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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수원의 무형문화재와 유형문화재
비공개 조회수 8,229 작성일2012.07.09

안녕하세요??? (꾸벅) 저는 초딩3학년인디요.......     수원의 무형문화재와 유형문화재를 알아오는 것이 숙제에요.. 도와주실꺼죠???헤헤... 그런데 조건이 있어염^^ 많을 수도 있구요...

 

그림이나 표를 넣어 설명해주시면 좋구요

 

욕설 음란 금지!!

 

1. 유형 문화재를 알려주세요

2. 무형 문화재를 알려주세요

 

내공 5겁니다.

 

조금 드려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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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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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유형문화재)

 

1.수원 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화성행궁


종 목  사적  제478호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4.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종 목 보물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시 대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5.팔달문


종 목  보물  제402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 등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6.화서문


종 목  보물  제403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25-2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7.퇴우이선생진적

 

종 목  보물  제585호 
지 정 일 1975.05.0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서화가인 이황(1501∼1570), 송시열(1607∼1689), 정선(1676∼1759), 정선의 아들 정만수, 이병연(1671∼11751), 임헌회(1811∼1876), 김용진(1883∼1968) 등의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아 연대순으로 묶어낸 서화첩이다.

 

모두 8엽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의 순서를 보면, 제1엽은 퇴우이선생진적이라는 그림과 표지글이 있고, 그 뒷면과 제2엽 앞면에 정선의 계사정거도가 그려져 있다. 제2엽 뒷면에서 제4엽 앞면에는 이황의『회암서절요서』가 쓰여있다. 제4엽 뒷면과 제5엽 앞면에는 송시열의 글이 있다. 제5엽 뒷면, 제6엽 앞뒷면에는 정선의 그림인 무봉산중, 풍계유택, 인곡정사 등이 그려져 있다. 제7엽 앞면에는 이병연의 칠언절구 시와 년기, 서명, 낙관 등이 있고 제8엽 앞면에는 임헌회의 글과 김용진의 글 등이 있다.

 

이 서화첩의 속종이는 닥나무 종이이며, 겉종이는 두터운 종이로 만들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모두 뛰어난 문장과 그림이어서 학자들의 인격과 서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8.채제공 초상화(시복본)

 

종 목  보물  제1477-1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선경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이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작)>은 채제공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9.박유명 초상

 

종 목  보물  제1489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역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박유명(1582∼1640)은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그 뒤 당상선전관을 거쳐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박유명 초상>은 낮은 오사모를 쓰고 과장된 둥근 어깨를 하고 있으며 단령이 뒤로 뾰족하게 뻗친 모양, 바닥의 채전 등에서 17세기 공신 도상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 초상과 함께 후대의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 이모본은 거의 동일한 형상이며 안료는 보다 선명하다.

 

<박유명 초상>은 17세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모본의 경우는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지므로 원본 1점만을 지정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70 x 88.3cm 

 

10.영조어필-읍궁진장첩


종 목  보물  제1631-3호 
지 정 일 2010.01.0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창룡문길 443번지 
시 대 조선시대


이 서첩은 영조(1694~1776)의 여러 어제어필을 모은 것이다. 겉표지에 “영조어필 읍궁진장”이라 쓰여 있는데, 읍궁이 송시열의 은거처였던 괴산군 화양구곡의 제3곡 읍궁암과 어떤 관계인지는 미상이다.

 

서첩 앞쪽에 “1761년 정월 16일에 내의원에 답한다”는 부전지가 있는 비답을 비롯하여 사언시고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사언시고 중에 1770년(영조 46)7월 11일에 쓴 ‘서시옥당’은 충자(세손 정조)와 옥당(홍문관) 관원에게 내린 것으로 『임하필기』에 관련내용이 보인다.

