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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수원의문화재
qhdm**** 조회수 11,128 작성일2011.03.07

수원에 있는 문화재를 알려주세요.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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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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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문화재)

 

1.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화성행궁


종 목  사적  제478호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4.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종 목 보물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시 대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5.팔달문


종 목  보물  제402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 등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6.화서문


종 목  보물  제403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25-2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7.퇴우이선생진적

 

종 목  보물  제585호 
지 정 일 1975.05.0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서화가인 이황(1501∼1570), 송시열(1607∼1689), 정선(1676∼1759), 정선의 아들 정만수, 이병연(1671∼11751), 임헌회(1811∼1876), 김용진(1883∼1968) 등의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아 연대순으로 묶어낸 서화첩이다.

 

모두 8엽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의 순서를 보면, 제1엽은 퇴우이선생진적이라는 그림과 표지글이 있고, 그 뒷면과 제2엽 앞면에 정선의 계사정거도가 그려져 있다. 제2엽 뒷면에서 제4엽 앞면에는 이황의『회암서절요서』가 쓰여있다. 제4엽 뒷면과 제5엽 앞면에는 송시열의 글이 있다. 제5엽 뒷면, 제6엽 앞뒷면에는 정선의 그림인 무봉산중, 풍계유택, 인곡정사 등이 그려져 있다. 제7엽 앞면에는 이병연의 칠언절구 시와 년기, 서명, 낙관 등이 있고 제8엽 앞면에는 임헌회의 글과 김용진의 글 등이 있다.

 

이 서화첩의 속종이는 닥나무 종이이며, 겉종이는 두터운 종이로 만들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모두 뛰어난 문장과 그림이어서 학자들의 인격과 서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8.채제공 초상화(시복본)

 

종 목  보물  제1477-1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선경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이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작)>은 채제공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9.박유명 초상

 

종 목  보물  제1489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역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박유명(1582∼1640)은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그 뒤 당상선전관을 거쳐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박유명 초상>은 낮은 오사모를 쓰고 과장된 둥근 어깨를 하고 있으며 단령이 뒤로 뾰족하게 뻗친 모양, 바닥의 채전 등에서 17세기 공신 도상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 초상과 함께 후대의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 이모본은 거의 동일한 형상이며 안료는 보다 선명하다.

 

<박유명 초상>은 17세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모본의 경우는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지므로 원본 1점만을 지정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70 x 88.3cm 

 

10.영조어필-읍궁진장첩


종 목  보물  제1631-3호 
지 정 일 2010.01.0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창룡문길 443번지 
시 대 조선시대


이 서첩은 영조(1694~1776)의 여러 어제어필을 모은 것이다. 겉표지에 “영조어필 읍궁진장”이라 쓰여 있는데, 읍궁이 송시열의 은거처였던 괴산군 화양구곡의 제3곡 읍궁암과 어떤 관계인지는 미상이다.

 

서첩 앞쪽에 “1761년 정월 16일에 내의원에 답한다”는 부전지가 있는 비답을 비롯하여 사언시고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사언시고 중에 1770년(영조 46)7월 11일에 쓴 ‘서시옥당’은 충자(세손 정조)와 옥당(홍문관) 관원에게 내린 것으로 『임하필기』에 관련내용이 보인다.

 

또 그때 썼을 것으로 보이는 ‘학사관’ 대자도 실려 있다. 이 어필첩은 영조어필을 모은 몇몇 서첩 가운데 수록 필적이 정선되고, 영조 노년인 1761년, 1765년, 1770년의 연대가 있으며, 조선후기 궁중장황으로 꾸며지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어필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11.박태유 필적 백석유묵첩


종 목  보물  제1675호 
지 정 일 2010.10.25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백석유묵첩》은 17세기 후반의 문신ㆍ명필 박태유(1648-86)의 필적으로 다양한 크기에 여러 서체로 쓰여 있다. 해서ㆍ행초ㆍ광초ㆍ예서ㆍ행서가 실려 있으며 그중 해서는 소해ㆍ중해ㆍ대자서로 다양하다. 특히 칠언배율의 시를 중자 해서로 쓴 글씨는 그가 안진경 해서풍을 적극 가미시켰음을 보여준다. 또 행초를 섞어 쓴 칠언절구는 아버지 박세당의 서풍을 따랐는데 그 바탕은 안진경의 행초 필적에 가깝다. 또 한 면에 두 글자씩 대자 초서로 쓴 “사지격절”ㆍ“이식현오”는 광초의 대가 당나라 회소(8세기 활동)의 서풍을 연상하게 한다. 이밖에 예서로 쓴 “서유육의”는 한자의 조자원리에 관한 기본개념인 육서(육의)란 점에서 이채롭다.


