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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공주 독립운동가
alsw**** 조회수 2,275 작성일2017.08.28

공주에 유명하거나 많이 독립운동을 하셨던 독립운동가가 누가 계신가요?? 역사 숙제에염..내공 20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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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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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출신 유명한 독립운동가)


1.오익표 (1888~1922)


오익표는 1888년(고종 25) 6월 8일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공주 영명학교와 서울 감리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동경의 아오야먀학원에 재학 중 1918년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귀국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충청남도 공주 고향에 내려와서 1919년 3월 12일과 15일에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일본 경찰에 쫓기어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7일 상해에서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5월 4일에는 상해한인청년회 내에 청년단을 조직하고 통신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19년 5월 6일의 제4회 임시의정원회에서 오익표는 충청도 구급의연금모집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8월에는 노령의 한민학교에서 조직된 전국청년연합회에서 유영락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오익표 자신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오익표는 소성학교를 설립 운영하다가 노령에서 1922년 10월 15일 34세로 별세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이관직 (1883~1972)


이관직은 1883년(고종 20) 7월 10일 현재의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사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00년(고종 37)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보병과에 입학하여 1903년(고종 40) 9월 20일에 졸업하였다. 1905년(고종 42) 4월 18일부터 육군 보병 참위로 육군연성학교에서 근무하였고, 1907년(순종 1) 4월 30일 육군 보병 부위로서 진위보병 제2대대에서 복무하였다.


군대 해산 후 1907년 유인식 · 김동삼 · 하중환 · 안상덕 · 김기수 등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된 내용의 구국교육으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를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조직하여 일제 침략에 대항하는 구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9월에는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합한 후보지역을 물색하기 휘하여 이회영 · 이동녕 · 장유순 등 4명이 함께 백지장수로 가장하여 간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정착지 선정활동을 하였다. 1911년 봄 신민회에서 지난해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답사 보고에 따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재만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는 한편 조국 광복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창설하였다.


이관직은 이동녕 · 이광 · 윤기섭 · 김창환 등과 함께 군사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담당하였고, 경학사를 조직한 본래의 취지에 따라 육영 영농에 필요한 자금의 조달에 힘썼다. 1916년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자 입국하여 활동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관직은 배재학당의 학생 동원 책임자로 활동 중에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고향인 충청남도 공주로 돌아와 광정성결교회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1972년 10월 19일 89세로 별세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3.강범진 (1907~1981)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1927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가입, 옌지현 라오터우거우 지방 지부책임자가 되어 청년운동을 하였다.


 1928년 지린성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 1929년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에 가입하여 동만주 지방 조직위원이 되어 북간도에서 활약하였다. 또한 독립대원 이춘갑 등 3명을 인솔하여 회비를 징수하려고 출장 중에 계관산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였다. 1932년 항일구국군 총사령부 특무소위에 임명되어 활약하다가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1933년 3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 중국 29군 지하공작대에 입대하여 활약하였고, 1943년 난궁현 감옥파옥에 참가하였다. 1977년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4.김형동 (1895.2.12 ~ 1966.8.29)


별칭은 무동이며, 조선 말기인 1895년(고종 32)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서일 · 현천묵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1916년 북로군정서에 가입한 뒤 김좌진 · 이범석 등과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중국 윈난육군강무학교 기병과를 졸업한 뒤 1925년부터 상하이에서 철혈단 단장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7년 국내로 들어오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일제강점기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광복군 예비대대의 총사령직을 맡아 치안유지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66년 사망하였으며,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인정받아 1986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5.백세기 (1907.9.14 ~ 1999.5.28)


1907년 9월 14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중이던 1926년 여름, 이 학교의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건아단을 조직할 때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건아단은 이 학교에 있던 조선인학생담화회를 조직적으로 발전시켜 탄생한 단체로, 농민계몽과 신사회 건설에 목적을 두고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 지도하는 데 힘썼다.


특히 수원 지역의 여러 마을에 야학을 설립해 농민 의식 고취 및 민족 의식 배양에 주력하였는데, 단군 연호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 뒤 김해농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건아단 출신의 김성원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면서 활동과 조직이 일본 경찰에 드러났고, 결국 1928년 9월 다른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1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1930년 2월 면소 판결을 받았다.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6. 윤여복 (1918.1.2~1950.6.26)


충남 공주 사람이다.


1934년 3월부터 1935년 1월까지 중국 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특별반을 수료하고, 1935년 3월 조선민족혁명당의 특별간부반 군사부원으로 훈련교육을 받으면서 동방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 12월 낙양군관학교를 수료한 후 민족혁명당의 공작원으로 북지와 동삼성을 포함한 중국 각지를 다니며 정보수집과 선전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17.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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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maru
수호신
교육인 #강사 #복지관 한국사 12위, 한컴오피스 36위, MS워드 2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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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공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살펴보면 민족혁명당의 윤여복(尹汝福), 임시 정부 충청도 대표 오익표(吳翼杓),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관직(李觀稙), 항일구국군 특무 소위 강범진(姜范鎭), 철혈단 단장 김형동(金瀅東), 수원농림학교 건아단(健兒團)의 백세기(白世基) 등이 있다.

 

윤여복은 1935년 민족혁명당의 공작원으로 북중국과 동삼성에서 활동하였으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의용군의 군사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오익표는 1919 4월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충청도의원, 상해한인청년회 청년단의 통신부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구한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의 이관직은 신민회가 건설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만주로 망명한 강범진은 독립군 활동에 투신하였는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중국항일구국군에서 활동하였다. 김형동은 1915년 서일, 현천묵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 만주로 건너가 1919년부터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김좌진, 이범석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25년에는 상해에서 테러 운동 단체인 철혈단을 결성하고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백세기는 1926년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하면서 항일 학생 결사 단체인 건아단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 9월 다른 회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8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 2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17.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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