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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헬렌켈러가 이룩한 업적
gkdi**** 조회수 4,755 작성일2009.05.10

헬렌켈러가 이룩하신 업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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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헬런켈러 -Keller, Helen Adams (1880.6.27~1968.6.1)


앨라배마주(州)의 터스컴비아 출생.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라고 불린다. 19개월 되던 때 열병을 앓은 후, 소경·귀머거리·벙어리가 되었다. 7세 때부터 가정교사 A.M.설리번에게 교육을 받고, 1900년에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세계최초의 대학교육을 받은 맹농아자로서 1904년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이 당시 마크 트웨인은 그녀에게 “삼중고를 안고 마음의 힘, 정신의 힘으로 오늘의 영예를 차지하고도 아직 여유가 있다”는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노력과 정신력은 전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다양한 활동으로 ‘빛의 천사’로도 불렸다. 1906년 매사추세츠주 맹인구제과 위원에 임명되었고, 1924년부터는 미국맹인협회에도 관계하였다. 한편, 미국 전역 및 해외로 돌아다니며 신의 사랑·섭리와 노력을 역설하여 맹농아자의 교육, 사회복지시설의 개선을 위한 기금을 모아 맹농아자복지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7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저서에 《나의 생애 The Story of My Life》(1902), 《암흑 속에서 벗어나 Out of the Dark》(1913), 《나의 종교 My Religion》(1927), 《신앙의 권유 Let Us Have Faith》(1940) 등이 있다.


2. 헬렌켈러의 생애 및 업적 소개

그녀는 1880년 6월 27일 앨라배마 북서쪽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투스쿰비아에서, 졸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났다. 두 살 무렵까지 다른 아기들처럼 별 탈없이 자랐다. 두 번째 부인인 어머니인 케이트 아담스 켈러는 남편인 켈러 대위보다 스무살이나 적었다. 아버지는 멤피스 출신의 사라 로서와 결혼해서 아들 둘이 있었지만, 사라는 1877년 서른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자기 이름을 따서 '헬렌(빛을 뜻함) 에버레트'라고 지으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아기가 세례를 받는 날 목사에게 아기를 '헬렌 아담스'라 부를 것이라고 말해 버렸다. 1882년 2월 헬렌이 태어난지 19개월 되었을 때 위와 뇌에 심각한 울혈이 생겨났다. 그 때 의사들은 헬렌의 병을 '뇌척수막염'이라고 진단했지만 정말 뇌척수막염을 앓았던 것인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로 인해 헬렌은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말을 못하게 되었다.

그 당시 디킨스의 [미국 방명목]에서 하우이 박사가 시각, 청각 장애를 겪고 있는 로라 브리지먼을 가르친 이야기를 듣고 케이트는 희망을 가졌다. 1887년 3월 3일 애니 설리번이라는 가정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애너그노스 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살밖에 안되는 선생님이었지만, 그녀도 트라코마 눈병을 앓은 탓에 반쯤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애니가 공부를 가르치려 하자 헬렌은 애니를 때려서 앞니 하나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애니는 이에 꺾이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로 헬렌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헬렌의 집에 도착하고 곧 글자 공부가 시작되었다. 애니는 로라가 옷을 지어 입혀 준 인형을 헬렌에게 주고 헬렌의 손바닥에 '인형'이라는 글씨를 써 주었다. 이것이 헬렌에게 가르쳐 주려 했던 첫 낱말이었다. 하지만 헬렌은 온갖 반항을 다했다. 애니가 가르쳐 주려했던 두 번째 낱말은 '케이크'였다. 애니는 헬렌의 손바닥에 케이크라는 글자를 쓰며 케이크 한 조각을 주었다. 헬렌은 뭔가 손짓을 따라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헬렌을 고분고분하게 만든 방법은 매가 아니었다. 애니는 그 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것은 아이에게 글자를 써주지 않는 것이었다. 애니의 빠른 손가락 놀림에 헬렌이 관심을 보이던 헬렌은 그 움직임 속에 무언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숨어있던 지성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애니는 이 무렵부터 헬렌을 쉽게 교육시킬 수 있었다. 헬렌이 난폭한 행동을 할 때마다 애니는 손의 움직임을 딱 멈추고 아이가 바른 행동을 보일 때까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잘못할 때마다 아이를 어둡고 고요하면서도 무척이나 외로운 무덤 속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퍼킨스 학교장 마이클 애너그노스와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덕분에 헬렌켈러는 고결한 시각, 청각장애인 천재라는 사회적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헬렌은 열살 때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미국과 유럽 사람들은 헬렌이 받은 교육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다.

라이트-허머슨 학교에서 유일한 시각, 청각장애 학생이었던 헬렌은 청각장애만 있는 다른 학생들과 전혀 어울릴 수 없었다. 헬렌은 지리, 프랑스어, 독일어, 수학을 배웠는데, 수학은 따분하게만 느껴지고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 이 즈음 헬렌은 타자를 배워서 특별 자판이 달린 타자기 몇 종류를 다룰 수 있었다.