이상과 같이 이 서첩은 박태유의 서예적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는 예로 필사한 연유나 시기, 글씨를 받은 사람의 이름 등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의 글씨학습을 위하여 써준 것으로 여겨진다.

 


 12.방화수류정

 

종 목  보물  제1709호  
지 정 일 2011.03.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1번지 
시 대 조선시대

 

수원화성에 있는 각루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 등 넷이다. 서남각루는 화양루라하고,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 한다.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북수문인 화흥문의 동측 구릉 정상 즉 용연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 위에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용연은 북성 밖에 있는데 반달처럼 생긴 못으로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며 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못 위의 성 모서리에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못 서쪽에는 석각이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1794) 9월 4일 진시에 터다지기 공사에 착수하여 10월 4일 묘시에 정초를 하고 기둥을 세웠고, 7일 오시에 상량하였으며, 10월 19일 완공하였다. 방화수류정 건립에 참여한 각 공장의 편수는 석수 서울 김차봉, 한산 최기득이며, 목수 서울 한천석, 미장 서울 권옥, 개와장은 서울 총융청 소속 이흥득이다.

 

방화수류정의 원래의 편액은 전 참판 송하 조윤형(1725~1799)의 글씨이며, 현재 방화수류정에 걸려 있는 편액은 서예가 원곡 김기승(1909~2000)이 1956년에 쓴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송대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 방화류과전천”에서 따왔다고 한다.

 

화성성역의궤 연설의 기록에는 정조 19년(1795) 2월 14일에 화홍문을 경유하여 방화수류정에 임금과 신하가 거동한 기록이 있고, 정조 21년(1797) 1월 29일에는 방화수류정에서 임금과 신하가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수원부계록(1848.6.10)에 방화수류정, 팔달문, 장안문 등은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으며, 1913년 방화수류정 보수, 1918년 방화수류정 개축, 1929~1934년 등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광복 후의 수리는 1968년 방화수류정 보수, 1973년 방화수류정 단청, 1975년 방화수류정 보수, 1988년 방화수류정 툇마루 밑 난간보수, 가칠단청, 1993년 방화수류정 기단 강회다짐, 마루 및 난간보수, 1998년 방화수류정 기와 고르기 및 단청, 1999년 방화수류정 단청 및 전벽돌 교체 등 방화수류정 보존을 위한 수리가 이루어져 왔다.

 

방화수류정에 관한 도면 자료는 화성성역의궤에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외도1과 외도2, 동북각루내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934년에 작성된 방화수류정의 평면도, 정면도, 단면도, 측면도 등이 소장되어 있다. 1980년에 발간된 수원성복원정화지에도 방화수류정의 평면도, 입면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2010년에 발간된 김주태 기증 전통건축설계도면집에는 방화수류정 측담 관련 도면이 수록되어 있다.

 

높은 지형에 조영되어 있는 방화수류정은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성의 서북각루인 전시용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하여 조영된 건물이다. 방화수류정은 초익공 소로수장에 굴도리를 사용한 오량집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지붕상부에는 세 마디의 절병통을 세우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를 설치하였다. 지붕형태는 대부분 팔작지붕이고,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북측 용연측과 동측으로 돌출되게 하여 툇마루를 두는 특이한 평면이다. 방화수류정의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 용연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 튀어나오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다.

 

방화수류정의 남측 초석은 방형(하부 50cm, 상부 40cm)의 민흘림 장초석(높이 1.55m) 위에 하부(높이 90cm)는 원주(직경 30cm)로 가공하였고 그 상부는 각주로 가공하였다. 북측면은 높이 20cm 기단 위에 1.08m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남측 전면의 흙마당에 설치된 다섯단의 돌계단을 오르면 방형의 대가 형성되어 있다. 남동측은 높은 대위에 상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있다. 다섯단으로 된 나무계단(하부 폭 86.5cm, 상부 폭 85cm, 디딤 폭 24cm, 높이 28cm)을 오르면 누마루가 된다. 하층바닥에서 상층바닥까지의 높이는 2.60m정도이고, 동남측 기단에서 상층바닥까지는 1.36m, 기단높이는 1.23m 정도 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깔았으며 북측의 용연쪽은 평란을 둘렀고, 그 외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계자난간은 위부분에 하엽을 두르고,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두어 채색하였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하방담은 전돌로 쌓았으며 전돌 사이사이에는 “+”자형으로 비워 “+”자형의 삼화토 벽돌을 제작하여 넣어서 조화롭게 쌓은 화담은 성곽의 전시용 건물 같지 않은 아름다운 하방담 으로 꾸몄다.

