ton이다.
3호 발굴을 통한 하부구조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개석하의 적석은 대체로 장변과 평행을 이루며 적석장은 서편으로 몰려 있었고, 동편의 지석은 유실되었다. 이곳 지석의 크기는 남쪽으로부터 0.55×0.3×0.3m, 0.55×0.2×0.25m, 0.8×0.45×0.35m이다. 한편 중아의 지석과 맞붙어 1개의 천석이 나타났는데 이는 적석보다도 보조지석으로 보이며 크기는 0.32×0.26×0.20m이다.
석실구조는 적석상의 중앙부분에서 남쪽으로 치우쳐 나타났는데 동서장축으로 장변 1.01m, 단변 0.56m이며, 현존하는 석실벽의 상단에서 바닥면 깊이까지는 동변이 0.2m, 서변이 0.17m이다. 또 바닥면의 윗부분에서는 소천석이 드물게 나타났으나 바닥면은 경질의 점토층으로 특별한 바닥면을 확인할 수 없었고, 장법자체도 세골장만이 가능한 구조이다.
출토된 토기편은 소형 무문토기 2점이 출토되었는데 그 태토질은 황갈색조질무문 토기들로 1점은 저부편과 같으나 바닥두께는 1.6㎝, 기벽두께는 0.8㎝이고 또 한점은 구연부편으로 4.5㎝, 두께 0.8㎝이다.
4호 지석묘는 3호와 동서로 10m 정도 떨어져 있고, 4호의 개석 동서장축의 전형적 남방식 지석묘이다. 개석을 흑운모화강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평민의 형태는 타원형이며, 장축은 2.80×2.10×0.7m이며, 11.11ton의 무게이다.
발굴시 개석을 드러낸 결과 부정형의 적석상이 나타나고 지석 역할을 하였던 천석 3개가 이 부정형 유구의 북측면에 치우쳐 나타났는데 그 크기는 북으로부터 0.85×0.45×0.35m, 0.5×0.25×0.20m, 0.54×0.30×0.34m이다.
이러한 지석은 대체로 3개의 지석이 이 유구의 북서변을 형성하고 있으며, 남동변에는 불규칙한 간격으로 3개의 할석이 놓여져 있었다.
석실은 유구의 남쪽 모서리 변에서 나타났으며, 능형에 가까운 부정형이었다. 규모는 1.00×0.22×1.1×0.80m로 굴장이 가능한 규모이며 석실방향은북향이었다. 석실규모로 보아 이곳의 석실은 굴장, 세골장, 신전장이 혼재하고 있었으며, 4호에서는 유물이 없었다.
5호 지석묘는 4호오 북서방향으로 10.2m가량 떨어져 있으며 개석의 석질은 안산암질이며, 평면은 방형이다. 장변이 3.30m, 폭 1.70m, 두께 0.9m 추정중량은 15.28ton이다. 개석을 드러낸 결과 장방형의 적석상이 나타나고 적석은 부정형 할석과 천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장변은 남북으로 일치한다. 하부지석은 총 6개로서 적석상의 3모서리에 1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장방형 유구의 중앙을 기준으로 볼 대 서북변에는 3개가 묻혀 있었고, 서남쪽에 있는 지석 크기는 0.55×0.55×0.6m이고, 서북부의 3개 지석 크기는 0.55×0.35×0.75m, 0.55×0.35×0.5m, 동북쪽의 지석은 0.55×0.45×0.5m, 동남부의 지석이 0.8×0.45×0.5m이다.
석실은 유구의 남단에 치우쳐 있었고, 이 유구의 중아부분과 북단에도 역시 석실의 벽석으로 보이는 석열이 확인되었고, 석실의 장축은 동서선을 취하고 신전장이 가능한 규모이다. 층위현상은 지표에서 30㎝ 정도 깊이에서 흑색부식사층이 끝나고 황색의 사질점토질이 연속되어 석실바닥은 황색점토의 20㎝ 아래에 형성되고 있었다. 유물은 석실내부에서 황갈색 무문토기의 저부편과 동부편 출토유물도 2호 출토 토기편과 유사한 것들이며, 마연한 것도 섞여 있었다. 저부편의 직경은 7㎝, 바닥두께는 1㎝정도이고, 나머지 동부편의 두께는 0.6∼1㎝정도이다.
6호 지석묘 위치는 4·5호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7호 다음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개석은 화강암제의 석질로서 구형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규모는 3.60×3.10×1.7m로 추정중량은 25.73ton이다.
지석은 4개가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에 적석들이 무질서하게 잘려 있고 동쪽으로 적석의 수가 줄어 들면서 Level이 낮아지고 있다. 적석은 천석과 부정형 할석들이며, 이 가운데는 두께가 아주 얇은 판석과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
석실은 동벽에 비교적 큰 천석 1개가 중간을 가로막고 있으며, 북벽은 몇 개의 천석으로 된 석실을 형성하고 있다. 석실은 정동에서 25°기울어진 각도의 장축을 취하고 있으며, 길이는 1.27×0.48m 측와반굴장이 가능하다. 석실바닥은 지석상단으로부터 0.8m의 깊이 벽은 천석 내지 할석을 2.3단 쌓아 올렸으나 불규칙하다.
