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출 15:26)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인 치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을 원래 하나님이 지으실 때는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무병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은 병들고 고통당하고 죽나요? 잘 알다시피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지어서 그 결과로 죽음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지가지 심신의 병을 앓고 고생하게 되었고 병의 치료를 위해서 무진 노력을 다하고 많은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전시 유성에 있는 국군군의학교에 가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커다란 돌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살려야 한다”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군의관으로서 군대에서 상처 입은 군인들을 끝까지 살려야만 된다는 의무감을 그곳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 마음에 큰 느낌이 있습니다. 군의학교에 살려야만 한다고 슬로건을 붙여 놓았으면 교회는 치료해야 된다는 슬로건을 붙여야 될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는 갖가지 심신의 병으로 고통 받게 되었고, 병의 치료를 위해 무진 노력을 다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온갖 질병과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을 치료해 주고 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마땅히 해야될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본론>
1. 병든 인격의 치료

첫째로, 사람들은 도덕적인 허물로 병든 인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도덕적인 허물로 병든 인격을 치료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흠이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바깥으로 보기에는 밝고 맑고 환한 것 같아도 속 삶을 들여다보면 다 흠이 있고 점이 있고 모자란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추며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 죄와 허물을 치료한다는 것은 사람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먹고 사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 죄악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들이 죄 없이 완전히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하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영원한 제사를 드려서 우리에게 영원한 용서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루 동안에 용서만 주시면 내일은 어떻게 합니까? 어제만 용서를 주셨으면 오늘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다 한정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으로 주님이 드린 제사는 영원한 제사인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 제사로 영원히 주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찔리고 상한 것은 허물과 죄악을 영원히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하루 이틀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은혜로서 우리는 그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더 이상 우리가 드릴 제물이 없어요. 인간의 노력과 애씀의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영원히 용서와 의로움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허물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받고 용서받고 치료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보면 알코올 중독, 도박, 거짓말, 음란, 도적질, 미움, 원한 등 인격에 병이 들어 스스로 씻어 벗어버리지 못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병에 걸려 있으면 아무리 꾸짖어도 안되고 정죄와 심판 등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세요. 형무소에 가서 형기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또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방탕하고 성범죄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악의 씨가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 씨를 뽑아버리고 생명의 씨앗으로 갈아 치우기 전에는 사람의 힘과 능으로는 거룩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도덕적인 인격이 치료받아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치료받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 보혈로 씻어주고 용서만 해주고 내버려 놓으면 또다시 죄를 짓고 또다시 죄를 짓고 끝없이 죄를 짓습니다. 그 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 속에 거하면서 죄의 뿌리를 뽑고 거룩한 씨를 심는 도리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다른 점은 안 믿는 사람 속에는 세상의 영, 악령이 들어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악령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신, 성령이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로 38절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성도들이 받을 성령을 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이 뽑혀 나가고 허물이 뽑혀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됩니다. 성령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행위가 달라지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인격적인 변화를 받고 치료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께 부르짖으면 성령을 어느 곳에나 주십니다. 집에서 혼자 받을 수도 있고 길거리에 걸어가다가도 받을 수 있고 말할 필요없이 교회와서 기도하다가 성령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성결에 이르고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2절로 13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병자는 의원이 필요합니다. 다 건강하면 의사들이 굶어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은 병자를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일생의 꿈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병든 자가 의사에게 치료받을 뿐 아니라 의사는 병든 자들 때문에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의사에게 병든 자가 필요하고 병든 자는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온 것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오셨고 죄인은 예수님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죄에서 용서받고 거룩함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

우리가 죄와 허물에서 벗어나면 주님께서 동시에 육신의 질병도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와 허물을 어떻게 벗어납니까?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것이 성령으로 되는데 사실은 죄와 허물을 벗어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도 시편 91편에 저가 내 이름을 안 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했는데 주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에 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을 주님께서 높여 주시고 가까이 계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과의 사이에 죄도 주님께서는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저는 오늘 아침에 옷 다 입고 아침 먹기 위해서 걸상에 앉았다가 잠시 졸았는데 정말로 오래간만에 아버지,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아버님께서 아주 정장을 하시고 어머니도 외출복을 입으시고 아버지 곁에 서서 두분이 나를 찾아와서 씽긋이 웃으시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보고 얼마나 흐느껴 울었는지 모릅니다. 꿈에 갑자기 아버지를 보니까 너무 그립고 너무 반갑고 또 죄책으로 살아계실 동안에 잘 못해드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죄책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내 소리에 내가 놀래서 깨보니까 꿈이었습니다.