헬렌은 다른 살마처럼 말하지 못하는 데에 적지 않게 상심했다. 그러나 언어장애가 그녀를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지는 못했다. 헬렌과 애니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작가 마크 트웨인, 소설가 윌리엄 딘 하웰스, 편집자 리처드 와트슨 길더, 석유왕 존 록펠러와 핸리 로저스, 연극배우 헨리 어빙 경 등 많았다.

1896년 헬렌은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여동생 밀드레드와 함께 다녔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비로로 보고 들을 수 있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수화를 할 줄 아는 교사와 학생이 거의 없었다.

1900년 가을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했다. 이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 고등교육 기관에 입학한 첫 번째 사례였다. 같은 과 친구 가운데 수화를 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고, 스승들 가운데 그녀와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명에 불과 했다. 1904년 6월 28일 스물네 살에 래드클리프 대학의 전과저을 수료하고, 특히 영문학이 우수하였다.

헬렌은 사회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가족들을 비롯해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단지 그녀를 기적을 일으킨 장애인 여성으로 남겨두려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헬렌이 열정적인 사회주의자인 존 메이시와 가깝게 지냈고, 그를 존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헬렌과 존에게는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았다. 1912년 거의 1백만에 가까운 미국 사람들이 사회주의자 대통령 후보였던 유진 빅터 뎁스에게 표를 던졌고 천명이 넘는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공무원으로 일했다. 헬렌은 메사추세츠 사회주의 당원이었다. 당시에 여성과 아동의 법정 노동 시간을 줄인 매사추세츠 법률이 제정되자 미국 방모회사는 그 보복으로 여성과 아동의 임금을 삭감했다. 일터에서 길거리로 뛰쳐나온 2만 5천명의 노동자들은 세계산업노동자동맹에 호소했다. 헬렌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는 데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녀가 평화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전쟁이란 거의 제국주의적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로서 전체 노동 계급에게 고통을 주고, 희생과 가난을 낳고 그것을 보상받을 길이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헬렌의 으뜸가는 사명은 시각장애인 복지운동이었지만,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고 아동의 노동을 반대하는데 주력하였다.

헬렌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보다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투가 자신이 가진 진짜 장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10년 보스턴 음악학교의 성악교사인 찰스 화이트에게서 목소리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헬렌은 두 눈을 없애고 유리눈을 새로 끼웠다. 보이지 않는 눈 대신 가짜 눈을 끼우는 것이 의학적으로 이로웠을 뿐 아니라, 겉모습을 눈에 뛸 만큼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그때부터 헬렌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더 이상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

1916년 헬렌과 페이건은 잠시 사랑에 빠졌다. 페이건은 가끔 헬렌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은 보스턴에 있는 시 호적계에 가서 혼인 허가서를 신청했다. 하지만 헬렌은 어머니에게조차 두 사람의 관계를 숨겨야만 했다. 헬렌은 어머니의 반대로 두 사람의 약혼은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남의 눈을 피해가며 계속 만났으나 함께 도망가는 길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계획은 실패하게 되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꿈은 조각나 버리고, 헬렌은 어쩔수 없이 수도승 같은 삶을 이어야 했다. 어머니와 애니가 자기들 판단에 따라 자기들의 특권으로 헬렌의 사라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1918년 헬렌은 헐리우드에서 '해방(Deliverance)'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이 때 헬렌과 애니는 돈에 쪼들렸다. 애니의 건강이 좋은 않은 탓에 순회 강연을 다니지 못했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많은 단체들이 강연을 취소해 버린 것이다. 영화는 헬렌의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사람들의 권력 투쟁, 사회주의자 비서와 이루지 못한 사랑, 선생님과의 복잡한 관계는 제외하고 기적을 이룬 장애만을 다루었으나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후에 1955년에 '운명을 이긴 사람들'을 찍어 장편 기록영화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1929년 애니 선생님은 백내장이 심해져서 오른 쪽 눈을 없앴다. 1934년에는 거의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1936년 10월 20일 애니 설리번은 헬렌의 곁에서 손을 감싸쥐고 있을 때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헬렌과 애니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라고 믿고 있었다.

1931년 4월에 헬렌은 뉴욕에서 세계 32개국의 대표들이 참석한 제1회 세계 시각장애인 회의에 참가하여, 표준점자를 호소한 덕에 브라유 점자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세계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미국 의회에서 헬렌이 한 첫 연설의 결과로 프랫-스무츠 법안이 입법화되어 의회 도서관의 지휘에 따라 전국적으로 시각장애인 도서관 체제가 생겨났다.

1931년 헬렌은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고, 1932년에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후에 1955년 6월 75세에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명예학위를 받았다. 여성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은 것이다.

애니가 없는 헬렌은 폴리 톰슨과 넬라 브래디 헤니가 함께 하였다. 폴리 톰슨은 애니가 죽을 때까지 22년 간을 그들과 함께 살며 비서일을 비롯해 잡다한 일을 했었고, 이후에 애니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넬라는 애니 설리번의 전기를 펴내 인기를 끌었고, 나중에 저술 대리인이 되었다.