 

화성성역의궤 동북각루내도와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그림에는 방화수류정에 오르는 계단이 2개소이나 현재는 1개소로 되어 있는 것 외에는 대체로 원래의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관련된 많은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13.서북공심돈

 

종 목  보물  제1710호  
지 정 일 2011.03.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2번지 
시 대 조선시대

 

수원화성에 있는 공심돈은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 동북공심돈 등 세 곳 이다.

 

서북공심돈은 화서문(보물제403호) 옆 북치의 위에 있고, 남공심돈은 남암문의 동치의 위에 있으며, 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서북공심돈은 조선 정조 20년(1796) 3.10일 완공되었으며, 건립에 참여한 각 공장의 편수는 석수 개경부 김백이이며 목수는 서울 손동현이고, 미장도 서울 김명철과 박도성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서북공심돈외도, 내도, 내부도면이 수록되어 있으며 공심돈의 규모와 조영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서북공심돈의 수리(1933~1935년)되었으며, 당시 수리에 관한 정면도, 단면도, 측면도 등 도면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 21년(1797) 1.29일 화성을 순행하였으며, 화서루를 지나 공심돈에 이르러 각신에게 “공심돈은 우리 동국의 성제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마음껏 구경하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최근의 수리는 1975년과 1993년에 유지 보존을 위한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측에 축조된 성벽에서 2.8m정도 돌출시켜 남측면의 4.2m만 성곽에 접하고 남측면의 2.5m 정도와 나머지 3면이 돌출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서북공심돈의 높이는 지면에서 13m정도이다. 1층 바닥에서 2층까지가 2.35m, 2층은 2.17m, 3층 바닥에서 보 밑까지는 2.0m이다. 3층의 여장은 하부벽보다 20cm정도 안측으로 쌓았고, 상?하인방과 문선을 두고 있다.

 

공심돈의 하부 치성은 방형의 석재로 쌓았는데 하부는 장방형석재를 세로로 세워 쌓고, 상부는 가로로 눕혀서 쌓았으며 모서리는 비교적 큰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둥글게 원호로 쌓았다. 치성상부에 축조된 공심돈은 3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1층과 2층의 외벽과 3층의 하부는 전돌로 쌓고, 내부는 목조기둥과 보, 도리, 마루귀틀 등으로 가구하였다.

 

성벽높이까지는 흙으로 채우고 그 위에 전돌로 가운데를 비운 방형 통 모양 구조물을 만들어 내부에 3개 층으로 구성하였다. 치성의 북측면과 서측면에는 각 2개소의 현안을 두어 내부 1층 바닥에서 성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조영하였다. 현안의 하부는 치성벽의 석재를 오목하게 ∪자형으로 가공하여 상부 전돌 현안과 연결되게 하였다.

 

치성 위의 전돌로 쌓은 공심돈 1층과 2층 각 면에는 6개의 총안이 있는데 아래쪽에 2개, 위측에 4개 이다. 3층에는 여장을 쌓고 같은 높이에 4개의 총안을 내었다. 3층 망루에 포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이다. 벽면 위쪽의 판문에는 전안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는 전돌의 벽에 붙여 네모서리에 방주를 세워 2층과 3층을 구성하였는데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각 층에는 목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1층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2층과 3층은 장마루를 깔았다.

 

서북공심돈의 성제는 우리나라 성곽에 처음 있는 것으로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것과 같이 치성의 상부에 공심돈을 조영한 형식은 현존 성곽 건축에서는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하부는 장방형 석재를 기능에 따라 적절히 사용하였으며, 상부 공심돈은 전돌로 축조한 상부에 포사는 팔작지붕으로 조영한 재료의 유연성과 기능성이 우수하다. 또한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 공심돈의 전돌 축조 기법, 현안과 총안, 전안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14.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시 대 조선시대


안채·바깥채·헛간·광이 울안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고종 25년(1888)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집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른다. 주변에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옛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으로 부엌·대청·안방·건넌방으로 되어있다. 초가인 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동편의 끝칸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바깥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배치형태이며, 이 마을의 대부분 집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방은 위아랫방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하였고 대문만이 부엌을 향하였다. 마당 앞에는 헛간·외양간이 있다.

