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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나중으로 갈 수록...
비공개 조회수 258 작성일2019.06.14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나중으로 갈 수록 친일낌새를 보였던 인물들 좀 알려주세요! 내공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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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바람
우주신 열심답변자
한국사 15위, 정치인, 공무원 13위, 과학 20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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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변절자 이광수 최남선 등이 대표적이죠.

구영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문화대백과사전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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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so****
태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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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朴熙道) / 1889~1951

1918년 6월 감리교 창의문밖 교회 전도사가 되었고 9월 조선기독교청년회 회원부 간사로 취임하였다. 1919년 2월 22일 손병희·최남선·이승훈 등이 한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언하기로 결의하자 기독교 민족주의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참여를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다가 체포되어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2월 출옥한 후 고양군 숭인면 용두리 교회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1922년 1월 김명식 등이 주도한 신생활사 창립에 참여하였다. 신생활사에 자본금 1만 5천원을 기탁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잡지 <신생활>발간을 이끌었다.

기독교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지닌 잡지 <신생활>은 사회주의사상을 비롯한 여타 신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1월호에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것이 빌미가 되어 구속되어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잡지는 발행금지 처분을 당하였다.

1924년 말 출옥한 뒤 독립계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도덕적 인격수양과 경제적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조직된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7년 1월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출판부장을 지냈고 같은 시기 신간회 동경지회 간부(대표회원)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동회(同會) 회보 편집위원을 담당하였으며 10월중앙상무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8년 9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 조선 고아구제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교육과 사회운동에 종사하다가 1934년 사생활과 관련된 스캔들에 휘말려 교장직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1930년대 중반 경부터 전향하여 일제 정책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11월에는 <조선인 징병제도 실시요망> 준비위원에 참여하여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촉구하였다. 1942년 5월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환영하고 감격해하는 감사장을 일본 내각총리, 육해군 대신 등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1939년 5월부터 1944년 6월까지 전쟁협력 외곽단체인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및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참사로 활동하였다. 1941년에 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 회의에도 참여하였다. 이밖에 1937년 9월부터 지방 순회 좌담회와 강연회 등에 참가하여 황민화, 지원병, 학병, 헌납 권장 등을 역설하였다. 이 같은 친일 행적으로 인해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다.

[출처] https://blog.naver.com/2008jsl/221371327917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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