1940년 헬렌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미국 구조선 활동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프랑스의 강제수용소에 있는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을 해당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FBI에 의하면, 의회반미활동위원회를 해체하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하고, 유명한 여성 공산주의자들에게 격려인사나 생일 축하 인사를 보내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헬렌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제2차세계대전 후에도 전쟁터에서 눈이 먼 부상별들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6개월 동안 70여 곳의 육군 해군 병원을 찾아가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만났다.

1946년 헬렌은 미국 시각장애인 협회의 자매단체인 외국인시각장애인 협회에서 주관한 첫 번째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그후루 11년 동안 장애인을 우해 5개 대륙의 36개국읠 방문했다. 그녀가 찾아갔던 나라에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다. 1948년 일본에 머무르고 있을 때 폴리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일본 의사는 가벼운 발작이라고 진단했지만, 나머지 여행(한국, 중국, 인도)을 취소했다.

1960년 3월 66세로 폴리 톰슨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46년 동안 헬렌을 위해 일했다. 삶의 막바지에서 헬렌은 미국 시각장애인 협회의 일을 거의 하지 않았고, 많은 시간을 식구들과 함께 보냈다. 1964년 헬렌은 린던 존스 대통령이 주는 자유 메달을 받은 30인 중 한사람이었다. 자유 메달은 미국의 최고 시민상이었다. 1년 뒤에는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여성 명예의 전당에 선정된 20명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백 명의 후보자 가운데 헬렌과 엘레네 루즈벨트가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하지만 헬렌은 자기가 이 두 가지 상을 받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7년 동안 헬렌은 휠체어와 침대에 갇혀 병을 앓았고, 1968년 6월 1일 토요일 낮 아칸리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일화 -  얽힌 이야기

(1) 1887년 4월 5일 펌프가에서 헬렌의 영혼이 해방된 기적


저 번 편지에서 '찻잔'과 '우유'란 글자를 가르쳐 주는 일이 다른 어떤 것보다 힘들었다고 썼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가 '마신다'는 동사와 그 대상이 되는 명사들을 헷갈려 했거든요. 아이는 '마신다'는 글자를 깨우치지 못해서 '찻잔'이나 '우유'라는 글자를 쓰고도 마신다는 몸짓을 해보였어요, 오늘 아침 아이가 세수를 하다가 '물'이라는 글자를 알고 싶어했어요. 저는 'w-a-t-e-r'라고 써 주었어요.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샤ㅐ로운 글자로 '찻잔-우유'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우리는 펌프로 갔지요. 헬렌에게 찻잔을 쥐어주고 펌프 꼭지에 갖다 대 주었어요. 나는 펌프로 물을 펐고요. 찬물이 콸콸 쏟아져서 찻잔을 가득 채웠어요. 나는 헬렌의 빈손에 'w-a-t-e-r'라고 글자를 썼어요. 손바닥에 쏟아지는 찬물의 느낌 때문에 글자의 뜻이 또렷하게 떠오르자 아이는 깜짝 놀란 것 같았어요. 아이는 찻잔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서 있었어요.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더군요. 아이는 '물'이라고 여러 번 썼어요.

그리고 땅에 떨어뜨렸던 것의 이름을 묻더군요. 또 펌프와 펌프대도 가리켰고, 갑자기 뒤로 돌아서더니 저보고 누구냐고 물었어요. 저는 '선생님'이라고 써 주었어요. 그 때 보모가 헬렌의 여동생을 펌프가로 데리고 왔어요. 헬렌은 '아기'라는 글자를 쓰고 보모를 가리켰지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헬렌이 얼마나 기뻐했다고요. 자기가 만지는 모든 것의 이름을 배웠지요.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는 서른 개의 글자를 더 알게 되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문, 열다, 닫다, 주다, 가다, 오다, 이밖에도 무척 많아요.

(2) 명언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똑바로 정면으로 바라보십시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삶에, 아니 타인의 삶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마음속에는 너무나 많은 악(惡)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과 인간의 마음속에는 크나큰 선(善)도 있다.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 노력하면 삶의 평온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자기 연민은 최대의 적이며, 거기에 굴복하면, 이 세상에서 현명한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4. 주요 저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1903), 낙관주의(1903), 내가 사는 세상(1908), 돌담의 노래(1910), 어둠 바깥으로(1913), 나의 신앙(1927), 삶의 한복판(1929), 황혼의 평화(1932), 스코틀랜드의 헬렌켈러(1933), 헬렌켈러의 일기(1938), 믿음을 가지자(1941), 선생님:앤 설리번 메이시(1955), 열린 문(1957), 헬렌켈러:사회주의자(필립포너 엮음,1967)



답변참고 - 도덕교재연구회 , http://moraldoduk.com/인물학습/헬렌켈러.htm#유적지
답변참고 >> 도덕교재연구회 , http://moraldoduk.com/인물학습/헬렌켈러.htm#유적지

많은 도움 되셨길 바랍니다^^

200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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