 

바깥마당 맞은편의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 연대를 보인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쪽으로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살렸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15.지지대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47-2

시 대 조선시대


서울에서 수원으로 오는 길의 제일 먼저 이르는 고개에 서 있는 비로, 조선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고 있다.

 

정조는 화성(지금의 수원)에 있는 부친의 능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면, 항상 이 고개에서 가마를 멈추고 능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그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그곳에 돌을 쌓아 작은 대를 만들어 느릴 지자 두 자를 붙여서 ‘지지대’라 이름하였다. 이 후 고개이름도 지지대 고개로 바뀌었으며, 순조 7년(1807) 그의 효성을 전하자는 신현의 건의에 따라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비문은 홍문관제학으로 있던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수원유수를 지내던 홍명호가 썼다. 현재는 비각을 지어 모시고 있는데, 부친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듯 하다.

 

 

16.팔달문 동종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76.07.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팔달문 2층 누각에 걸려있는 높이 123㎝, 입 지름 75㎝ 크기의 동종을 이전한 것이다. 종을 매다는 용뉴에 1마리 용을 조각하였고, 그 아래 약간 오무라든 종의 몸체를 연결하였다.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을 준다. 용뉴에는 활짝 핀 꽃을 생동감있게 장식하였으며, 종의 위쪽에는 2단으로 정사각형의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띠에 잇대어 4곳에 유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유곽 둘레에 덩굴무늬를 새겼다. 돌출된 9개의 유두는 보상화무늬로, 가운데 1개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종의 중간에는 이 종에 관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고, 아래쪽에 보상화와 덩굴무늬를 새긴 띠가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고려 문종 34년(1080)에 개성에서 만들었고, 조선 숙종 13년(1687)에 만의사 주지 도화승이 불교 의식에 사용하고자 다시 주조하였다고 한다.

 

이 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용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7.봉령사 석조삼존불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령사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봉령사 대웅전 뒤편 언덕에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출토된 삼존불이다. 삼존불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하다.

 

각각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를 가지고 있으며, 1구는 좌상이고 2구는 입상이다. 앉아 있는 본존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은 민머리에 양쪽 귀와 목이 짧으며, 돌이 닳아서 희미하게 보이지만 얼굴은 원만한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두 협시불 역시 본존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옷주름을 잡고 있는 점이 다르다.

 

각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봉녕사 불화(신중탱화.현왕탱화)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녕사 
시 대 조선시대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한 종류이다. 봉령사 약사전 안에는 2폭의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데, 신중단에 모셔둔 신중탱화 1폭과 현왕단에 모셔둔 현왕탱화 1폭이 그것이다.

 

신중탱화는 가로 168㎝, 세로 17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그림은 위쪽에 제석과 범천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아래쪽에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신장과 용왕, 금강상 등을 그려놓았는데, 각 상들의 배열과 채색이 우수한 조화를 이룬다. 제석과 범천은 석가불을 보좌하는 보살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의 성격을 띤다. 위태천은 남쪽을 지키는 여덟 장군 중 하나로 역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그림의 내력을 적은 기록으로 보아, 조선 고종 28년(1891) 화사 광조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왕탱화는 가로 131㎝, 세로 104㎝의 크기로, 역시 비단에 채색하였다.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재판을 하는 현왕과 그 무리들이 묘사되며, 시왕도와 거의 비슷한 배열을 하면서 지옥 장면만 생략한다. 이 그림 역시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판관·녹사 등을 배치하였는데, 약사전에 함께 걸려 있는 다른 탱화들과는 구도나 채색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폭 아래쪽의 기록을 통해 고종 15년(1878) 화사 완선이 제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19.청련암 영산회상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영산회상도의 불화승은 19세기 전반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불화승이며 경기도 지역의 불교회화와 불화승의 계보를 밝힐 수 있는 작품이다. 전각 내부를 꽉 차게 배치한 화면의 크기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다.
  

