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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구포 출신 독립운동가
비공개 조회수 1,174 작성일2019.06.24
구포 출신 독립운동가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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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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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인물에는 구포출생도 있지만 인근지역에서 태어나 구포방면에서 활동하신 독립운동가들도 많기 때문에 구포출신 독립운동가를 구포 출생으로만 한정짓는 것은 조금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대부분 구포출신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으니 참고해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윤현진 (尹顯振) 1892∼1921 윤현진선생은 구포의 명문집안 출신으로 조선조말 관직을 역임한 윤필은씨의 차남으로 1892년에 태어났다. 7세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5세때(1907) 구포사립구명학교(구포초등학교전신)에 입학, 제1회로 졸업하였고, 20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법대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조선유학생 총무를 맡아 유학생 회장 신익희씨와 백남훈, 장덕수씨 등과 교우를 가졌다. 22세때 명치대학을 중퇴하여 귀국, 이후 1918년까지 양산, 구포, 부산을 무대로 활약하면서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국내외 기밀 연락을 맡아서 활약 하였다. 27세때인 3·1운동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으로 있다가 일본관헌의 수색과 감시가 심해지자 3월말경 동지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4월초에 상해에 도착,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김 구, 신익희선생과 함께 임시의정회 내무위원으로 피선 되었고, 경상도 자금모금위원역을 맡았으며 이어서 7월에 재무위원장이 되었다가 8월 직제개편으로 재무차장(차관급)이 되어 재정실무를 담담하였다. 28세때 김 구선생 등과 의용단을 창단하였고 29세때(1921)과로가 겹쳐 젊은 연령에 별세하였으니, 장례는 임시정부의 국장(國葬)으로 치루어 졌다. 향토출신으로서 상해임시정부의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동분서주 하다가 숨져가신 윤현진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상해에 있던 선생의 유해(遺骸)는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8월 국내로 봉송(奉送)되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 되었다. 상해 임시 정부 설립 당시 윤현진 선생이 기록한 국사일지(國事日誌)가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 윤정은 (尹正殷) 1852∼1920 윤정은 선생은 구포장터 3·1독립만세운동에 68세의 노령(老齡)으로 앞장서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옥중에서 별세하신 분으로 1852년 구포의 대리(大里)에서 태어났다. 구포의 명문 윤씨 집안의 가풍과 명예를 지키며 바른길을 걸어온 선비로서 만년에 한·일 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슬픔과 울분을 삭이지 못하여 평소에 술을 자주 들면서 민족의 운명을 개탄하였다고 한다. 1919년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갈때 우리 고장 구포에도 서울 경선의전에 다니던 화명리 출신 양봉근씨가 구포면 서기 임봉래씨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줌으로써 거사계획이 지역청년들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이에 윤정은 선생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을 찾아가 격려하면서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밤을 세워가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여 구포장날인 3월 29일(음력 2월 28일) 1,000여명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시위 행진 할때 맨앞에 나섰다. 긴급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김옥겸 등 청년 11명이 잡혀가자 일본 순사가 있는 구포주재소까지 청년들과 함께 시위군중을 이끌고 쳐 들어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으로 항쟁했을 때도 앞장섰다가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수비대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갔다. 구포장터 의거에서 42명의 주동자가 재판을 받을 때 윤정은 선생은 본명인 윤길은 대신에 일본제국주의와 바로(正) 맞서서 싸우는 윤정은이 되겠다고 이름을 바꾸어 진술했다고 한다. 그리고 재판정에서 앞에 놓인 책상과 걸상을 걷어차면서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법에 내가 왜 재판을 받아야 하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항거하다가 끝내 기소된 사람중 최고의 형기인 1년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던 것이다. 