 

또 그때 썼을 것으로 보이는 ‘학사관’ 대자도 실려 있다. 이 어필첩은 영조어필을 모은 몇몇 서첩 가운데 수록 필적이 정선되고, 영조 노년인 1761년, 1765년, 1770년의 연대가 있으며, 조선후기 궁중장황으로 꾸며지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어필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11.박태유 필적 백석유묵첩


종 목  보물  제1675호 
지 정 일 2010.10.25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백석유묵첩》은 17세기 후반의 문신ㆍ명필 박태유(1648-86)의 필적으로 다양한 크기에 여러 서체로 쓰여 있다. 해서ㆍ행초ㆍ광초ㆍ예서ㆍ행서가 실려 있으며 그중 해서는 소해ㆍ중해ㆍ대자서로 다양하다. 특히 칠언배율의 시를 중자 해서로 쓴 글씨는 그가 안진경 해서풍을 적극 가미시켰음을 보여준다. 또 행초를 섞어 쓴 칠언절구는 아버지 박세당의 서풍을 따랐는데 그 바탕은 안진경의 행초 필적에 가깝다. 또 한 면에 두 글자씩 대자 초서로 쓴 “사지격절”ㆍ“이식현오”는 광초의 대가 당나라 회소(8세기 활동)의 서풍을 연상하게 한다. 이밖에 예서로 쓴 “서유육의”는 한자의 조자원리에 관한 기본개념인 육서(육의)란 점에서 이채롭다.


이상과 같이 이 서첩은 박태유의 서예적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는 예로 필사한 연유나 시기, 글씨를 받은 사람의 이름 등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의 글씨학습을 위하여 써준 것으로 여겨진다.

 


 12.방화수류정

 

종 목  보물  제1709호  
지 정 일 2011.03.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1번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정조 18년(1794) 건립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전시용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 방화류과전천”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1725~1799)의 글씨이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되었다.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3.서북공심돈

 

종 목  보물  제1710호  
지 정 일 2011.03.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2번지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의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정조 20년(1796)에 건립되었다.

수원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측 성벽에서 돌출시켜 남측면의 일부만 성곽에 접하고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3층 구조로 하부 치성은 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1층과 2층 외벽과 3층 하부는 전돌로 쌓았다.

1, 2층 각 면에는 6개의 총안이 있으며, 3층에는 여장을 쌓고 같은 높이에 4개의 총안을 내었다. 3층 포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전안이 설치되어 있다.

치성의 북측면과 서측면에는 각 2개소의 현안을 두어 성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하부는 성벽의 석재를 오목하게 “∪”자형으로 가공하여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되게 하였다.

수원 서북공심돈의 성제는 현존 성곽 건축에서는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재료의 유연성과 기능성이 우수하며,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 공심돈의 전돌 축조 기법, 현안과 총안, 전안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14.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시 대 조선시대


안채·바깥채·헛간·광이 울안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고종 25년(1888)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집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른다. 주변에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옛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으로 부엌·대청·안방·건넌방으로 되어있다. 초가인 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동편의 끝칸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바깥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배치형태이며, 이 마을의 대부분 집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방은 위아랫방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하였고 대문만이 부엌을 향하였다. 마당 앞에는 헛간·외양간이 있다.

 

바깥마당 맞은편의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 연대를 보인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쪽으로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살렸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15.지지대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47-2

시 대 조선시대


서울에서 수원으로 오는 길의 제일 먼저 이르는 고개에 서 있는 비로, 조선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고 있다.

 

정조는 화성(지금의 수원)에 있는 부친의 능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면, 항상 이 고개에서 가마를 멈추고 능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그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그곳에 돌을 쌓아 작은 대를 만들어 느릴 지자 두 자를 붙여서 ‘지지대’라 이름하였다. 이 후 고개이름도 지지대 고개로 바뀌었으며, 순조 7년(1807) 그의 효성을 전하자는 신현의 건의에 따라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비문은 홍문관제학으로 있던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수원유수를 지내던 홍명호가 썼다. 현재는 비각을 지어 모시고 있는데, 부친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듯 하다.