 

20.노송지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9호

지 정 일 1973.07.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이목동·송죽동·정자동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수원의 노송지대는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있는 지지대고개를 시작으로 옛날 경수국도를 따라 소나무들이 길 양편에 늘어서 있는 약 5㎞ 구간을 말한다.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개인용도의 내탕금 1,000냥을 하사하여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대부분 말라죽고, 38그루 정도의 노송만이 살아 남아 있으나, 아직도 긴 가지가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가 울창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수원의 노송지대는 수원화성과 함께 수원시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픈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21.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 김준용(?∼1641)이 중국 청나라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한 비가 있는 곳이다.

 

김준용은 선조 41년(1608)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에서 중국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지방관과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죽은 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조 18년(1794) 수원성 축성의 총 책임을 맡았던 영의정 채제공이 그의 업적을 전해듣고 전승터였던 광교산 바위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22.심온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3호

지 정 일 1979.09.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13-1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 안효공 심온(?∼1418)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 왕조 건국에 참여하였다. 태종 11년(1411)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포악한 정치를 일삼던 박영우를 파직시키고 대사헌이 되어 관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이 되었다. 태종 18년(1418)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은 국왕의 장인으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 등이 거짓으로 꾸민 사실이 후에 밝혀지게 되어 세종은 관직을 복직시키고 안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석등과 좌우에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안평대군이 글을 쓴 묘비가 있다. 묘역 아래에는 9대손 심하단이 글을 짓고 서명균이 글씨를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23.팔달산 지석묘군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1.10.1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산3-1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남쪽 기슭에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8m이고 두께가 0.45m이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쪽 기슭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평평한 구릉 위에 1호·2호 고인돌이 서로 가까이 있다. 이로부터 위로 100m쯤 떨어진 곳에 3호·4호가 있는데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고 옆에 덮개돌로 보이는 돌이 흙속에 묻혀 있다. 

 

24.아담스기념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

지 정 일 2001.01.2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0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말 수원지방에는 감리교가 들어오면서 수원과 남양 지역의 교회들이 많은 남녀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이 지역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삼일학교의 아담스 기념관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국 아담스(Adams) 교회 신도들의 온정으로 신축되었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W.A.Noble) 목사는 삼일학교가 설립초부터 교사도 없이 중포산 기슭의 교회 건물에 더부살이하고 있어 고통을 겪는 딱한 사정을 아담스 교회에 호소하였고, 교인들이 교사의 건립기금으로 20,000엔을 노블 목사를 통해 삼일학교 측에 전달하여 1923년 새 교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당시 교회의 신축 설계는 미국 아담스 교회 선교부에서 하였으며 공사는 중국인 왕영덕이 맡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새 교사인 고 최태영 기념관을 건립할 때까지 교실과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나 이후에는 삼일중학교의 본관으로 교장실과 교무실, 채플실, 기도실 등으로 사용하였다.

 

1988년에는 현관 부분을 수리하였고 1층 내부에 강관 기둥을 설치하여 보강하였으며 1997년에는 건물의 안전도와 결로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1층을 미술과 특별교실과 방송실, 창고 등으로 쓰고 있으며 2층에 화장실을 증축하여 재단사무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농구부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스 기념관은 우진각지붕의 2층 벽돌조 양옥으로 건물 한쪽에 치우쳐 현관이 위치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고 1,2층은 적벽돌로 벽체를 쌓았으며 층간에 목조 마루틀을 설치하여 바닥을 꾸몄다. 지붕은 벽체 위에 목조 트러스(truss)를 올리고 널판을 깔아 함석판을 올린 구조이다. 수원지역에 세워진 기독교 선교학교(mission school)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음을 고려해볼 때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함.

 

 

25.수원축만제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축만제둔의 관개시설로 만들어졌다. 정조23년(1799) 정조는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만제를 만들게 하고 수문 2곳을 갖추었다. 몽리면적은 232두락으로 화성 주변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으며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뒤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로 불리고 있으며 서호에 비치는 낙조로 유명하다.
 

