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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흔하지 않은 독립운동가 1명의 일생...
성관철 조회수 2,082 작성일2019.05.22
흔하지 않은 독립운동가 1명의 일생 손글씨로 A4 6쪽 나오게 알려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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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헤이그 특사로 역사책에 나오긴 하지만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아닐까요?)
1. 간단한 연표
1870년, 충북 진천군 출생.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 학교 설립.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고종의 밀명을 받고 파견됨.

1909년, 이승희 등과 북만주 밀산부에 독립 운동 기지인 한흥동 건설.

1910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 결성 참여, 성명회를 조직, 한일 합병 반대하는 독립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과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 발표.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 단체 권업회를 조직.

1914년, 이동휘 등과 함께 연해주 지역에서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우고 정통령 취임.

1915년, 상해에서 신한 혁명당 박은식 등 과 함께 설립

1917년, 니콜라스크에서 사망.

1870년, 진천에서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났습다. 당시에는 아들이 없는 경우 대를 잇기 위해 아들뻘 항렬의 집안 아이들 중 총명한 아이를 골라 양자로 들이는 경우가 꽤 흔했는데, 이상설 역시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됐습니다. 스무 살에 이미 학자로 명망이 있었고, 스물 다섯에 조선 마지막 과거인 갑오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됐는데, 겨우 27세였습니다. 성균관 대사성에 서른도 안 넘긴 청년이 임명됐다는 소리입니다. 탁지부 재무관이 되며 이 시기에 호머 헐버트와 가까워져 근대 학문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주로 연구했던 근대 학문은 수학과 화학, 법학 쪽으로 보이며, 수학의 이치와 연구를 이르는 '수리'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근대 학문은 거의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특히 국제 정치와 법률의 대가로 통해 대한매일신보는 “이상설은 원래 대한 학문학의 제일류니 재성이 절륜하고 조예가 심독하여 동서학문을 실개통효 연정”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대신회의 실무자였으므로 조약 체결 저지를 시도했으나 일본군에 가로막혀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고, 참정 대신 한규설과 목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을사 늑약은 고종의 정식 인준 절차를 거친 조약이 아니었는데, 이상설은 고종에게 같은 상소를 다섯 번이나 올려 "을사 늑약은 인준해도 나라가 망하고 인준 안 해도 망한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나라와 같이 죽는 게 낫지 인준하시면 안 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 해 11월 30일 민영환이 순국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종로 거리에 나가 시민들을 상대로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서자는 연설을 한 뒤 땅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으나 주변 시민들이 뜯어말려 실패했습니다.

이상설은 1906년 국외 망명을 결정하고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연해주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만난 뒤 다시 만주로 떠납니다. 8월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직접 수학을 가르쳤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07년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1907년 고종은 용정촌에 있는 이상설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정사로 파견합니다. 이상설은 부사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로 떠났으나 일제의 방해로 공식 참석 국가 명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석사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상설은 7월 5일 회의장에서 호소문을 발표합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이 실패한 뒤 1908년 미국을 순방하며 한인 교포를 결속시키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 동지 대표회에 연해주 한인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이듬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러시아-만주 국경 지방에 독립 운동 기지 한흥동을 건설했습니다. 1910년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했습니다. 퇴위당한 고종에게도 13도의군의 편성을 상주하고 도총재 유인석과 함께 고종 망명을 시도했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 합병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독립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 을 발표하고 미국, 러시아, 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 주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고, 러시아는 성명회와 13도의군 주요 인물 42명을 체포했습니다.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신한촌에서 다시 권업회 의장으로 선출됐습니다. 권업회는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했으며, 교민 지위 향상과 반일 투쟁을 위한 경제적 실력 배양, 민족 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권업회는 활발한 활동으로 인근의 거의 모든 한인 거주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1914년 회원 수 8,500명에 달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상설은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중국, 러시아 제국령 내 한인들을 규합해 이번에는 아예 한일 합병 후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출됐습니다. 그러나 권업회는 러시아 정부의 공인을 받았던 처음과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일본의 항의로 러시아 당국에 강제 해산 당했습니다.

이후 이상설은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 초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누웠으며,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겼지만 끝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했습니다.


상당히 길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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