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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수원에대하여 빨리요~ 급함!!!!!!!!!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6,694 작성일2012.07.17

 제가 사회숙제로 수원에대하여 조사해야합니다.

수원의 인물, 자연환경, 문화재, 자랑거리를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게 적어주세요,

빨리요~ 내일까지에요ㅠㅠㅠㅠㅠㅠㅠㅠ

 

내공냠냠, 저주글, 홍보글, 잡글(?)은 신고합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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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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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인물)

 

1.홍난파 (1898.4.10~1941.8.30) 
  
본관  남양 
본명  영후 
활동분야  음악 
출생지  경기 수원 
주요저서  《음악만필》《세계의 악성》 
주요작품  《봉선화》(1920) 《옛동산에 올라》《낮에 나온 반달》  
 
본관은 남양, 본명은 영후(이다. 189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12년 YMCA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마친 뒤 동 전습소 교사가 되었다. 1916년 최초의 곡으로 추정되는 행진곡풍의 야구 응원가인 창가 《야구전》을 작곡하였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귀국, 1920년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 무렵 잡지 《음악계》를 발간했으며, 소설 《처녀혼》 《향일초(向日草)》 《폭풍우 지난 뒤》 등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6년 다시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신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로 있다가 같은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전 강사를 지낸 뒤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된 친일 사회교화 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하였고, 1938년에는 대동민우회,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작품에는 《봉선화》 외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 도쿄 유학 직전에 남긴 《통속창가집》 《행진곡집》 등 17권의 편저작물이 있다. 이밖에 저서에는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2.이고 (1341~1420년)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여주. 호는 망천.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89년(공양왕 1) 집의에 오르고, 한림학사·집현전직제학을 지냈다. 뒤에 사직하고 수원의 광교남탑산에서 살았다. 공양왕이 중사를 보내어 즐기는 바가 무엇인가 물으니 그는 자신이 사는 산천을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중에 사통팔달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삼사좌승·경기우도안렴사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태조가 화공에게 그가 거처하는 곳을 그리게 하고 그곳을 팔달산이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석비를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효자 한림학사 이고의 비’라고 하였다. 대개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8명의 학사를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하는데, 그는 그 중 조견·이집과 가까이 살면서 때때로 소를 타고 내왕하였다 한다.


3.최루백 (?~?)  
  
본관은 수주(경기도 수원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고려시대 최고의 명문 수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수주 지역의 향리 최상저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 시어사 등의 대간직을 역임하였으며 1153년(의종 7) 기거사인으로 재임 중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예부낭중, 한림학사 등의 요직을 거쳐 1158년(의종 12) 정3품 국자제주에 올랐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고려사》와 《삼강행실도》에 그의 효성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4.장한나 (1982년 12월 23일 ~ )

 

장한나는 1982년 12월 23일 경기도 수원시에서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3살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나중 장한나는 "피아노가 너무 커서 가지고 다닐 수도 없으며 페달을 밟고 싶을 때 밟을 수도 없었다. 이건 내 악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3년 뒤 6살에 장한나는 처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1993년, 장한나와 그의 가족은 장한나가 줄리아드 음대 예비반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도록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장한나는 11세였다.

 

그 해에 장한나는 제5회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경연 대회를 참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당시 告마에스트로 로스트로포비치는 "무대를 보는데 첼로가 혼자서 걸어나오는 줄 알았다. 깜짝 놀랐다"라고 되새겼다. 이 대회에서 장한나와 로스트로포비치는 사제 관계를 맺었다.