 

26.여기산 선사유적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1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6-1외 
시 대 청동시대


여기산유적은 서호 서쪽의 구릉에 있다. 1979~1984년까지 4차에 걸쳐 숭실대학교박물관에서 유적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경질무문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원삼국시대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터의 시설 중 특징적인 것은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 시설이 확인되었고, 서까래와 볏집 지붕이 조사되어 당시의 가옥구조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용구인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거지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어 서호 일대 주변 저습지대에서 벼농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갔음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수원지방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27.수원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4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동시에 담당하였다.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던 수원향교는 조선 정조 19년(1795)경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향교는 앞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3칸에 문을 달았고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고 동무와 서무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제사 의례에 적합하도록 앞면에 개방된 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8.박유명 초상 모본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2호

지 정 일 2009.03.1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원본인 보물 제1489호 박유명 초상화를 이모한 초상으로 원본에 충실하며, 17세기 공신도상 중 정사공신상과 진무공신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29.청련암 아미타회상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6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아미타회상도의 불화승은 19세기 후반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인물로 설채법과 색감 및 화면구성법 등 조선후기 불화양식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30.청련암 신중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7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신중도 화기를 통해 동 사찰내 아미타후불도와 같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불화승의 활동 시기와 설채법 및 구도 등에서 19세기 후반 불교회화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31.청련암 독성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8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독성도는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불화승의 활동 시기 알 수 있고 설채법 및 구도 등에서 19세기 후반 불교회화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32.청련암 산신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9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산신도는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설채법 및 구도 등에서 19세기 후반 불교회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 민화와의 유사성 등은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작품이다.

 

 

33.청련암 칠성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0호 
지 정 일 2009.05.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시 대 조선시대

 

칠성도의 화기를 보면 아미타후불도보다 4년 전에 그려진 작품이다. 불화를 그린 대허체훈과 봉법은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불화승으로 이 불화는 설채법과 구도 등에서 19세기 후반의 화풍을 반영한 작품이다.
 

 

34.향미정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
지 정 일  86.4.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정조 23년(1799) 농업용 관개수원으로 축조된 것이 축만제인데 이 인공호수는 당시에 축조된 호수 중 서쪽에 위치해 있다하여 흔히 서호로 불리워왔다.

 

서호는 옛부터 낙조와 잉어가 유명했고, 특히 잉어는 약용으로 쓰여 궁중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서호의 경관과 풍치를 한층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명물이 바로 항미정이다.

 

이 정자는 순조31년(1831) 당시의 유수인 박기수가 건립한 것이며,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에 “서호는 항주의 미목 같다”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 이름은 석양에 비치는 그림자가 마치 미인의 눈썹과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35.거북산당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
지 정 일  86.4.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영동 43-2

시 대  조선시대


영동 43-2번지에 있는 제당이다. 팔달문 바로 아래에 위치한 영동 시장내 (구)서울은행 뒤쪽에있다. 거북산당이 처음 생겨난 시기는 대략 18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당 건물은 1960년 지동에 살던 백윤남 할머니가 사비를들여 당집을 짓고 거북산당 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고 한다. 지금도 시장번영 회원들을 중심으로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제물을 차리고 굿을한다.

 

 

36.수원 역대 목민관 송덕비군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3호

지 정 일  1998.09.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및 수원역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수원의 역대 목민관들의 불망비 및 선정비로서 1986.04.08 이재원 불망비만 향토유적으로 지정하였으나, 수원에 있는 수원부사, 수원유수, 관찰사, 판관, 중군을 역임한 인물들의 모든 선정비, 불망비 등으로 확대하여 1998.9.17 37기를 일괄 지정하였다.

 

 

37.창성사지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

지 정 일  1986.04.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

시 대  시대미상

수원시 상광교동 광교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지로 광교산의 주봉인 비로봉 남동쪽 자락에 있다. 현재는 폐사되었으며,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 알 수 없다. 진각국사 탑비에 고려 우왕 8년(1382) 국사를 지낸 천희가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는 사실만 알려질 뿐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951년까지 민가 형태의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소실되었다. 절터에는 건물기단과 주춧돌, 옥개석, 기와조각, 석축 등이 남아 있다. 1963.1.21 보물 14호로 지정된 이 비는 1965.6.9. 창성사지에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로 이전되었다. 


 

38. 미륵당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

지 정 일  1986.04.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

시 대  조선시대

마을 수호신으로 믿어지던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집으로 1960년에 증축하여 법화당이라 개명되었다. 사방 1칸, 주칸 3.1m의 벽돌로 축조된 작은 건물이며, 지붕은 맞배이다.