여러분 부모 살아계시면 살아 계실 동안에 부모를 잘 섬기십시오. 죽고 난 다음에는 애달다 어찌하리. 평소에 고치지 못할 병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부모를 공경하라. 그 다음 살인하지 말라. 사람 죽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덕적 범죄하지 마라. 네 이웃을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다 지킬 수 있는 일입니다. 지키겠다고 결심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관계, 사람과 사람관계를 올바르게 하면은 하나님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않고 병을 다 고쳐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교회는 병 고치는 곳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교회에서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죄가 사함 받으면 병이 고침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계명을 지키면 내가 너희 병을 다 고치겠다고 했으니 우리가 영적으로 회개하고 자백하고 성령받으면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병 고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휴 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나 같은 죄인을 주님께서 도저히 돌보지 아니하실 것이라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정죄해도 주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여러분 죄를 들춰내서 여러분 정죄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주고 씻어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저는 항상 예수님의 행위에 크게 감동하는 것이 요한복음 8장에 있는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바리새교인이나 사두개교인이나 교법사들은 엄격한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인정도 사정도 없이 율법은 지켜야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완전히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닌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정죄하고 예수님을 쫓아내고 군중들 가운데서 돌을 던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기회가 왔어요.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데 그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여자는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이 다 찢어지고 헝클어지고 신발이 벗어진 채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보고 주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십계명 중에는 간음하지 말라고 했는데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손에서 돈을 들고 우리가 돌로 쳐 죽일까요?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입장 곤란합니다. 돌로 쳐죽이라고 하면 아니 당신이 용서와 자비를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무자비하게 죽이느냐. 당신은 거짓 구주다. 그렇게 말할 것이요. 죽이지 말라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의 종이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냐 그럴 것이요. 이래도 잡히고 저래도 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분명히 십계명을 적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돌로치라는 이 여자의 간음한 죄는 십계명 중에 하나니까 십계명을 적고 난 다음 주님께서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안치라는 말 안했습니다. 죄있는 여자에게 돌 쳐라. 나 안치라고 말 안한다. 그러나 너 죄 없는 사람이 쳐라. 죄 있는 사람은 칠 자격이 없다. 그 내용에는 네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치는데 내가 기록한 이 십계명 중에 죄가 있으면 그 다음 내 손에 맞아 죽을 줄 알아라. 그 말인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율법주의자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앞뒤를 다투어서 돌 내버리고 다 달아났습니다. 왜,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지 말라 했으면 발목이 잡히겠는데 치라고 했으니까 치기는 치되 죄 없는 네가 먼저 치면 그 다음에 죄가 발견되면 내가 너를 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놀래서 다 달아나 버리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여자보고 여자여 고개를 들라. 공포와 불안에 벌벌 떨면서 눈이 충혈된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쳐다보니까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있느냐. 살펴보니 돌멩이만 흩어져 있고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정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가서 다 죄짓지 말라. 그 은혜를 입은 여자가 집에 가서 또 짓겠어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난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영원히 변화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받고 나면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여 돌무더기 속에 들어가기를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앞에 나오면 우리는 죄와 허물이 용서받고 죄와 허물을 따라온 질병조차 치료함을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는 것이니 교회는 바로 병고치는 곳이요 교회 간판은 우리는 치료하는 곳이라고 써붙여 놓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와 허물이 용서받고 여러분의 삶이 주의 계명과 율법을 쫓아서 회개하면 나는 너희 병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주님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다 치료받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정신건강의 치료