연로(年老)한 몸으로 그들의 고문에 굽히지 않고 맞서서 싸우다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던 이듬해 1920년 1월 19일 69세의 나이로 옥고를 견디지 못하여 독립을 이루지 못한 한을 품은채 차디찬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양봉근 (揚奉根) 1895∼1990 양봉근 선생은 화명 출신으로 일찌기 신학문과 의학에 뜻을 두고 서울 경성의학전문학교(현재 서울의대)에 진학하였는데 재학 중 3·1독립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때 선생은 의전 학생들과 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그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파급될 때 고향인 동래군 구포로 내려왔다. 같은 화명리에 거주하면서 당시 구포면 서기로 있던 임봉래씨를 찾아가 서울 평양 등지의 3·1독립운동의 실황을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몸에 감추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제시하면서 구포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종용하였다. 이때가 3월 중순 경인데 양봉근선생은 임봉래씨에게 주모급 인사를 모아 협의할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 날 당시 임봉래씨 집으로 가서 청년 유력자 윤경 류기호씨를 만나 이들과 같이 구포지역의 정세를 면밀히 검토한 후 구포에서 하루빨리 거사할 것을 당부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선생이 다니던 경성의전의 생물학 교수로 있던 구보라는 일본인이 강의 도중에 일본민족은 우수하고 한민족은 졸열하다는 망언을 하자 한인학생 2백여명이 총 결속하여 우리 민족을 모욕하는 자에게서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면서 그의 퇴직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전교생이 함께 퇴학원서를 학교에 제출했다. 그때 주모자 양봉근선생은 졸업 3개월을 남기고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후 초지(初志)를 관철하여 시험으로 의사면허를 받아 울산에서 병원을 개업했는데 1927년 주의와 파벌을 초월한 민족 단일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가 조직되어 울산지회장으로 선임 되었다. 뒤에 신간회가 해산되자 그전부터 일경의 주목을 받아오던 선생은 울산에서는 행동하기가 곤란하여 경성 수표동으로 병원을 옮겨 개업하였다. 여기서도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함경북도 회녕(한만 국경도시)으로 옮겨 갔다가 결국 만주 신경 (지금의 장춘)으로 갔다고 한다. 1945년 8·15 광복 후 선생의 소식은 두절되어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는데 한·중 국교 수교 후 장남 양득우씨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불과 몇년 전에 별세하였음을 알게되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 임봉래 (林鳳來) 1890∼1968 임봉래 선생은 1890년 화명에서 태어나 구포면 화명리에 살면서 1919년 구포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 인연을 맺게 된다. 선생은 윤경(尹涇) 선생과 함께 1911년부터 사립화명학교의 교사로 취임하여 근무하였고 1912년 임봉래 선생이 사임하면서 그 후임으로 취임한 분이 양봉근(楊奉根) 선생인데, 임봉래 선생은 화명학교 교직을 물러난 후 구포면사무소에 서기로 근무하게 되었고 양봉근 선생은 서울의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 임봉래 선생과 사립화명학교에 근무하다가 경성의전에 유학한 양봉근 선생이 3월 중순 어느 날 화명리에 나타난 것이다. 양봉근선생은 화명학교에서 친분을 맺은 임봉래선생을 제일 먼저 찾아와 서울 평양의 3·1운동 소식을 상세히 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내 놓고 구포면에서도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선생은 쾌히 응락하였다. 선생은 곧 바로 양봉근씨와 함께 자기 집으로 화명의 윤경(尹涇) 류기호(柳基護)씨를 만나 이 분들과 거사를 의논하게 되었다. 양봉근씨가 서울로 돌아간 후 선생은 본격적인 거사 준비에 들어가면서 구포리의 박영초, 이수연씨 집에서 윤경, 류기호, 김옥겸, 김윤길, 허 정, 김용이, 최종호, 유진영, 윤대근 동지들과 모의를 거듭한 끝에 구포장날인 음력 2월 28일(양력 3월 29일)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밤을 세워가면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각각 수백장씩 만들었고 광목천으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글씨도 준비하였다. 드디어 예정된 구포장날인 3월 29일 정오 동지들과 더불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또 부르게 되었다. 이때 현장으로 달려온 주동인물 11명이 잡혀가자 임봉래 선생은 윤정은, 변봉엽, 허정씨 등과 앞장서서 구포 주재소로 달려가 구금된 동지를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주재소 유리창을 부수고 의자 책상까지 부시는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일본 검찰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선생에게는 다른 수형자처럼 가출옥이나 형 집행유예, 무죄출옥, 은사석방, 면소출옥 등의 혜택을 주지 않고 1년 만기 출옥시켰음이 부산교도소에 보관되어 있는 수형자 카드(42명 중 26명분 보존)에 나타나 있다. 선생은 8·15광복 후 구포장터 3·1만세운동의 역사적 고증을 해준 후 1968년에 별세하셨는데, 정부에서는 그 해에 대통령 표창을 하였다. 그리고 1990년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학자였던 임봉래 선생은 해방 이후 낙동강 하류에서 창립된 낙남시계(洛南詩契)에서 지었던 한시(漢詩)가 전해오고 있다.

