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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님
비공개 조회수 3,124 작성일2019.06.19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님께서 하신 주요 활동 3가지만 알려주세여 명언도 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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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케E
물신
30대 남성 연구원 #외국계기업 번역, 통역, 영어작문, 수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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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박은식은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그 이듬해인 1911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 환인현 흥도천에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에서 1년간 머무르면서 ≪대동고대사론≫·≪동명성왕실기≫·≪명림답부전≫·≪천개소문전≫·≪발해태조건국지≫·≪몽배금태조≫를 집필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 각지의 이름난 사람들과 교류를 하다 상해로 와서 1914년 망명 이후 줄곧 써오던 ≪한국통사≫의 집필을 완성하고 이듬해인 1915년에 간행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5]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과정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러면서도 일제에 대한 독립 운동도 중시하여 의병 활동은 정신 역사적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박은식이 쓴 ≪한국통사≫는 중국러시아 지역의 교포 사이들에서 널리 읽혀졌고, 1917년 미국 하와이에서도 출판되어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박은식은 3·1운동을 경험하고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하여 책으로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민족의 이러한 노력은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1919년 10월 15일 그는 국민교육의 연구장려 및 유학생파견, 지도 등의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를 상해에서 조직하였으며,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과 죽음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파벌 싸움으로 인해 대통령으로서 마땅한 사람이 없자,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7월 오히려 임시정부의 정치 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꾼 뒤, 9월 국무위원제의 최고 대표자격인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또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는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회를 폐지했으며, 헌법을 개정하여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최후

그는 한가지 꿈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독립을 보고 광복사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지병을 이유로 사임하였고,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인후염으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가 20년만 더 버텼더라면 광복사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그는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全族)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며, 둘째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모든 수단방략이라도 쓰고, 셋째 동지간의 애증친소(愛憎親疎)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全族)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며, 둘째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모든 수단방략이라도 쓰고, 셋째 동지간의 애증친소(愛憎親疎)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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