둘째로, 우리는 정신적인 건강의 치료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는 정신에 나타나는 병입니다. 사람이 육체만 병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도 병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신적인 병은 눈에 안보이는 병인데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병적인 부정적인 마음이 정신적인 병인데 무능력, 무기력, 패배주의, 고질적인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우울증 등은 모두다 치료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서 너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고 패배주의고 염려, 근심, 불안, 초조의 노예가 되고 미움과 원한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 욕을 하면 안됩니다. 비난이나 비평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의 즐거움은 엔돌핀이 나오기 때문에 치료가 넘쳐나지만 마음의 근심은 뼈가 마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뼈가 마를 지경이니까 살은 녹아버리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병이 드는 것은 심인성이 많습니다. 마음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억압 이런 것들이 육신의 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건강도 치료받아야 할 병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마귀가 사람을 누릅니다. 와서 우리에게 언어 심사 행동을 훼방하여 발을 걸고 자꾸 넘어지게 하고 실수하게 하고 그 다음은 억압합니다. 마음의 심신을 억압해서 자유를 빼앗고 우울하고 탄식하고 염려 근심의 노예가 되게 하고 나중에 제정신이 아니게 마음에 병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니시면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쳤다고 했으니 오늘 마음이 눌린 사람 다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 주의 뜻인 것입니다.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 같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늘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늘 감사하는 삶 이것을 원하시지 마음에 슬픔이 꽉 들어차고 염려, 근심이 짓누르고 불평, 원망, 탄식, 미움, 원한이 꽉 들어찬 삶은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한 교회학교에 허름한 복장을 한 소년이 들어왔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긴장한 얼굴로 마음에 굉장히 적대심을 가지고서 교회에 들어왔는데 교회학교 교사가 그를 안아서 뺨을 비벼주고 잘왔다~ 우리 교회 잘왔다. 그리고 난 다음 토닥거려주었습니다. 그러니 이 소년이 언제나 교회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교회 오면 그 교사를 찾았고 그 교사는 손을 만져서 비벼주고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격려했습니다. 이 소년은 마음이 병든 소년이었습니다. 집에 아버지가 알콜중독자가 되어서 술을 먹고 와서 가산을 다 파괴하고 엄마를 때리고 자기를 발길로 차고 그래서 이 소년은 학교 교육도 못받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면서 죄나 짓는 그런 소년이었는데 자기를 사람 대우해주는 것은 교회 교회학교 선생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학교 선생으로 말미암아 그가 마음에 변화를 입었습니다. 차디찬 세상에서 교회오면 마음에 따뜻함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날이 갈수록 꽁꽁 얼어붙은 그 소년의 마음이 녹아지고 녹아져서 나중에 미국이 아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D.L.무디라는 수십만명을 주께로 이끌어간 위대한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은 사람이 고쳐줄 수 있는 것입니다.

존 템플턴이라는 위대한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순수한 관심이라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이웃에 관심을 기울여 준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뭡니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 넥타이에 먼저 묻은 것 하나라도 털어주는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식을 돌보고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도 부모의 행복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때인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서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지 서로서로 기피하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고 껍데기 벗기고 욕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치료하는 곳이 된 것이 아니라 상처 입히는 교회가 된 것을 크게 우려하여 마지하지 않습니다. 교회오면 맑은 사람도 병신 만들어 버리거든요. 왜냐하면 구역예배나 지역장 예배나 예배에 가서 자기 스스로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나면 모두다 뒤에 가서 헐뜻고 발가벗기는 일에 전문으로 하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치료해주고 용서해주고 덮어주고 안아주고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관심이 바로 사랑이고 사랑이 우리 심리적 치료가 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적이며 고질적인 염려와 근심, 불안과 초조를 나타내는 증상은 치료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 앞에서 정신적인 건강은 꿈과 소망을 갖고 건강하게 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치료의 역사를 베푸는 것입니다.

레오나르 캠머 박사는 30년 동안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왔습니다. 정신치료계의 거두인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정신질환의 치료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의사들이 치료보다도 관심과 사랑이 더 효과를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들에게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나 가정에 사랑을 받고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것이 정신건강을 가져오는 첩경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신질환의 원인은 대부분 마음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것으로, 세상과의 단절과 외로움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톨이가 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심정이 되고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아니하면 이것이 뭉쳐서 정신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캠머 박사는 정신 건강을 위해 인간관계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교제를 해야 합니다. 정신질환은 대부분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환자들 중에는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이, 혹은 모르는 사람이 걸었던 말 한 마디가 치료를 가져 오고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처방하는 치료와 간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이 받았던 관심과 사랑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습니다.” 굉장히 깊은 병인데 전화 한통 받아서 위로받는 것이 큰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고 따뜻한 손길 한번 스쳐가는 것이 마음에 큰 감동과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저는 옛날에 그것을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뭘 말 한마디가 변화를 가져오느냐. 그랬는데 제가 많은 시련과 환난을 통할 때 경험해 보니까 평신도 우리 지역장, 구역장이나 평신도라도 제게 와서 목사님 위해서 기도합니다. 건강하십시오. 튼튼하십시오.