● 서영석 (徐泳奭) 1925∼1963 서영석 선생은 금곡동에서 1925년 출생하였다.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에서 중학교에 다녔는데 4학년 때인 1941년 5월 이곳에서 장덕수씨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독립청년당에 입당하였다. 선생은 대판 시내 및 인근 도시에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과 청년을 대상으로 당원포섭 조직의 임무를 띠고 활약하던 중 1941년 10월 일경에 탐지되어 대판부내 조선인 학생 일제 검거가 있을 때 이 기미를 재빨리 눈치채고 동경으로 피신 하였다. 이때 많은 동지들이 피검되어 투옥되었는데 그후 장덕수씨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1942년 선생은 대판으로 돌아와서 검거 선풍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든 동지들을 규합하라는 옥중의 장덕수씨 지령을 받고 활동을 하였다. 1943년 일시 귀국하려고 시모노세끼에서 당시 관부연락선을 탔는데 마침내 미행하던 일경 형사에게 체포되어 대판으로 압송되었다. 오랜 예심 끝에 1944년 8월 27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언도 받고 대판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나고 조국은 일제에서 광복이 되었으나 선생은 옥중에서 안타까운 나날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5년 9월 5일 일본에 진주한 미군 맥아더 사령부의 정치범 석방령에 의하여 출옥하였다.(부산 중부경찰 박유수서장 입증) 출옥 후 선생은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는데 1963년 6월 25일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조국 광복에 대한 공적이 인정이 되어 정부에서는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옥겸 (金玉兼) 1892∼1957 김옥겸 선생은 1892년 김해군 하동면(대동면)에서 출생, 성년이 되어 구포에 와서 살았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으로 앙앙불락하던 차에 동년 3월 하순경 당시 구포면 서기였던 임봉래씨와 구포 애국유지 윤경, 류기호씨를 만나 구포에서 독립만세 의거를 한다는 말을 듣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거사를 준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29일 예정된 구포장날 모여드는 장꾼에게 독립선언서, 태극기 등을 몰래 나누어 주고 정오에 선생은 주동 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구포장에서 장꾼 1천여명과 더불어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불렀다. 애국군중의 독립만세 소리는 구포시장을 삽시간에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로 만들었는데 선생은 김윤길씨 외 수명과 함께 구포면 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을 만나 ‘너는 한국인인데 왜 오늘의 시위운동에 가담하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곧 참가하라?’고 외치면서 대나무 회초리로 책상을 치면서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온 일경에게 김옥겸선생은 다른 주동 인물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되어 구포주재소로 끌려갔다. 선생을 위시한 주동인물들이 체포됨으로 해서 그날 오후에 있은 애국군중의 시위에 기름 역할을 하여 더욱 가열하게 하였다. 선생은 같이 체포된 동지와 뒤에 검거된 동지 등 42명과 같이 부산감옥에 투옥되어 1919년 7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부산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1923년 5월 일본 고오베에서 예비검속을 당한 바 있어 귀국하였다. 한동안 양산의 김철수(2·8독립선언 서명자의 한 사람)씨와 교우하다가 만주로 갔다가 정의부에 가담하여 일제가 만주를 유린할 때까지 6년간 독립전선에서 활약하였다. 8·15 광복 후 선생의 공적이 인정되어 정부에서는 독립훈장 애족장을 촉서하였다.

