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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바르톨레메오 대학살
davi**** 조회수 2,017 작성일2006.11.24

새뮤얼 스마일즈의 자조론을 읽다가 '바르톨레메오 대학살' 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 같은데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라 인터넷을 찾아보았는데도 거의 아무런 자료가 없더군요.

 

이것에 대해서 자세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대적인 설명과 주요인물, 사건이 일어난 계기등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 분 진정한 역사고수로 임명해드립니다 ^^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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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른곳에 올린 질문을 보충해서 답을 해보겠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은 당시 프랑스 태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가

구,신교가 화합되는 결혼식을 축복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든 프랑스 위그노들을

절멸시킬 것을 명함으로써 벌어진 참극입니다.

 

이 당시 기독교의 분리로 프랑스는 분리될 위험에 처했답니다.

그래서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카트린 드 메디치 태후는

프랑스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딸을 신교도측 나바라 왕과 결혼시킵니다.

(나바라는 현재 스페인에 속해 있는 지역입니다.)

 

이 결혼식의 신랑이 후의 앙리4세인데요, 이사람은 자기 상황에따라 구교와 신교사이를

몇번이나 왔다갔다 한 사람입니다만 이걸 가지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죠.

(종교를 떠나서 앙리 4세의 업적은 위대합니다.)

 

근데 이 결혼식 전날 신,구교도 간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이것이 순식간에 진정 될 수 없을 정도로 번졌기 때문에

태후는 어쩔 수 없이 최종적 해결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외에 궁정내 매파들의 영향도 있습니다.)

그 결과가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이죠. 

 

그리고요.

윗분은 카트린 드 메디치를 무슨 흡혈귀처럼 묘사하셨는데요.

그 견해는 의식적으로 메디치를 폄하해온 프랑스 정통주의자들과

(그녀의 가문인 메디치가는 비록 통치자의 가문이라고는 하나

근본적으로 평민 가문입니다. 거기다가 메디치가와의 결합으로 얻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프랑스의 영토적 이익도 결국 생기지 않았죠.)

피해자인 개신교도의 입장만을 대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 시각의  책들을 읽어보시면 그녀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콜리니와 관련된 얘기도...프랑스인과는 비교도 안될 현실주의자의

나라가 이탈리아고 거기서도 가장 현실적인 가문인 메디치가문의 여자가 카트린입니다.

그녀가 정치와 종교를 혼동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스페인과의 전쟁에 반대한 것은 당시 유럽 최강대국인 스페인과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언제나 잠재적인 내전 상황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강력한 지방 대영주와 막 태동하려는 절대군주주의간의 갈등.

거기에 기름을 부은것이 신구교도간의 갈등이었죠.

 

또 원래 프랑스 특히 나바라를 포함한 남부 프랑스지방은 종교전쟁의

온상이었습니다.

맛살리아파나 알비파... 특히 알비파에 대한 전쟁은 아직 종교개혁 전이었건만

지방간 서로 뿌리깊은 원한관계를 낳았죠.(알비주아 십자군으로 검색해보세요) 

또 신기하게도 프랑스의 이름난 기사들은 남부 특히 프로방스 지역에서 많이 배출되

었답니다. 바로 이들 "이단" 세력의 본거지죠.

 

이러한 분위기에서 당시 프랑스 궁정은 옛 비잔티움궁정 뺨칠 정도로

음모가 난무했습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프랑스가 분열되지 않도록 카트린은 온 힘을 쏟았죠.

또 그녀는 당시 신, 구교도 모두에게 존경받는 유일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물론 바르톨로뮤의 밤 이후에는 존경받을 개신교도들도 사라졌지만)

파리에서 폭동이 벌어졌을때 그녀는 직접 신구교도간의 바리게이드를 뚫고

양 지도자간의 화의를 주선했습니다.

"신교도들도 태후께 공손히 모자를 벗어들었다."

당시 기록에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원래 이 카트린은 정략결혼으로 억지로 프랑스로 끌려왔지요.

거기다가 남편은 맨날 바람이나 피우고 사위(나바라 공)는 언제나 장모인 그녀에게

도전했습니다. 한마디로 내우외환에 시달렸다는 얘기죠.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어떻게든 프랑스의 내전 상황을 종식시키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딸과 나바라공을 결혼시킨 의도에 악의는 없다고 봅니다.

 

문제는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수단이 올바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죠...

비록 그 수단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요.

 

200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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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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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입니다.