다 하는 말인데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그 말이 치료하는 능력을 가져오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을 느끼고 야~ 말한마디가 천냥빚을 갚는다더니 진짜 이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여러분, 말로써 우리는 돈으로써 도저히 살 수 없는 위로와 치료와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들어가서 막말을 하지 말고 관심있는 사랑의 말을 하십시오. 그 말이 서로서로를 위로하고 치료하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자꾸 꾸짖고 결점을 들춰내지 말고 격려를 해주십시오. 잘한다. 할 수 있다. 너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너는 건강하다. 위로의 말을 해주십시오. 그 말이 굉장한 용기를 주고 치료를 주고 새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는 정신에 나타나는 병이므로 비난과 비평의 대상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의학적인 조치를 통해 치료가 필요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진정한 관심과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면 정신적인 병은 일어나지도 아니할 것이고 또 대다수가 낫습니다.

3. 육체의 치료
셋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육체적인 치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전문의가 아니고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육체의 병은 오늘날 멸시와 비난의 대상이 될것이 아니라 치료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병이 얼마나 많습니까? 병의 이름을 모르는 우리들은 무슨 병인지도 모릅니다. 의사들도 자기 전문의가 아니면 병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만큼 병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러분 병 고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병의 이름을 다 알고 계십니다. 병의 이유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이나 전문의가 고치지 못하는 병도 하나님은 다 고치는 것은 야고보서 5장 14절로 15절 한번 단단히 들어 보세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병과 죄와 언제나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병이 있으면 제 일차로 교회 장로들을 청하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 장로라는 것은 그 당시에 장로는 목사를 보고 장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의 종을 제일 먼저 청해서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 그것은 무슨 말이냐. 병은 사람의 힘으로 낫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낫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기도하러 가서 내가 안수한다고 병 낫겠느냐. 어림도 없지. 그러나 해달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해줘야지. 그런 마음을 먹는 목사들이 많아요. 그러면 병 안낫습니다. 목사가 기름을 바르는 것은 이것은 내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고치신다.

내가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있지요. 자기가 안고치는데 성령님이 고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손을 빌려 달라 기도를 빌려 달라고 하는 것이므로 기름 바르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와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병 고치는 영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회개시켜서 변화시킬 뿐 아니라 몸에 병을 고쳐서 건강을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병 고침이 반드시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나의 너의 병을 치료하는 야훼라고 말했었고 예수님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했고 성령은 기름부으심이 되어 우리 병고치겠다고 말했으니 삼위일체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는 치료하는 처소가 교회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치료 사역
예수님은 그 사역의 2/3를 병 고치는데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 자세히 한번 살펴 보십시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주님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다 고치시고 모든 앓는 자들이 예수께 다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하셨고 너희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말하셨으니 이 자리에 예수님이 있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아멘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은 모든 병든 자와 모든 앓는 자를 고치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돼요. 오늘 우리가 병든 자는 좌우간 주님께 고쳐 달라고 기도하고 믿어야 돼요.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만 고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복음 전할 때 반드시 병을 고치라고 명령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로 7절 8절에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병고치고 장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병고치고 난 다음 봉투 내세요. 봉투 내는 사람 위해서 기도해 주고 봉투 안내는 사람 위해서 기도 안 해주고 이것은 장사꾼이지 주의 종은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은혜를 주셨으면 충심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면 낫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도 병 고치는 역사를 주어서 가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반드시 병을 고치라고 말한 것입니다.