 

 

16.팔달문 동종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76.07.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팔달문 2층 누각에 걸려있는 높이 123㎝, 입 지름 75㎝ 크기의 동종을 이전한 것이다. 종을 매다는 용뉴에 1마리 용을 조각하였고, 그 아래 약간 오무라든 종의 몸체를 연결하였다.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을 준다. 용뉴에는 활짝 핀 꽃을 생동감있게 장식하였으며, 종의 위쪽에는 2단으로 정사각형의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띠에 잇대어 4곳에 유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유곽 둘레에 덩굴무늬를 새겼다. 돌출된 9개의 유두는 보상화무늬로, 가운데 1개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종의 중간에는 이 종에 관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고, 아래쪽에 보상화와 덩굴무늬를 새긴 띠가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고려 문종 34년(1080)에 개성에서 만들었고, 조선 숙종 13년(1687)에 만의사 주지 도화승이 불교 의식에 사용하고자 다시 주조하였다고 한다.

 

이 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용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7.봉령사 석조삼존불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령사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봉령사 대웅전 뒤편 언덕에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출토된 삼존불이다. 삼존불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하다.

 

각각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를 가지고 있으며, 1구는 좌상이고 2구는 입상이다. 앉아 있는 본존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은 민머리에 양쪽 귀와 목이 짧으며, 돌이 닳아서 희미하게 보이지만 얼굴은 원만한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두 협시불 역시 본존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옷주름을 잡고 있는 점이 다르다.

 

각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봉녕사 불화(신중탱화.현왕탱화)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녕사 
시 대 조선시대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한 종류이다. 봉령사 약사전 안에는 2폭의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데, 신중단에 모셔둔 신중탱화 1폭과 현왕단에 모셔둔 현왕탱화 1폭이 그것이다.

 

신중탱화는 가로 168㎝, 세로 17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그림은 위쪽에 제석과 범천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아래쪽에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신장과 용왕, 금강상 등을 그려놓았는데, 각 상들의 배열과 채색이 우수한 조화를 이룬다. 제석과 범천은 석가불을 보좌하는 보살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의 성격을 띤다. 위태천은 남쪽을 지키는 여덟 장군 중 하나로 역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그림의 내력을 적은 기록으로 보아, 조선 고종 28년(1891) 화사 광조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왕탱화는 가로 131㎝, 세로 104㎝의 크기로, 역시 비단에 채색하였다.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재판을 하는 현왕과 그 무리들이 묘사되며, 시왕도와 거의 비슷한 배열을 하면서 지옥 장면만 생략한다. 이 그림 역시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판관·녹사 등을 배치하였는데, 약사전에 함께 걸려 있는 다른 탱화들과는 구도나 채색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폭 아래쪽의 기록을 통해 고종 15년(1878) 화사 완선이 제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19.청련암 영산회상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영산회상도의 불화승은 19세기 전반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불화승이며 경기도 지역의 불교회화와 불화승의 계보를 밝힐 수 있는 작품이다. 전각 내부를 꽉 차게 배치한 화면의 크기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다.
  

 

20.노송지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9호

지 정 일 1973.07.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이목동·송죽동·정자동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수원의 노송지대는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있는 지지대고개를 시작으로 옛날 경수국도를 따라 소나무들이 길 양편에 늘어서 있는 약 5㎞ 구간을 말한다.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개인용도의 내탕금 1,000냥을 하사하여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대부분 말라죽고, 38그루 정도의 노송만이 살아 남아 있으나, 아직도 긴 가지가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가 울창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수원의 노송지대는 수원화성과 함께 수원시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픈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21.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 김준용(?∼1641)이 중국 청나라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한 비가 있는 곳이다.

 

김준용은 선조 41년(1608)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에서 중국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지방관과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죽은 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조 18년(1794) 수원성 축성의 총 책임을 맡았던 영의정 채제공이 그의 업적을 전해듣고 전승터였던 광교산 바위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22.심온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3호

지 정 일 1979.09.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13-1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 안효공 심온(?∼1418)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 왕조 건국에 참여하였다. 태종 11년(1411)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포악한 정치를 일삼던 박영우를 파직시키고 대사헌이 되어 관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이 되었다. 태종 18년(1418)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은 국왕의 장인으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 등이 거짓으로 꾸민 사실이 후에 밝혀지게 되어 세종은 관직을 복직시키고 안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석등과 좌우에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안평대군이 글을 쓴 묘비가 있다. 묘역 아래에는 9대손 심하단이 글을 짓고 서명균이 글씨를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23.팔달산 지석묘군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1.10.1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산3-1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남쪽 기슭에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8m이고 두께가 0.45m이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쪽 기슭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평평한 구릉 위에 1호·2호 고인돌이 서로 가까이 있다. 이로부터 위로 100m쯤 떨어진 곳에 3호·4호가 있는데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고 옆에 덮개돌로 보이는 돌이 흙속에 묻혀 있다. 