출토유물은 석실 동벽 가까이서 사임제의 지석이 1점 출토되었고, 무문토기 소편이 3점이 있을 뿐 석실 안에는 유기물질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지석의 크기는 길이 9.2㎝, 폭 5.5㎝, 두께 2·2.7㎝정도의 것으로 전면에 같은 흔적이 엷게 나타나 있다. 무문토기편은 조질무문토기로 두께는 0.4㎝, 0.9㎝이다. 7호 지석묘는 개석은 화강암질로 평면은 타원형이고, 장축 4.10m, 폭 3.20m, 두께 1.20m, 추정중량은 22.67ton이다.
하부구조는 회색의 표토층을 깎아 내려가 적석상의 하부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표토층내의 적석은 대체로 3.50×3.0m의 장방형이었고, 장방형 적석상의 4모서리에는 지석으로 보이는 천석이 하부구조의 중심을 기준으로 할 때 북·남동 모서리에 한 개씩 서모서리에는 큰 할석이 한 개 배치되어 있었으며, 지석크기는 동단이 0.55×0.50×0.17m, 서단이 0.70×0.4×0.3m, 북단이 0.6×0.35×0.50m이다. 이 4개의 지석 가운데 적석상이 동북구의 양단에 놓인 두 지석사이에 2개가 큰 할석이 대체로 이 양단의 지석과 함께 유구의 장외변을 형성하고 있다.
석실바닥에는 동북모서리의 2개의 천석이 수평으로 깔리고 그 옆과 밑에서 깊이 3㎝의 약 12㎝×10㎝ 규모의 부식토가 나타났는데 당시의 목개가 내려 앉아 부식되었거나 안치된 유해가 썩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교란층에서 풍납리식 조질무문토기에 가까운 갈색토기편 1점, 지석 1점, 석촉편 1점, 기타 조선자기편이 출토되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이웃하는 석실이 발굴시 발견되어 석열을 노출시켜 본 결과 합장의 석실임을 알 수 있는데는 당시 매장풍습 혈연관계를 알려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출토유물은 A석실에서 점판암제 석촉편과 지석 1점, 무문토기편 7점이다. 석촉은 경부가 결실된 것으로서 현존 장 3.1cm, 두께 0.5cm 단면 능형이다. 지석은 사암제로 길이 7.5cm, 폭 2.8cm 단면은 삼각형 최대두께 0.9cm이다. 무문토기편 7점은 동부로 황갈색 태토의 조질무문토기이며, 두께는 0.6-1cm정도이나 이 가운데 전면에 빗살문과 같은 무늬가 시문된 것이 1점 있는데 이는 풍납리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두께 9cm 정도이다.
B석실에서 출토된 것은 점판암제 석편과 무문토기 저부편 1점, 동부편 3점이다. 점판암제 석편은 길이 7.1cm, 폭 7.5cm, 두께 0.8cm 정도의 크기인데 이것은 석기는 만들기 위한 원석으로 보이며 측면에 석편을 떼어낸 흔적이 있다. 무문토기 저부편은 복원직경 4.9cm, 두께 1.2cm이며, 그 하부에 손가락으로 누른 흔적이 나 있다. 동부편의 두께는 0.6-0.8cm이며 이것들 역시 조질무문토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2) 영암 장천리 청룡리 지석묘
영암군 서호면에 있는 청룡리와 장천리지석묘는 1984년 발굴조사되었다. 서호면일대에는 180여기의 지석묘가 20여군데에 무리지어 있으며, 주로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중 농지정리 작업으로 훼손될 청룡리에서 9기, 장천리에서 4기 등 모두 13기가 조사되었다. 이 13기의 지석묘 중 석실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것이 8기인데, 모두 얇은 판석으로 석실을 짜맞추고 있는 형식이여서 보성강유역의 지석묘 석실들이 자연석이나 할석으로 쌓은 것과는 다른 면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를 비롯하여 삼각형석도, 석촉, 유구석부, 석봉, 숫돌, +자형검파두식 등의 석기류와 세형동검편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은 소위 금강유역의 송국리형 토기 문화군에 속한 것들로 언형주거지와 함께 서남해안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장천리 1호에서 세형동검편과 +자형검파두식 숫돌이 일괄로 출토되었는데, 세형동검은 우리나라 지석묘에서 3번째로 출토된 예이나 출토상황이 가장 확실한 최초의 예로서 그 의의가 크다.
(3) 대초댐 수몰지역 지석묘
화순근 도암면과 나주군 다도면에 위치한 대초댐의 지석묘는 1975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발굴된 지석묘는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대초마을 3기, 조치마을 7기, 나주군 다도면 대초리 남대마을 11기·마산리 쟁기머리에서 3기·판촌리에서 9기 등 33기이다.