 

'1982 수원시 매탄동에서 출생
'89(7세) 첼로 연주시작
'92(9세) 월간음악주최 전국 콩코르 1위 입상
'93. 2월 한미 뉴욕 줄리어드 예비음대 입학(특별 재학생)
'94. 10월 세계최고권위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경연대회 최우수상과 현대음악상 수상(파리 샹젤리제 극장)
역대 최연소 기록이며 음악천재성 평가 받음


5.나혜석 (1896.4.18~1949) 
  
본관  나주 
호  정월 
활동분야  예술(회화, 소설) 
출생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주요수상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일본제국미술원 전람회 입선 
주요저서  《경희》 《정순》 
주요작품  《나부1928》, 《선죽교 1933》  
 
1896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고 호는 정월이다. 부친 나기정은 대한제국 때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군수를 지냈으며 일제시대 때는 용인군수를 역임하였다. 나혜석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후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화가로서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오빠 나경석은 자신의 친구 최승구를 나혜석에게 소개하였다. 이미 본국에 조혼한 아내가 있었으나 최승구와 나혜석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1916년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한 후에는 나혜석의 인생관은 돌변하여 모든 희망을 예술에 걸게 되었다.

 

1919년 그녀가 일본 유학시절 발발한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3월 25일 이화학당 학생 만세 사건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혜석은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고 일본 유학생이었던 교토제국대학을 다니던 친일파 김우영의 6년 구애를 받아들여 1920년 4월 서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921년 3월에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전람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26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3년간의 유럽 일주 여행 도중 천도교 신파의 우두머리였던 최린을 만나게되고 김우영과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최린은 나혜석과 불륜의 관계로 발전하고 결국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였다. 결혼생활 실패 후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매진한 나혜석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 1935년 10월 서울 진고개(충무로) 조선관에서 개최된 소품전의 실패와 아들 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불교에 심취한다. 승려생활을 매력을 느껴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오랜동안 머물면서 불교에 심취했으나 불가에 귀의하지는 않았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한때 청운양로원에 의탁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12월 10일 시립 자제원에서 사망하였다.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는 《나부1928》, 《선죽교 1933》가 있다.

 

6.박지성 (1981년 2월 25일 ~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서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 현재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소속으로 뛰고 있으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신안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량이 넓고 경기장 전체를 폭넓게 뛰어도 체력이 남는 강철 체력을 소유했다는 의미로 '산소 탱크'라는 별명이 붙었다. 휘날리는 머리와 묘한 대조를 이루는 여드름 자국과 시골 사람 같은 외모로 인하여 '고구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한 이후, 팀 동료들이 박지성에게 '지(Ji)'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또 경기장 어디든지 순식간에 나타나 공을 뺏는 모습을 두고 그의 소속팀 동료 파트리스 에브라는 '유령'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요즘에는 챔피언스리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센트럴 팍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원의 자연환경)

 

1) 지형

 

광주산맥의 발달부인 광교산맥이 통과해 곳곳에 높고 낮은 구릉이 나타난다. 지형은 대체로 동북에서 남서 방면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2)산

 
동쪽은 광교산(582m)·형제봉(448m), 서쪽에는 칠보산(236m)이 화성군과, 북쪽에는 백운산(567m)이 의왕시·용인시와 경계를 이룬다. 중앙에는 숙지산(123m)·팔달산(143m)·여기산(105m)이 있다.

 

3)강·하천


하천은 광교산에서 발원한 장지천·원천천·수원천이 남류해 황구지천에 합류한 뒤 남류한다.

 

4)지질

 

지질구조는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5)기후

 

기후는 연평균기온 11℃, 1월 평균기온 -5.6℃, 8월 평균기온 26℃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327㎜이다. 10월 초에 첫서리가 내리고 4월 하순에 마지막 서리가 내린다.

 

(수원의 문화재)

 

수원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를 올려드립니다.

 

1.수원 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화성행궁


종 목  사적  제478호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4.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종 목 보물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시 대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5.팔달문


종 목  보물  제402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 등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6.화서문


종 목  보물  제403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25-2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7.퇴우이선생진적

 

종 목  보물  제585호 
지 정 일 1975.05.0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서화가인 이황(1501∼1570), 송시열(1607∼1689), 정선(1676∼1759), 정선의 아들 정만수, 이병연(1671∼11751), 임헌회(1811∼1876), 김용진(1883∼1968) 등의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아 연대순으로 묶어낸 서화첩이다.