 

24.아담스기념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

지 정 일 2001.01.2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0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말 수원지방에는 감리교가 들어오면서 수원과 남양 지역의 교회들이 많은 남녀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이 지역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삼일학교의 아담스 기념관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국 아담스(Adams) 교회 신도들의 온정으로 신축되었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W.A.Noble) 목사는 삼일학교가 설립초부터 교사도 없이 중포산 기슭의 교회 건물에 더부살이하고 있어 고통을 겪는 딱한 사정을 아담스 교회에 호소하였고, 교인들이 교사의 건립기금으로 20,000엔을 노블 목사를 통해 삼일학교 측에 전달하여 1923년 새 교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당시 교회의 신축 설계는 미국 아담스 교회 선교부에서 하였으며 공사는 중국인 왕영덕이 맡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새 교사인 고 최태영 기념관을 건립할 때까지 교실과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나 이후에는 삼일중학교의 본관으로 교장실과 교무실, 채플실, 기도실 등으로 사용하였다.

 

1988년에는 현관 부분을 수리하였고 1층 내부에 강관 기둥을 설치하여 보강하였으며 1997년에는 건물의 안전도와 결로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1층을 미술과 특별교실과 방송실, 창고 등으로 쓰고 있으며 2층에 화장실을 증축하여 재단사무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농구부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스 기념관은 우진각지붕의 2층 벽돌조 양옥으로 건물 한쪽에 치우쳐 현관이 위치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고 1,2층은 적벽돌로 벽체를 쌓았으며 층간에 목조 마루틀을 설치하여 바닥을 꾸몄다. 지붕은 벽체 위에 목조 트러스(truss)를 올리고 널판을 깔아 함석판을 올린 구조이다. 수원지역에 세워진 기독교 선교학교(mission school)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음을 고려해볼 때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함.

 

 

25.수원축만제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축만제둔의 관개시설로 만들어졌다. 정조23년(1799) 정조는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만제를 만들게 하고 수문 2곳을 갖추었다. 몽리면적은 232두락으로 화성 주변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으며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뒤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로 불리고 있으며 서호에 비치는 낙조로 유명하다.
 

 

26.여기산 선사유적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1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6-1외 
시 대 청동시대


여기산유적은 서호 서쪽의 구릉에 있다. 1979~1984년까지 4차에 걸쳐 숭실대학교박물관에서 유적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경질무문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원삼국시대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터의 시설 중 특징적인 것은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 시설이 확인되었고, 서까래와 볏집 지붕이 조사되어 당시의 가옥구조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용구인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거지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어 서호 일대 주변 저습지대에서 벼농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갔음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수원지방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27.수원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4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동시에 담당하였다.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던 수원향교는 조선 정조 19년(1795)경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향교는 앞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3칸에 문을 달았고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고 동무와 서무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제사 의례에 적합하도록 앞면에 개방된 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8.박유명 초상 모본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2호

지 정 일 2009.03.1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원본인 보물 제1489호 박유명 초상화를 이모한 초상으로 원본에 충실하며, 17세기 공신도상 중 정사공신상과 진무공신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29.청련암 아미타회상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6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아미타회상도의 불화승은 19세기 후반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인물로 설채법과 색감 및 화면구성법 등 조선후기 불화양식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30.청련암 신중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7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신중도 화기를 통해 동 사찰내 아미타후불도와 같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불화승의 활동 시기와 설채법 및 구도 등에서 19세기 후반 불교회화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31.청련암 독성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8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독성도는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불화승의 활동 시기 알 수 있고 설채법 및 구도 등에서 19세기 후반 불교회화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32.청련암 산신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9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산신도는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설채법 및 구도 등에서 19세기 후반 불교회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 민화와의 유사성 등은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작품이다.