석실의 배치에서 마산리 쟁기머리는 1열이나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판촌리 6호와 11호는 적석 가장자리에 소형판석을 세워 장방형으로 구획한 것이 서로 잇대어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출토유무은 석촉 7점, 석제방추차, 지석, 무문토기편 약간 등으로 지석묘 수에 비해 유물이 매우 빈약하며 뚜렷한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초댐 수몰지구의 지석묘는 변형된 석관형석실과 조잡한 석곽형석실, 그리고 토광형이 공존되고 있으며, 부장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주변에서 약간의 석기류가 출토된 점은 보성강유역의 지석묘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4) 동복댐 수몰지역 지석묘
화순군 이서면에 소재하고 있는 동복댐 수몰지역 지석묘는 1981년 발굴조사 되었다. 수몰지역에는 지석묘 80여기가 분포되어 있으나 발굴이 용이한 월산리에서 2기, 장학리에서 3기, 창랑리에서 14기 등 19기의 지석묘를 발굴하였는데, 석실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9기, 새로이 조사된 석실이 13기 등으로 발굴에서 확인된 석실은 13기다.
월산리 지석묘는 천변평지에 2기가 발굴되었는데, 유무른 2호에서만 출토되었는데, 유물은 2호에서만 출토되었다. 석도편, 석부편, 개배 1점이 주변에서, 석착이 파괴된 남쪽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장학리 지석묘는 천변 퇴적평지에 있는 3ㄱ4ㅣ만 발굴하였다. 석실은 할석이나 자연석으로 쌓은 석곽형이며, 바닥은 편평석이나 판석을 깔았다. 크기는 170㎝ 이상으로 크며, 특히 1호와 2호가 평행한 석실로 두 석실내에서 채문토기가 각각 다른 방향에 놓여 있었는데 2호의 채문토기안에서 토제 어망추 1개와 뚜껑돌이 발견되었다.
창랑리 지석묘는 곡류된 동복천으로 뻗은 구릉상에 14기가 있으나 모두 8기의 석실을 확인하였다. 6호와 7호는 군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상석도 크며, 두 석실내에서 유경유구식 석검이 각각 벽석에 꽃혀진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3호에서는 상석하에서 유병식 석검 1점과 석촉 2점이 출토되었다.
동복댐 수몰지역의 지석묘들은 각각 군들마다 출토된 유물이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월산리는 실생활에 쓰이던 식기류와 토기편들이, 장학리에서는 채문토기와 다량의 토기편들이, 창랑리에서는 석검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같은 지역내에서의 지석묘군들을 비교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라 하겠다.
(5) 보성 죽산리 하죽 지석묘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하죽마을에 있는 이 지석묘는 동복천을 따라 4개의 군집지역을 이루고 있으며, 이 중 3개 지역에서 1987년 발굴조사하였다.
동복천변에 형성된 충적평지에 있는 '다'군 지석묘는 원래 23기의 상석들이 논에 묻혀 윗부분만 노출된 상태로 남북 3열을 이루고 있었는데, 발굴과정에서 소형 상식 17기가 더 확인되어 모두 40여기가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으나 조사된 수는 31기였다.
석실배치는 강물 흐름과 같은 남북방향으로 3열을 이루고 있다. 석곽형과 위석형이 쌍을 이루고 있는 경우는 두 형식간의 연대나 피장자문제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유물은 1호 출토 연석 1점을 제외하고 모두 석곽형석실에서 석검 10점, 석촉 3점이 부장유물로 발견되었으며, 석실 상면이나 주변에서는 석촉 2점, 석도 5점, 석부 3점, 석착 3점, 지석 2점, 어망추 7점, 방추차 1점, 연석 3점 등이 있고, 이와에 무문토기편, 홍도편, 우각형파수편, 김해식토기편 등이 있다. 출토유물중 12호에서는 유병식과 유경식석검이 각 1점씩, 15호에서는 유경식 석검 2점과 세장형석촉 3점이 공반되어 출토되었다. 죽산리 지석묘는 구조면에서 여타 지석묘보다는 대형이고, 완전한 형태를 구비하고 있으며, 또 위석형석실의 존재가 뚜렷히 밝혀져 지석묘형식이나 그 성격을 밝혀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하겠다.
(6) 보성 덕치리 지석묘
보성군 문덕면에 위치한 덕치리 신기 지석묘는 보성강변에 형성된 구릉상에 모두 26기가 군집되어 있었다. 현재는 주암댐으로 인하여 수몰된 지역이다. 이곳의 지석묘 26기 중 10기 발굴에서 15기의 하부구조가 조사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석검 7점, 석촉 3점, 유구석부 1점, 석착 1점, 비파형동검 1점, 청동촉 1점 그리고 무문토기와 홍도편이 있는데, 이중 1호에서 비파형 동검과 홍도가 공반되었고, 15호에서는 유병식석검 1점, 석촉 29점, 청동촉 1점이 한 석실안에서 부장품으로 발견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유물의 출토는 타지석묘와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15호처럼 풍부한 유물이 부장된 것은 전남지방 지석묘의 유일한 예이다. 이러한 부장풍습은 경남 거창 대야리나 김해 무계리와 유사점이 많아 남해안을 통한 지석묘문화권이 형성되었음을 시사해 준 것이라 하겠다.