열두 제자에게도 그랬는데 그 다음 그것도 모자라서 주님은 칠십 인의 제자를 불러서 누가복음 10장 1절로 9절에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집에 심방가든지 차려 놓은 것 거부하지 말고 반찬투정하지 말고 그대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러 왔지 음식시식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준 것 그대로 먹고 그냥 떠나라고 말 안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하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혼자 치료하니까 사람이 너무 병자가 오매 열두제자에게 치료하는 역사를 주었고 열두 제자도 모자르니까 칠십인의 제자에게 그 권능을 주었고 칠십인도 모자라니까 마지막 떠날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마가복음 16장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아멘 하십시다. 믿는 자면 내가 말한 것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기를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내 병만 손얹지 말고 남의 병도 손 얹어서 고쳐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병 고치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래도 병고치고 저래도 병고치고 앉아도 병고치고 서도 병고치고 교회와도 병고치고 심방가도 병고치고 동네에 가도 병고치고 어디가도 병 고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병인 죄도 고치고 마음의 병인 심신의 심리적인 병도 고치고 육체적인 병도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죄 사함과 병 고침은 나란히 갑니다. 죄 사함이 있는 곳에 병 고침이 있고 회개하라고 복음 전하면 반드시 병 고치는 역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치료는 항상 같이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영만 주님 영접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혼 즉, 마음도 고침을 받고 육체도 고침을 받고 전인구원을 받아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해서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최근 영국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랑의 감정을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면역성이 높아 감기에도 안 걸린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도 신체 접촉이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고, 혈압과 맥박을 정상화시킨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정신건강 상담원으로 일하는 캐들린 키팅이라는 간호사는 “포옹 요법”을 개발하여 고통과 근심, 절망 가운데 있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료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포옹 요법이 미국의 대형종합병원 간호사 훈련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들린 키팅은 포옹 요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포옹요법이란 환자를 안아주는 것입니다. 등허리를 쓸어주고 두들겨 주는 것입니다. “포옹은 기분전환에 좋고 외로움을 없애주며 두려움을 이기게 해 줍니다. 자부심을 갖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욕구불만으로 많이 먹는 사람에게 식욕을 줄여주고, 알콜 및 약물중독자에게 안전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특히, 포옹은 맞벌이부부 아이들의 애정결핍증을 치료하는데 큰 도움을 주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을 안아주면 아이의 상실감을 치료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캥거루 요법이라고 말합니다. 캥거루는 배에 주머니가 있어서 새끼를 배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않습니까? 왜 캥거루 요법이라면 어느 부인이 쌍둥이를 낳았는데 쌍둥이 중에 하나가 죽었어요. 그래서 의사가 부인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와서 그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서 이렇게 흔들어 주니까 살아나버렸어요. 완전히 심장의 맥박이 그치고 죽었는데 어머니가 끌어안아 주니까 그 포옹으로 말미암아 살았으므로 그 산 것을 캥거루 요법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어머니가 안아주면 낫는다. 품어주면 낫는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 친근함과 사랑이 전달되어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십자가에서 안아주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안길 때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
최근, 토드 화이트(Todd White)라는 미국의 거리 치유사역자가 길거리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병을 고치는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해병대에서 군대 생활을 못하고 쫓겨나고 그 다음에 22년 동안 마약중독에 빠져 무신론자였던 그가 어느 날 시편 23편을 혼자 읽다가 크게 감동을 받아 성령이 임하여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알콜중독에서 해방되고 건강을 얻어서 길거리에 나가서 너무나 기뻐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붙잡고서 기도를 해주었어요. 그런데 희안하게도 이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치료해 주어서 어떠한 사람은 다리가 1인치나 짧은 사람이 다리가 길어지고 한쪽 눈이 장님인 사람이 눈이 보이게 되고 어떤 장애인은 무릎에 철심을 두 개나 박아 놓았는데 절대로 다리를 굽힐 수 없는데 이 사람 기도를 받고 다리를 마음대로 구부려요. 의사가 기적으로 명명을 했습니다.

미국의 각 텔레비전 방송은 그를 초청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방송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토드는 신학교도 나오지 아니하고 신앙의 경력도 길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한 것을 단단히 귀 기울여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과 질병을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의 마음이 믿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오히려 교회를 힐난합니다. 불신의 마음이 믿음의 자리를 점령해서 마음에 불안과 공포증을 주므로 겁을 내어서 기도 안하기 때문에 안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서 안받아주니까 길거리에 나가서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 붙잡고 예수 이름으로 안수해 주니까 길거리에서 낫는다 말입니다. 너희가 담대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고 말한 예수님 말씀같이 여러분이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가면 상상 이상으로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용서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해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반드시 병을 고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모든 정신적인, 인격적인 장애 뿐 아니라 마음과 육체의 질병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에 남긴 유언 중에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할 때 치료의 표적이 따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손을 안 얹으면 어떻습니까? 손을 얹는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서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장난으로 기도하지 말고 사랑을 가지고 손을 얹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주면 고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증거에 치료의 은총에 대하여 반드시 말해야 되고 실제 써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전도할 때 주님이 용서하여 구원한다는 말만하지 말고 주님이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친다고 반드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책임이요 의무인 것입니다. 오늘날 주의 종들이 치료의 역사를 베풀지 않는 것은 사실은 부끄러워해서 그런 것입니다. 병 고치는 것은 병원 의사들이나 할 것이지 교회에서 병 고치는 것 하다가 안 나으면 어떻게 하노 내 망신당하지 않겠느냐.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함으로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두 명에게도 칠십 명에게도 나중에는 마지막 모든 교인들에게 반드시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뿐 아니라 마음에 평안을 얻고 육체의 건강을 얻고 살다가 주님나라에 가야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곧 오시지만 오시기 전까지 치료의 역사를 베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꼭 치료의 역사를 베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번 기도하십시다.

/ 2011. 12. 4. 성찬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