 

모두 8엽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의 순서를 보면, 제1엽은 퇴우이선생진적이라는 그림과 표지글이 있고, 그 뒷면과 제2엽 앞면에 정선의 계사정거도가 그려져 있다. 제2엽 뒷면에서 제4엽 앞면에는 이황의『회암서절요서』가 쓰여있다. 제4엽 뒷면과 제5엽 앞면에는 송시열의 글이 있다. 제5엽 뒷면, 제6엽 앞뒷면에는 정선의 그림인 무봉산중, 풍계유택, 인곡정사 등이 그려져 있다. 제7엽 앞면에는 이병연의 칠언절구 시와 년기, 서명, 낙관 등이 있고 제8엽 앞면에는 임헌회의 글과 김용진의 글 등이 있다.

 

이 서화첩의 속종이는 닥나무 종이이며, 겉종이는 두터운 종이로 만들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모두 뛰어난 문장과 그림이어서 학자들의 인격과 서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8.채제공 초상화(시복본)

 

종 목  보물  제1477-1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선경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이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작)>은 채제공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9.박유명 초상

 

종 목  보물  제1489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역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박유명(1582∼1640)은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그 뒤 당상선전관을 거쳐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박유명 초상>은 낮은 오사모를 쓰고 과장된 둥근 어깨를 하고 있으며 단령이 뒤로 뾰족하게 뻗친 모양, 바닥의 채전 등에서 17세기 공신 도상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 초상과 함께 후대의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 이모본은 거의 동일한 형상이며 안료는 보다 선명하다.

 

<박유명 초상>은 17세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모본의 경우는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지므로 원본 1점만을 지정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70 x 88.3cm 

 

10.영조어필-읍궁진장첩


종 목  보물  제1631-3호 
지 정 일 2010.01.0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창룡문길 443번지 
시 대 조선시대


이 서첩은 영조(1694~1776)의 여러 어제어필을 모은 것이다. 겉표지에 “영조어필 읍궁진장”이라 쓰여 있는데, 읍궁이 송시열의 은거처였던 괴산군 화양구곡의 제3곡 읍궁암과 어떤 관계인지는 미상이다.

 

서첩 앞쪽에 “1761년 정월 16일에 내의원에 답한다”는 부전지가 있는 비답을 비롯하여 사언시고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사언시고 중에 1770년(영조 46)7월 11일에 쓴 ‘서시옥당’은 충자(세손 정조)와 옥당(홍문관) 관원에게 내린 것으로 『임하필기』에 관련내용이 보인다.

 

또 그때 썼을 것으로 보이는 ‘학사관’ 대자도 실려 있다. 이 어필첩은 영조어필을 모은 몇몇 서첩 가운데 수록 필적이 정선되고, 영조 노년인 1761년, 1765년, 1770년의 연대가 있으며, 조선후기 궁중장황으로 꾸며지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어필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11.박태유 필적 백석유묵첩


종 목  보물  제1675호 
지 정 일 2010.10.25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백석유묵첩》은 17세기 후반의 문신ㆍ명필 박태유(1648-86)의 필적으로 다양한 크기에 여러 서체로 쓰여 있다. 해서ㆍ행초ㆍ광초ㆍ예서ㆍ행서가 실려 있으며 그중 해서는 소해ㆍ중해ㆍ대자서로 다양하다. 특히 칠언배율의 시를 중자 해서로 쓴 글씨는 그가 안진경 해서풍을 적극 가미시켰음을 보여준다. 또 행초를 섞어 쓴 칠언절구는 아버지 박세당의 서풍을 따랐는데 그 바탕은 안진경의 행초 필적에 가깝다. 또 한 면에 두 글자씩 대자 초서로 쓴 “사지격절”ㆍ“이식현오”는 광초의 대가 당나라 회소(8세기 활동)의 서풍을 연상하게 한다. 이밖에 예서로 쓴 “서유육의”는 한자의 조자원리에 관한 기본개념인 육서(육의)란 점에서 이채롭다.


