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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수원의 화보가 뭐에요?급해요!!!
sse2**** 조회수 3,133 작성일2011.01.03

안녕하세요.

제가 방학숙제로 수원의 화보를 알아가야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화보라는 것도 모르고,

수원의 화보도 몰라요.

좀 알려주세요...

부탁이예요.

내공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밖에 없어서...

넘 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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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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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서 만든 책을 화보라고 해요.

 

그러니까 수원의 화보라고 하면수원의 행사 장면(축제 등)이나 문화재 등 수원에서  자랑할만한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책으로 만드는 것을 말해요. 

 

아래에 수원의 축제와 수원의 문화재를 올려드릴께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숙제 잘하시고 즐겁게 방학 보내세요^^

 

(수원의 축제)

 

1.수원화성문화제

 

* 지역별 경기도 수원시

* 주최/주관기관 수원시/수원화성문화제집행위원회

* 최초 개최년도 1963

* 개최기간  2010년 10월 8일~10월 10일(3일간)

* 축제 성격 문화예술

* 장 소  화성일원 및 주요시가지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조선 제22대왕 정조가 축조한 “화성”과 정조대왕의 부모님에 대한 “효”를 기리고자 하는 전통문화 축제

 

▶ 지역의 좋은 점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있는 전통 문화 관광도시이다.

 

▶ 축제행사종목

o 전야제(개막공연)

o 음식축제(수원양념갈비축제)

o 체험행사(궁중문화체험, 화성축성체험, 상설 체험행사)

o 재현행사(정조시대 야간군사 훈련, 장용영 수위 의식, 정조대왕 뮤지컬)

o 해외자매도시 민속공연

o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 및 시민퍼레이드 등

 

 

 

2.효의 성곽순례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조명하고 조선조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을 이어 받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효의 근본을 일깨우고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우수성을 알리기 위하여 매년 효의 성곽순례를 하고 있다.

 

○ 일 시 : 매년 5월 5일
○ 순례구간 : 신풍초등교 - 팔달문 - 서장대 - 화서문 - 장안문 - 화홍문 - 연무대
○ 주 관 : 수원문화원 (031-244-2161)
○ 행사내용 : 화성 성곽순례, 어린이날 큰 잔치, 기타 문화예술 부대행사

○ 지역의 좋은 점 : 정조의 효가 깃들어 있는 도시이다.

 

 

 

3.수원여름 음악축제

 

* 지역별 경기도 수원시

* 주최/주관기관 수원문화원/수원시

* 최초 개최년도 1988

* 개최기간 2009.8.11-8.14(4일간)

* 축제 성격 문화예술

* 장소: 수원야외음악당 , 만석공원 야외음악당

 

▶ 축제의 유래 및 특성

o 계속되는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을 국악과 교향악, 합창, 가요, 퓨전음악 등

o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의 세계로 안내해 한여름 밤의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야외 음악축제임

 

▶ 지역의 좋은 점

o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의 왕권강화와 정치적으로 희생된 부왕 사도세자 융릉참배와 모친인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 행사내용

개막공연(라이브),국악공연, 클래식,OST공연, 락음악공연

 

 

 

4.수원화성 국제연극제

 

1996년도 수원 화성 축성 2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시작된 수원화성국제연극제는 최고의 규모와 권위를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국제 종합예술제로서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화성행궁을 주무대로 한 야외공연과 실내ㆍ기획ㆍ부대공연 등 다양하고도 수준높은 공연을 제공하여 관람객 및 축제에 대한 관심도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되고 있다.

 

○ 기 간 : 2010년 8월 14일~22일 (9일간)

○ 장 소 : 화성행궁, 수원야외음악당, 장안공원, 경기도 문화의전당 등

○ 주 제 : 자연, 성, 인간

○ 내 용 : 엄격한 작품선정을 통한 국내외 20여개의 연극공연

○ 지역의 좋은 점 :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있는 도시이다.

 

 

 

(수원의 문화재)

 

1.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면 적 188,04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화성행궁


종 목  사적  제478호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4.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종 목 보물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시 대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5.팔달문


종 목  보물  제402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 등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6.화서문


종 목  보물  제403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25-2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7.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시 대 조선시대


안채·바깥채·헛간·광이 울안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고종 25년(1888)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집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른다. 주변에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옛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으로 부엌·대청·안방·건넌방으로 되어있다. 초가인 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동편의 끝칸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바깥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배치형태이며, 이 마을의 대부분 집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방은 위아랫방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하였고 대문만이 부엌을 향하였다. 마당 앞에는 헛간·외양간이 있다.