● 허치옥 (許致玉 1884∼1924) 허치옥 선생은 구포에서 태어나 1919년 전국적인 3·1독립운동이 전개될 때 서울의 경성의전에 다니던 양봉근으로부터 3·1운동의 상황과 정세를 전해듣고 임봉래씨 등 다른 동지들과 협의하여 구포장날 만세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해 내었다. 장꾼들과 함께 격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주동인물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가자 구포주재소에 달려가 구금되어 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선생은 유리창을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데 앞장서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부산감옥에 투옥되었다. 당시 부산지방법원의 재판에서 주동자 중 많은 형벌인 지역 1년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을 한 후 귀가해 보니 감옥에 있는동안 사랑하는 딸이 나루터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거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투옥 중 고문 등의 후유증과 겹쳐서 정신적인 쇠약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낙동강변에서 죽은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강으로 뛰어들다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김달수 (金達洙) 1888∼1924 김달수 선생은 1888년 구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 서당에서 《천자문》, 《명심보감》, 《논어》, 《맹자》 등을 배울 때도 항상 우등을 차지하여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또, 일제가 서서히 침략의 손길을 뻗쳐오던 암울한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선생은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치욕의 소식을 접하고는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상업중심지 구포에도 서울의 3·1운동 소식과 아울러 독립선언서가 전해졌다. 3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임봉래, 윤경, 유기호를 중심으로 시작한 거사 모의에 당시 구포에서 미곡상을 경영하고 있던 김달수 선생도 이곳 청년유지들과 함께 솔선 참여하였다. 청년들은 모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예정된 장날, 주동인물들은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미리 비밀리에 나누어 가지고 그날 정오 구포장터에서 장꾼 1천여 명과 더불어 죖대한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하였다. 장터는 삽시간에 흥분과 감격과 도가니로 화하였다. 이때 김옥겸 외 11명의 주동인물이 현장에서 경찰에 검거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를 본 임봉래, 윤정은, 변봉엽, 허정 등이 구금된 애국동지를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군중을 지휘하여 주재소로 돌진해 갈 때 김달수 선생도 다른 청년유지들과 함께 앞장섰다. 때는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격노한 군중들은 주먹과 곤봉으로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또 투석으로 대항하였으며, 일부 청년들은 주재소 안으로 뛰어들어가 구금된 애국동지들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의자, 책상은 부숴지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일군경들은 군중들에게 무자비한 총탄을 퍼부어 군중들은 할 수 없이 물러서야 했다. 이 항쟁에서 일군경 3명(경찰1명, 헌병 2명)과 한국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애국군중들 중에는 9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구포장터에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주동인물은 42명에 달하였으며, 선생은 다른 주동인물들과 함께 거사직후 피체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동년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인 1920년 4월 28일 석방되었으나, 고문과 옥고 여독으로 약 3년 간 고생하다가 1924년 36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윤장수 (尹章守) 1895∼1958 윤장수 선생은 1895년 화명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9년 3월 29일 구포장에서 장꾼 1,0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는데 앞장 섰다.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치면서 시위를 계속하자 급히 나타난 일경이 11명의 주동자를 붙잡아갔다. 이에 선생은 붙잡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장꾼들의 앞장을 서서 주재소를 돌진해 갔다. 주재소의 유리창과 의자와 책상 등을 부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일본 군경들이 무차별 총격을 벌였고 이때 선생은 피체되었다. 이 거사로 인하여 잡혀간 선생은 징역 4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루었는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양태용 (梁太鎔) 1893∼1937 양태용 선생은 금곡동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의거에 뛰어들어 장꾼 1천여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경에 의해 주동인물이 붙잡혀가자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장꾼들을 지휘하여 주재소로 달려가 유리창을 파괴하고 의자와 책상 등을 부수는 등 앞장서서 시위를 벌이다 일본군인과 경찰들의 무자비한 총격에 밀려 선생은 체포를 당했다. 선생은 이 거사로 인하여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을 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윤경봉 (尹敬奉) 1897∼1941 윤경봉 선생은 구포에서 윤정은(尹正殷)씨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윤정은씨가 구포장터 3·1독립만세 시위에 노령(老齡)으로 앞장서자 젊은 나이로 따라 나서서 주동적으로 거사에 참가하였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여 구포장날인 3월 29일 장꾼들과 시위행진을 할 때 아버지와 함께 앞장섰고 긴급출동한 일본경찰이 12명의 주동자를 붙잡아 가자 시위 군중의 대오를 정비하여 주재소로 달려갔다. 선생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의자 책상 등 기물들을 부수는데 앞장서다가 일본 군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밀려나와 연행되어가 재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징역 1년 3개월을 받은 부친과 함께 옥살이를 해야했다. 그리고 일제의 심한 고문에 부친이 옥사(獄死)하는 슬픔을 맛보았고 옥에 갇혀 있어 형들과 함께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불효(不孝) 아닌 불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은 출옥을 한 후 모진 감옥생활에서 얻은 병 때문에 고생하다가 운명하였다. 정부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박도백 (朴道伯) 1892∼1939 박도백 선생은 김해군 대저면 출두리에서 1892년 태어났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선생은 1919년 3월 29일 구포장날 장터에서 구포의 청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앞장서서 투쟁하였다.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시위를 벌이자 허겁지겁 달려온 일본 경찰이 김옥겸씨의 11명의 주동자를 잡아갔는데 선생은 장꾼들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유리창, 의자, 책상 등을 부수며 구금되어 있는 동지들을 구출하려 하였다. 이때 일본 군경이 몰려와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는데 그래도 선생은 더욱 앞장서서 더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항쟁에서 선생은 전신에 9발의 총탄을 맞았는데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선생은 재판에서 윤정은 선생과 더불어 1년 3개월이라는 최고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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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구포 출신 홍상철 독립운동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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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

윤 경선생은 화명 출신으로서 어릴 때 임천재 사숙에서 한학을 배웠고 이어서 1908년에 설립된 사립화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10년 화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근무 중 당시 경상남도 사립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1918년 화명학교가 구포공립보통학교에 통합될 때까지 후학을 가르쳤다. 그때 윤 경선생이 학교에 근무하면서 기록한 1917년도 교무일지(校務日誌)가 남아 있어 그 당시 민족학교의 운영실태를 알게해 주고 있다.

그리고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사립화명학교에 근무하면서 썼던 일기(日記)가 전해온다.

선생은 1919년 화명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임봉래, 양봉근씨와 함께 구포장터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후 향토를 지키면서 1924년 대천청년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맡아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지만 자력경생을 위해 청년 계몽운동을 벌였다.

주야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가르쳤고, 농촌문고를 창설하여 책읽기를 권장하면서 저축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농한기에 음주 도박 등 잡기 없애기 운동을 벌였다.

윤 경선생은 한학자로서 8·15광복 이후 낙동강 하류지역의 한학자들이 모여 결성한 낙남시계에 참여하여 많은 한시 작품을 남겼다.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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