이상과 같이 이 서첩은 박태유의 서예적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는 예로 필사한 연유나 시기, 글씨를 받은 사람의 이름 등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의 글씨학습을 위하여 써준 것으로 여겨진다.

 


 12.방화수류정

 

종 목  보물  제1709호  
지 정 일 2011.03.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1번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정조 18년(1794) 건립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전시용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 방화류과전천”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1725~1799)의 글씨이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되었다.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3.서북공심돈

 

종 목  보물  제1710호  
지 정 일 2011.03.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2번지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의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정조 20년(1796)에 건립되었다.

수원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측 성벽에서 돌출시켜 남측면의 일부만 성곽에 접하고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3층 구조로 하부 치성은 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1층과 2층 외벽과 3층 하부는 전돌로 쌓았다.

1, 2층 각 면에는 6개의 총안이 있으며, 3층에는 여장을 쌓고 같은 높이에 4개의 총안을 내었다. 3층 포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전안이 설치되어 있다.

치성의 북측면과 서측면에는 각 2개소의 현안을 두어 성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하부는 성벽의 석재를 오목하게 “∪”자형으로 가공하여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되게 하였다.

수원 서북공심돈의 성제는 현존 성곽 건축에서는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재료의 유연성과 기능성이 우수하며,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 공심돈의 전돌 축조 기법, 현안과 총안, 전안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14.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시 대 조선시대


안채·바깥채·헛간·광이 울안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고종 25년(1888)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집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른다. 주변에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옛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으로 부엌·대청·안방·건넌방으로 되어있다. 초가인 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동편의 끝칸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바깥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배치형태이며, 이 마을의 대부분 집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방은 위아랫방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하였고 대문만이 부엌을 향하였다. 마당 앞에는 헛간·외양간이 있다.

 

바깥마당 맞은편의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 연대를 보인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쪽으로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살렸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수원의 자랑거리)

 

수원의 자랑거리라고 하면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과 수원양념갈비가 있습니다. 수웒ㅘ성은 문화재에서 적어드렸으니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1.수원양념갈비


수원양념갈비는 우선 갈비를 굽는 냄새에서부터 미식가들의 발길을 묶는다. 참기름, 마늘, 파,볶은 통깨, 배 등 수원양념갈비만의 온갖 재료를 넣어 맛을 낸 뒤 은근한 숯불에 구워 먹는 맛은 그야말로 천하일미다. 또 맛은 물론 그 크기에 있어서도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마디로 수원양념갈비는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식이다.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이귀성씨가“화춘옥”이라는 상호로 음식점을 시작한 것이 수원양념갈비의 시초가 되었다. 현재는 노송지대 주변과 동수원지역의 경부고속도로 진입로 주변 등에 30개의 모범업소가 모여 있으며 숯불에 구어내는 수원양념갈비의 독특한 맛이 소문이 나서 수원양념갈비의 명성을 지켜가고 있다.

 

수원양념갈비의 특징 

 

수원갈비는 오랜 경험과 전통에 의해 맛을 내고 있으며 수원갈비의 특징은 다른 지방의 갈비보다 푸짐하고, 맛과 크기가 크며 부드럽고 맛이 매우 좋다.

간장양념이 진한 다른 지방의 갈비와는 달리 소금으로 맛을 낸다는 점이 특이하 고 또한 꺼져가는 숯불에서 굽는 방법을 이용하여 감칠맛 나는 고유의 참 맛을 즐길 수 있다.