 

저도 최근에 이 학살에 대한 자료를 읽게 되어 마침 이렇게 답변을 드립니다.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은 1572년경 프랑스에서 있었던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 당시, 유럽은 한창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 각 나라들이 종교다툼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죠.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6세기의 프랑스는 카톨릭을 믿는 프랑스 본토와 개신교를 믿는 나바르라는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두 나라의 국왕은 어차피 같은 혈통의 왕조였지만,

 

종교적 이유로 나뉘어져 있었죠. 나바르는 나라라기 보다 프랑스 내에서 큰

 

힘을 지닌 거대한 귀족 가였죠. 이들이 서로 벌인 전쟁이 '위그노 전쟁' 이라 하여

 

36년간 지속됐었습니다. 당시의 개신교들은 프랑스에서 '위그노'라 불렸죠.

 

 

자, 시대적 배경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의 주역이 된 인물들을 먼저 설명하자면...

 

그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샤를 9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학살의 주도자였던 샤를 9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가 있죠.

 

피해자측의 주역은 나바르의 제후 앙리 드 부르봉입니다.

 

그 외 앙리의 신부이자 카트린의 딸인 마고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느냐....

 

카트린 드 메디치는 희대의 악녀로 불리는 인물로 샤를 9세의 어머니이기 전에

 

메디치 가의 여식으로 철저한 골수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죽음으로 밀어넣은 피의 악녀로 유명하죠.

 

계기는 이렇습니다.

 

카트린은 무슨 마음인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화해와 프랑스의 화합을 위해

 

먼저, 앙리 에게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제의합니다.

 

현 프랑스 국왕의 여동생과 프랑스 내 개신교의 우두머리 귀족이 결혼을 한다면

 

서로 화합할 수 있을거라 설득했죠.

 

1572년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앙리는 평화를 위해 결혼식을 하러 파리로

 

오게 됩니다.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이끌고...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자 카트린은 생각을 바꾸어 골수 가톨릭 신자인 기즈 가문의

 

기즈 공과 공모하여 개신교도들에 대한 학살을 단행합니다.

 

8월24일 새벽, 화려한 결혼식 장에 무장병사들이 난입하기 시작하고, 파리에 와있던

 

모든 개신교도들이 남김없이 학살당합니다. 유혈의 결혼식이 되어버렸죠.

 

파리에 이어 지방에서도 개신교도들에 대한 무서운 학살이 진행되었고, 지도자와

 

중요 장군들이 파리에 가고 없는 터라 대응 한 번 못해보고 무차별로 살해당합니다.

 

놀란 샤를 9세가 학살금지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10월까지 유혈사태는

 

지속되며 프랑스 내의 신교도들은 거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앙리는 포로로 잡혔고 자신의 동료들이 전부 죽임을 당할 때까지 3년 반 동안

 

파리에 갇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 샤를 9세가 서거한 후, 앙리가 그 다음 왕위 계승자로

 

선출되어 1598년 앙리 4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하고, 자신은 가톨릭 신도들과의 화해를 위해 자기 스스로 가톨릭으로 종교를

 

개종합니다.

 

 

그렇다면, 카트린이 자기 친 딸을 이용하면서 결혼식장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선 확실한 학설이 없이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설은 처음부터 개신교도들을 몰살시킬 작정으로 위장결혼을 제의한 것

 

이라는 의견이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결혼으로 화해할 생각이었으나 개신교와의 화해를 용납 못하는 로마

 

교황의 압력으로 인해 중간에 생각을 바꿔 학살을 단행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의견이지만 그 당시 개신교도들을 이끄는 뛰어난 인물인 콜리니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이었다고도 합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콜리니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개신교도들과 가톨릭교도 사이의 싸움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는 게

 

제일 낫다고 판단한거죠. 결국, 예상대로 콜리니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고

 

다른 개신교도들과 함께 결혼식장에서 살해당합니다.

 

나머지 개신교도들은 콜리니를 살해하면서 덤으로 죽였다는 설입니다.

 

 

마지막 주장은 어떻게 보면 어이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콜리니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딸을 이용하면서까지 개신교도 전체를 학살한다는게 말이 되느냐...카트린은

 

미친 여자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죠.

 

그래서 왜 콜리니가 중요한 인물인지 부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콜리니는 해국제독 출신으로 아주 뛰어난 장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스스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1562년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자 콩데공 루이1세와 함께 개신교

 

즉 위그노파의 거두가 되어 개신교 진영을 통솔, 그 탁월한 전략성과

 

전술로 쇠퇴해 가는 개신교 세력을 만회시킵니다.

 

1569년 콩데공이 죽은 뒤에는 개신교 군사진영의 총수가 되었으며,

 

1570년 개신교·가톨릭 양교도 사이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자 남부 프랑스의

 

개신교들을 거느리고 파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젊은 왕 샤를9세의 신임을 얻었고, 왕에게 영국과 결탁하여 에스파냐와 싸울 것을

 

진언합니다.

 

섭정인 모후 카트린은 같은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와 전쟁하는 것을 원치 않아,

 

개신교도 지도자들을 말살시키자고 왕을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이런 일을 꾸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200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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