 

바깥마당 맞은편의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 연대를 보인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쪽으로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살렸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8.노송지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9호

지 정 일 1973.07.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이목동·송죽동·정자동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수원의 노송지대는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있는 지지대고개를 시작으로 옛날 경수국도를 따라 소나무들이 길 양편에 늘어서 있는 약 5㎞ 구간을 말한다.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개인용도의 내탕금 1,000냥을 하사하여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대부분 말라죽고, 38그루 정도의 노송만이 살아 남아 있으나, 아직도 긴 가지가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가 울창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수원의 노송지대는 수원화성과 함께 수원시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픈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9.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 김준용(?∼1641)이 중국 청나라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한 비가 있는 곳이다.

 

김준용은 선조 41년(1608)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에서 중국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지방관과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죽은 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조 18년(1794) 수원성 축성의 총 책임을 맡았던 영의정 채제공이 그의 업적을 전해듣고 전승터였던 광교산 바위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10.심온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3호

지 정 일 1979.09.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13-1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 안효공 심온(?∼1418)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 왕조 건국에 참여하였다. 태종 11년(1411)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포악한 정치를 일삼던 박영우를 파직시키고 대사헌이 되어 관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이 되었다. 태종 18년(1418)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은 국왕의 장인으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 등이 거짓으로 꾸민 사실이 후에 밝혀지게 되어 세종은 관직을 복직시키고 안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석등과 좌우에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안평대군이 글을 쓴 묘비가 있다. 묘역 아래에는 9대손 심하단이 글을 짓고 서명균이 글씨를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11.팔달산 지석묘군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1.10.1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산3-1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남쪽 기슭에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8m이고 두께가 0.45m이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쪽 기슭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평평한 구릉 위에 1호·2호 고인돌이 서로 가까이 있다. 이로부터 위로 100m쯤 떨어진 곳에 3호·4호가 있는데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고 옆에 덮개돌로 보이는 돌이 흙속에 묻혀 있다. 

 

12.아담스기념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

지 정 일 2001.01.2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0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말 수원지방에는 감리교가 들어오면서 수원과 남양 지역의 교회들이 많은 남녀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이 지역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삼일학교의 아담스 기념관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국 아담스(Adams) 교회 신도들의 온정으로 신축되었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W.A.Noble) 목사는 삼일학교가 설립초부터 교사도 없이 중포산 기슭의 교회 건물에 더부살이하고 있어 고통을 겪는 딱한 사정을 아담스 교회에 호소하였고, 교인들이 교사의 건립기금으로 20,000엔을 노블 목사를 통해 삼일학교 측에 전달하여 1923년 새 교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당시 교회의 신축 설계는 미국 아담스 교회 선교부에서 하였으며 공사는 중국인 왕영덕이 맡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새 교사인 고 최태영 기념관을 건립할 때까지 교실과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나 이후에는 삼일중학교의 본관으로 교장실과 교무실, 채플실, 기도실 등으로 사용하였다.

 

1988년에는 현관 부분을 수리하였고 1층 내부에 강관 기둥을 설치하여 보강하였으며 1997년에는 건물의 안전도와 결로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1층을 미술과 특별교실과 방송실, 창고 등으로 쓰고 있으며 2층에 화장실을 증축하여 재단사무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농구부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스 기념관은 우진각지붕의 2층 벽돌조 양옥으로 건물 한쪽에 치우쳐 현관이 위치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고 1,2층은 적벽돌로 벽체를 쌓았으며 층간에 목조 마루틀을 설치하여 바닥을 꾸몄다. 지붕은 벽체 위에 목조 트러스(truss)를 올리고 널판을 깔아 함석판을 올린 구조이다. 수원지역에 세워진 기독교 선교학교(mission school)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음을 고려해볼 때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함.

  

 

13.수원축만제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축만제둔의 관개시설로 만들어졌다. 정조23년(1799) 정조는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만제를 만들게 하고 수문 2곳을 갖추었다. 몽리면적은 232두락으로 화성 주변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으며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뒤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로 불리고 있으며 서호에 비치는 낙조로 유명하다.
  

 

14.여기산 선사유적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1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6-1외 
시 대 청동시대


여기산유적은 서호 서쪽의 구릉에 있다. 1979~1984년까지 4차에 걸쳐 숭실대학교박물관에서 유적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경질무문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원삼국시대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터의 시설 중 특징적인 것은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 시설이 확인되었고, 서까래와 볏집 지붕이 조사되어 당시의 가옥구조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용구인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거지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어 서호 일대 주변 저습지대에서 벼농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갔음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수원지방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5.수원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4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동시에 담당하였다.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던 수원향교는 조선 정조 19년(1795)경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향교는 앞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3칸에 문을 달았고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고 동무와 서무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제사 의례에 적합하도록 앞면에 개방된 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01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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