 

2.광교산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 하광교동

 

광교산은 수원의 북쪽에서 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시가지를 품에 안고 있는 수원의 주산으로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광교산은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수원간 도로 사이에서 남북으로 약 2㎞ 정도에 걸쳐 뻗어있는 산으로 수원시 상광교동에 속해 있다. 산의 능선이 매우 한적하면서도 완만하고 사이에 수목이 우거져있어 산림욕을 하거나 당일코스로 오붓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옛부터 광교산은 수원 8경의 하나로 불렸는데 광교적설이라 하여 광교산에 눈이 내려 나무에 수북히 쌓여 있는 경치의 아름다움은 8경 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혔다. 1994년까지만 하여도 가을(1개월)과 봄(3개월)에는 산불 우려로 전면 입산 통제하였으나, 1995년 가을부터는 주민 휴식 공간 제공과 여가선용 기회 확대를 위해 연중 개방하고 있으며, 훼손된 등산로변과 자연경관을 산림자연환경 스스로가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3년 2월 1일부터 3년 단위 단계적으로 광교산 휴식년제를 실시 중이다.

 

3.수원 효원공원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7

 

1994년 효를 상징하는 각종 기념물을 세워 조성하였다. 어머니상 등 어린이들에게 효에 대한 마음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여러가지 조각상을 관람할 수 있다. 자매도시 제주시를 상징하는 제주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전통팽이게임장도 들어서 있다. 잔디밭은 무료결혼식장으로도 활용된다. 농구장과 배드민턴장·족구장 등을 갖춰 청소년들이 많이 찾는다. 1998년 7월 16일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푸른쉼터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공중화장실은 도내에서 가장 쾌적하고 아름다운 화장실로 손꼽힌다.

 

1999년 6월 조성된 제주거리는 길이 160m, 너비 3m로 돌하르방과 제주탄생신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상·해녀상 등이 있고 제주도 전통초가 모형과 한라산 노루상·정낭 등이 설치되어 있다. 거리주변은 제주도 나무로 조성하였으며 길도 제주도의 돌로 포장하였다. 한편 제주시에서는 우당도서관 내에 수원 화성 모형을 설치하였다. 2000년 1월 1일에는 시민 1천명의 손도장을 받아 밀레니엄조형물을 세웠다. 공원 입구에서 경기도문화예술회관의 야외음악당에 이르는 430m거리는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였다. 이 거리에서는 수원예술제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린다. 수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으며, 인근에 수원성곽과 융건릉·용주사·광교유원지· 경기도문화예술회관·수원월드컵경기장 등이 있다.

 

공원에서 주택은행 동수원지점 맞은편까지 너비 15∼20m, 길이 440m의 거리는 나혜석거리이다. 길 좌우로 벤치와 카페·레스토랑 등이 들어서 시민들의 도심 휴식터로 각광을 받는다. 이 거리는 수원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첫 여성 서양화가가 된 나혜석 (1896∼1948)을 기념하여 조성한 곳이다. 조명과 음향시설을 갖춘 만남의 광장과 분수대 등이 있으며, 음악공연과 전시회·행위예술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4.나혜석거리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시도 중 1-25호선, 나혜석 거리)


나혜석 거리는 수원 태생인 최초의 한국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 여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약 300m가량의 문화 거리로 문화예술회관, 효원공원, 야외 음악당 등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로 내 분수대, 음악이 흐르는 화장실, 조경수가 잘 조성되어 있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서 거리 공연과 같은 다양한 볼거리, 주변의 전문식당가로 먹거리가 산재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화와 만남이 공존하는 거리이다.

 

5.인계예술공원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28


수원시의 팔달구에 자리한 인계예술공원은 명칭이 말해주듯 휴식과 음악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다. 울창한 소나무숲 등 조경이 잘된 이 공원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야외 공연장인 수원야외음악당도 들어서 예술공원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또한 경찰의 수시순찰로 개장 이래 범죄발생이 없는 것도 인계예술공원의 자랑이다.

무엇보다도 인계예술공원의 백미는 야외음악당이다. 야외음악당 건물 내부에는 수원시립교향악단, 시립합창단의 전용연습실과 분장실 등이 있고 각 홀의 구조와 스피커가 조화를 이루어 잔디광장의 어디서나 최고의 음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1996년에는 한국 건축 문화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1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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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수원시청, 문화재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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