 

미륵당안의 미륵입상은 총 높이 249cm, 가슴 폭 107cm, 머리 높이 114cm정도이며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큰 머리, 세밀한 옷주름, 생동감 없는 얼굴표현 등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민간신앙과 결합된 미륵불상에서 보이는 공통된 특징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39.정유선생 묘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6호
지 정 일  90.1.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하동 408-1

시 대  조선시대


정유선생은 조선중기 중종 명종대의 문신으로 자는 공탁, 호는 양진당, 본관은 온양이다. 연산군 10년에 출생하여 무술년에 탁영시에 급제한 후 승문원에 처음으로 보하였으며 이후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어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온후 사헌부 대사헌으로 승진하였으며 한성부윤으로 전보하였다가 황해도 관찰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묘는 부인과 쌍분으로 묘역이 100여평이며 중앙에 묘비 1기와 상석1개가 있으며 문인석2기, 망주석2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 묘역은 1566년에 조성하고 묘비는 1586년에 건립하였다.

 

 

40.이목동 출토 석곽묘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7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시대 
 

장안구 이목동에서 발굴조사되어 이전 · 복원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무덤이다. 이목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 2기,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청동기시대의 구멍무늬토기, 그물추, 가락바퀴, 돌칼 등과 통일신라시대의 굽다리완, 뚜껑달린 굽다리접시, 병, 완 등이 출토되었다. 

 

41.꽃뫼 제사유적지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8호
지 정 일  90.1.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688-4

시 대  조선시대


수원시 중심 서쪽에 있는 서호천 근처의 낮은 구릉에는 꽃뫼 제사 유적지가 있다. 여러형태의 묘와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각종 용구들이 발견되어, 꽃뫼 제사 유적지라 부르고 향토 유적 제8호로 지정 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제사 유적들은 철기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것들이라 한다.

 

팔달구 화서동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수원대학교박물관에서 1997년 조사하였다. 청동기시대의 구멍무늬토기편과 삼국 · 조선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한편 2000년 지표조사 중 빗살무늬토기편이 채집된 바 있다.

 

 

42. 버드내 산제당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1호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세류3동 156-62
지 정 일  2003.11.27

시 대  조선시대
 

옛부터 이어져온 수원시의 대표적인 마을 제당 중의 하나로서 윗버드네(세류3동)의 산제당에서 벌어지는 마을 공동의 제의는「당제」,「당제사」,「산신제」,「산제사」등으로 불린다. 본래 당집의 형태는 전하는 바가 없으나, 흙벽에 기와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집의 훼손이 심하여 1956년과 2007.7.10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당제는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 저녁에 벌어지며, 마을의 평안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43.동래정씨 약사불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3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미상

 

석불은 가운데 약사여래상, 양옆으로 시동이 좌우로 새겨져 있다. 삼존상이 동일석으로 조각된 것으로, 본존은 연화대좌위에 좌상으로 새겨져 있고 양쪽에는 협시상으로 동자상을 입상으로 조각하고 있다. 본존의 높이는 120cm로 두광, 육계, 이마 중앙에 백호, 삼도, 통견의의 표현을 하고 있다. 동자상은 높이 100cm로 흔히 동자상이 민머리인데 비해 이들 동자상은 앞머리가 내려진 머리칼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미숙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화서동 숙지산의 동쪽에 자리한 동래정씨 세장지 아래쪽에 자리하던 것을 2008년 이전하였다. 

 

44.만석거(일왕저수지)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4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239-2 등

시 대  조선시대
 

만석거는 장안문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안정된 농업경영을 위한 수리시설로서 정조 19년(1795) 축조되었으며 일왕저수지나 조기정방죽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조대왕의 화성능행차 시에는 이곳을 경유하여 장안문을 통과하고 현륭원으로 원행이 이루어졌다. 저수지 가운데는 작은 섬을 두어 화목을 조화롭게 심고, 호수에 연꽃을 심었으며, 호수 남단의 약간 높은 곳에는 영화정을 세워 정자에서 만석거 부근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만석거 옆에 건립되었던 영화정은『화성성역의궤』「영화정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영화정은 1996년에 원래의 자리에서 동쪽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는데 송죽초등학교와 만석거 사이에 있다. 당시에 세워졌던 만석거 표석은 유실되었고, 현재의 것은 최근에 세운 것이다.

 

45.숙지산 화성 채석장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2동 산41

시 대  조선시대
 

화서전철역 부근 구 연초제조창의 건너편 숙지산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성돌의 채석이 이루어졌던 유적으로 팔달산과 함께 중요한 성돌의 공급원이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숫돌같이 판판한 치도를 통하여 수레을 이용 화성 축성 장소까지 성돌을 운반하였다.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여러 곳에 남아있어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유적이다. 