(7) 승주 우산리 지석묘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 내우말을에 있는 이 지석묘는 주암댐 수몰지역 문화유적 발굴조사 일환으로 1986년 발굴조사하였다.
내우 지석묘군은 50여기의 상석들이 산기슭에 형성된 평탄한 대지성 구릉에 남북으로 수열을 이루고 있으며, 상석 일부는 반파된 상태였으나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석실은 석곽형이 39기, 토광형이 2기, 위석형이 5기, 상석하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이 6기, 그리고 상석이 없는 석곽형 6기등 58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모두 석곽형석실에서만 출토되고 있으며, 부장유물은 21기의 석실에서 발견되어 여타 지석묘와는 달리 부장풍습이 상당히 유행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은 석검 17점, 석촉 24점, 삼각형석도 1점, 석착 1점, 유구석부 1점, 환상석부편 1점, 비파형동검 2점, 곡옥 3점, 관옥 1점, 소옥 6점, 토제 구슬 1점 등 57점 이외에 무문토기편, 홍도편, 채문토기편 등이 있다.
이곳에서의 부장유물은 한 석실에 1점씩만 출토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8호에서는 비파형동검 1점, 곡옥 2점, 소옥 6점이, 53호에서는 관옥과 유경유공식석검이 각각 공반된 예도 있다. 이는 비파형동검과 옥이 지석묘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내우 지석묘는 석실 수나 부장유물로 보아 청동기 전기말에서 후기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축초되었다고 생각되며, 이 묘역의 피장자들은 석실구조나 방향에서 2∼3기씩 쌍을 이룬 경우로 보아 혈연적으로 가까운 친족집단의 공동묘역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8) 여천시 평여동 산본 지석묘
여천시 평여동에 있는 산본 지석묘는 1989년 발굴 조사되었다. 이 지석묘는 3개 지역에 군집되어
있다

200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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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하였으나 후에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나서 더욱 강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고조선은 초기 : 서쪽의 요령지방으로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까지 세력을 뻗칩니다.

후기에는 중국과 충돌이 있은 뒤에 중심지가 한반도 북서쪽으로 옮겨졌습니다.

고조선사람들은 기원전10세기경부터 벼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벼농사 외에도 콩, 조, 기장, 수수 등을 심었습니다.

목축도 발달하여 개, 돼지, 소, 말등을 길렀다고 합니다.

음식은 곡식으로 만든 주식에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더덕 같은 산나물과 송어, 연어, 고등어, 명태, 임연수어 같은 물고기와 소라, 굴, 우렁이 전복, 홍합 등을 반찬으로 먹었습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나서는 한반도 북부쪽으로는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등이고

한반도 남쪽으로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고조선이전에는 빗살무늬토기였으나 고조선이 생긴후에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를 만듭니다.

이 이유는 빗살무늬는 토기가 갈라지지 않기위해서 무늬가 있지만 민무늬토기는 가마에서 굽기 때문에 빗살무늬가 없어도 되는 것이죠.

 

많은 도움 되셨으면....

200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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