 

 

33.청련암 칠성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0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칠성도의 화기를 보면 아미타후불도보다 4년 전에 그려진 작품이다. 불화를 그린 대허체훈과 봉법은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불화승으로 이 불화는 설채법과 구도 등에서 19세기 후반의 화풍을 반영한 작품이다.

 

(수원의 무형문화재)

 

1.경기도 도당굿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지 정 일 1990.10.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기능보유자  오수복


도당굿은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지방과 수원·인천 등지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목적으로 매년 또는 2년이나 그 이상의 해를 걸러 정월초나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굿을 말한다. 경기도 도당굿은 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지역에 전해져 오는 마을굿으로, 지금은 부천의 장말에서만 완전한 형태의 경기도 도당굿을 볼 수 있다. 경기도 도당굿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속에 300년이 넘은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통해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굿은 오전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에 끝나며, 집안의 대를 이어 기능을 연마하고 음악과 무용에 뛰어난 세습무당이 진행한다. 세습무당인 화랭이들은 남자무당으로 줄을 타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재주놀이를 하면서 굿을 축제분위기로 이끈다. 예전에는 기생들의 소리와 춤이 곁들여졌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도당굿은 굿을 하기 전날 당주의 집에서 벌이는 ‘당주굿’으로 시작한다. 다음에는 당주집에서 굿당까지 올라가는 중간에 길거리에서 부정을 가시는 ‘거리부정’을 하고 굿당에 도착해 주변의 잡귀잡신에게 시루를 먹이는 ‘안반고수레’, 굿을 벌일 장소를 정화하는 ‘부정굿’, 신대를 꺾어 든 마을의 대잡이에게 신이 내리면 당가리 앞으로 가 도당신을 모시고 굿청으로 되돌아 오는 ‘도당모시기’, 마을의 장승과 공동우물, 원하는 집을 돌며 마을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돌돌이’, 굿당에서 군응마나님께 대취타연주를 올리는 ‘장문잡기’,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굿을 잘 받으셨는지를 시루가 쉽게 들어 올려지는지로 확인하는 ‘시루말’, 제석청배와 바라춤을 추는 ‘제석굿’, 군웅조상과 도당조상, 본향조상을 모셔서 집안의 평안과 자손번창을 축원하는 ‘본향굿’, 화랭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춤과 묘기를 보이는 ‘터벌림’, 손님인 마마신을 위한 ‘손굿’, 굿꾼과 무녀의 쌍군웅춤인 ‘군웅굿’, 날이 밝아 도당신을 당가리로 다시 좌정시키고 돌아오는 ‘도당보내기’, 고깔과 장삼 차림의 굿꾼이 놀며 동네축원과 중수비를 풀어주는 ‘중굿’, 굿에 따라든 잡귀들을 풀어 먹여 보내는 ‘뒷전’으로 굿은 끝난다.


경기도 도당굿은 다른 지방의 도당굿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남자무당인 화랭이들이 굿을 하며, 음악과 장단도 판소리기법을 따르고 있어 예술성이 뛰어나고 전통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석장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2007.09.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기능보유자  이의상


'석장(石匠)’이란 석조물을 제작하는 장인으로, 주로 사찰이나 궁궐 등에 남아있는 불상, 석탑, 석교 등이 이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석조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어 우리나라의 석조물 제작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석공예의 재료는 물론 석재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화강암이 있으며 이 밖에도 납석과 청석, 대리석 등이 활용되고 있다. 전통적인 석장들은 망치, 정 등 수공구를 사용하여 돌이라는 단단한 물질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수준 높은 석조문화를 탄생시키고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기계 도입 등으로 인하여 전통 석조물 제작 기법이 사라져가게 되었다. 이에 사라져가는 석조물 제작의 전통기법과 기능을 보존·전승하기 위하여 석장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3.승무ㆍ살풀이춤


종 목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91.10.1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기능보유자  김복련


승무는 승복을 입고 추는 춤이다. 중춤이라 하나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승려춤이나 살풀이춤, 궁중무용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형태로 한말(韓末)을 전후하여 광대나 기생들이 추는 춤이 되었다. 옷차림을 보면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백옥같은 고깔과 버선코가 유난히 돋보인다. 소매자락을 뿌리는 동작이나 휘날리게 하는 팔동작이 특징이다.