 

46.화성관련 표석 일괄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6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정조의 현륭원 원행길에 이정표로 세운 상류천, 하류천, 괴목정교 표석과 축만제의 둑에 세워진 축만제 표석, 정조대의 원행길에 들어있지 않아 1834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창교 표석 등 5기가 일괄지정되었다. 


 
47.전주류씨 효자정문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7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상촌의 전주 류씨 사호공파의 종가인 류원상씨 댁 대문 옆에 있었으나 2008년 수원박물관으로 이전 · 설치하였다. 정려각 안에는 류태명과 류의 효자 정려가 상하로 걸려 있다.

 

유태명(1666~1716)의 자는 도휘, 호는 현산옹, 본관은 전주이다. 1743년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정려에는“효자통정대부승정원우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유태명지문상지19년개해윤4월일명정(孝子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柳泰明之門 上之十九年癸亥閏四月日 命旌)”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금촌 검산리 선영에 있다.

 

유의(1734∼1799)의 자는 의지, 호는 운송 · 추범이다. 유태명의 증손으로 대사간 선양의 아들이다. 1812년 효자정려를 받았으며, 정려에는“효자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유의지문상지12년임신3월일명정(孝子嘉善大夫戶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柳誼之門 上之十二年壬申三月日 命旌)” 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안양 석수동 선영에 있다. 

 

 

48.옛 수원문화원 건물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8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교동 74-1
시 대  근대
 

1956년 당시 역전동(현 매산로) 가로변의 수원읍사무소 자리에 신축했던 옛 수원시청사로, 지상 2층 규모의 벽돌조 건물이다. 평면은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며, 지붕은 모임지붕 형태로 되었고 시멘트 기와를 이었다. 가로에 면한 정면 중앙의 현관 상부에 캐노피를 설치했으며, 현관 포치는 만들지 않았다. 현재는 캐노피 아래에 다시 목조로 눈썹지붕을 만들고 기와를 얹은 작은 차양을 설치하였다.

 

상·하층의 창문은 가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를 하였고, 돌출된 상·하인방 및 좌우 샘틀은 철근콘크리트조로 만들어 벽체와 구분하였다. 특히 1층 창호의 상인방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만들고, 2층 창호의 상인방에는 상·하면에 수평 돌림띠를 돌려 장식하였다. 


 
49. 옛 부국원 건물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19호

지 정 일  2006.12.26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교동 93-7
시 대  일제강점기
 

교동사거리에서 수원향교 방향 골목길에 있다. 부국원은 1916년 설립된 회사로 주로 농작물 종자와 농기구 등을 판매하였다. 지상 2층에 벽돌 조적조로 구조부를 만들었으며, 2층 바닥은 철근 콘크리트조로 만들었고, 건물 정면과 후면에 3층 높이의 박공벽을 세웠다.

 

현재 박내과의원 건물로 사용 중이데, 내부 지붕층을 개조하여 3층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건물이 많이 노후되었으나 그 외에는 특별한 개보수 등을 하지 않고 있다.

  

 

50.이고 묘역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22호

지 정 일  2007.06.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51-1 

시 대  조선시대

 

이고(1338-1420)의 본관은 여주이고 호는 망천이며, 사온령공 이윤방(1310-?)의 아들이다. 고려 말 관직에 나아가 한림원학사에 올랐으나 고려가 쇠망해 가자 수원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수원에서 널리 알려진 팔달산, 권선구 등의 지명은 모두 이고와 관련된 것이고, 1795년 정조가 묘역에 치제하면서‘팔달산주인’으로 일컬어 수원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묘역에는 후대에 마련한 것으로 추정되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과 영조 9년(1733)에 건립한 묘표가 있다.

 

대리석의 비신 앞면 중앙에 큰 글씨로“고려한림원학사이고지묘9高麗翰林院學士李皐之墓)”라고 하여 무덤 주인의 신원을 밝힌 후 뒷면에는 그 행적에 대해 12대손 이봉익이 지은 글을 11대손 이량이 써서 새겨 놓았다.

 

이고 묘역은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의 묘역으로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으로 평가된다. 

 

51.안동김씨 참의공파 세장묘역

 

종 목  수원시 향토유적 제23호

지 정 일  2007.06.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34-1, 42-1

시 대  조선시대

안동김씨 참의공파는 수원지역의 대표적 성씨 중 하나로서 형조참의를 지낸 김언침(1514~1584)과 그 후손의 묘역으로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뉘어 분포되어 있다. 묘역과 석물양식이 거의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01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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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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