살풀이춤이란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굿판을 벌였는데 그곳에서 무당이 신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추던 춤을 말한다. 후에 광대나 기생들에 의해 교방예술로 발전하였다. 고운 머리에 비녀를 꽂고 흰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흰 수건을 들고, ‘살풀이’라는 남도 무악장단에 맞추어 춘다.

 

 

4.소목장


종 목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4호 
지 정 일 1995.08.0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기능보유자  김순기


소목장은 장롱을 비롯한 문방제구 등 세간을 만드는 장인이며 때로는 가마, 수레, 농기구, 창호 등을 만들기도 한다. 소목장이란 명칭은 고려 때부터 나타나며 조선시대 경국대전에서는 일괄하여 목장이라 하였다.

 

골재로는 구조상 힘을 지탱하는 나뭇결이 견실한 목재로 소나무, 돌배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호두나무 등이 주로 쓰이고, 판재로는 목리가 아름다운 오동나무, 소나무, 전나무, 뽕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살구나무 등이 쓰이며, 부재로는 회화나무, 버드나무 등 나뭇결이 아름다운 목재가 쓰인다.

 

 

5.단청장


종 목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8호 
지 정 일 1999.10.1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기능보유자  김종욱


단청이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건축물이나 공예품 등에 무늬와 그림을 그려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단청을 하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단청장이라고 하는데, 단청에 종사하는 사람이 승려인 경우에는 금어 또는 화승으로 불렀다.


단청의 종류에는 한두가지 색으로 바탕색을 칠하는 가칠단청, 가칠위에 검은색 테두리로 장식하는 긋기단청, 화려한 채색을 위주로 하는 금단청 등이 있다. 단청은 끓인 아교를 물에 타서 가칠을 하고 그 위에 종이에 그려진 무늬를 따라 돗바늘로 구멍을 낸 그림본을 올려 놓고 흰가루가 든 주머니를 두드려 가칠바탕 위에 흰무늬가 나타나게 한다. 흰무늬를 따라 각기 맞는 색으로 칠하여 마무리한다. 단청은 아름다움 이외에 도료를 통해 건물의 부식과 습기를 방지하고 재질을 고급스럽게 보이게 하며, 특수한 권위나 종교적 신비감을 주는 효과가 있다.


단청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김종욱 씨가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6.고색동 코잡이놀이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
소 재 지  2003.11.2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381-4
기능보유자  고색동 코잡이놀이보존회


고색동 코잡이놀이의 유래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시대 이전부터 행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1796년 수원화성 축성 이후 양반계층과 평민계층인 농민이 모두 모여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일년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고 액을 막으며 동네의 평안과 마을의 풍년을 기리는 줄다리기로 일제강점기 및 198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 1994년까지 명맥이 끊겼다가 1995년 동민 및 청년회를 중심으로 복원하여 현재는 「코잡이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오고 있다.

 

 

7.이의동 길마재 줄다리기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0
지 정 일  2003.11.2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이의동 길마재지역
기능보유자  이의동 길마재줄다리기보존회


영통구 이의동 길마재마을과 용인시 수지면 상현리 독바위마을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전승해 오던 민속놀이로서 3년에 한번씩 정월대보름 다음날 밤 모든 마을사람들이 나와 어른 남자는 동쪽 줄(숫줄)에, 여자나 총각 및 어린이는 서쪽 줄(암줄)에 자리 잡고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결과는 항상 서쪽 편이 이기게 되는데 그래야 풍년이 들고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줄다리기로서 보존가치가 크다.

 

 

8.벌말도당굿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2호
지 정 일  2003.11.2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평동 31-14

기능보유자  벌말도당굿보존회


벌말 도당굿에서는 신라 경순왕인 김부대왕과 안씨부인을 모신다. 200년 이상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대동굿으로 전승되었으며 음력 정월 11일에 마을에 있는 도당에서 당주 굿을 한 후 서낭모시기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돌돌이 후 당 안으로 들어가서 도당굿을 한다.

 

201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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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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