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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수원에 있는 문화제는 뭐가있나요?
j_s_**** 조회수 2,474 작성일2006.09.16

저 수원의 문화제가 자사희 나와있는 대가 없어서 그런대여~~

되도록이면 빨리...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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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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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종 목 보물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시 대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2.팔달문

 

종 목 보물 제402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3.화서문

 

종 목 보물 제403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장안동 25-2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4.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5.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6.파장동 이병원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시 대 조선시대

 

안채·바깥채·헛간·광이 울안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고종 25년(1888)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집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른다. 주변에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옛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으로 부엌·대청·안방·건넌방으로 되어있다. 초가인 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동편의 끝칸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바깥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배치형태이며, 이 마을의 대부분 집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방은 위아랫방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하였고 대문만이 부엌을 향하였다. 마당 앞에는 헛간·외양간이 있다.

 

바깥마당 맞은편의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 연대를 보인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쪽으로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살렸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7.지지대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47-2

시 대 조선시대

 

서울에서 수원으로 오는 길의 제일 먼저 이르는 고개에 서 있는 비로, 조선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고 있다.

 

정조는 화성(지금의 수원)에 있는 부친의 능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면, 항상 이 고개에서 가마를 멈추고 능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그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그곳에 돌을 쌓아 작은 대를 만들어 느릴 지자 두 자를 붙여서 ‘지지대’라 이름하였다. 이 후 고개이름도 지지대 고개로 바뀌었으며, 순조 7년(1807) 그의 효성을 전하자는 신현의 건의에 따라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비문은 홍문관제학으로 있던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수원유수를 지내던 홍명호가 썼다. 현재는 비각을 지어 모시고 있는데, 부친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듯 하다.

 

8.팔달문 동종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76.08.2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동

시 대 조선시대

 

팔달문 2층 누각에 걸려있는 높이 123㎝, 입 지름 75㎝ 크기의 동종이다. 종을 매다는 용뉴에 1마리 용을 조각하였고, 그 아래 약간 오무라든 종의 몸체를 연결하였다.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을 준다. 용뉴에는 활짝 핀 꽃을 생동감있게 장식하였으며, 종의 위쪽에는 2단으로 정사각형의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띠에 잇대어 4곳에 유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유곽 둘레에 덩굴무늬를 새겼다. 돌출된 9개의 유두는 보상화무늬로, 가운데 1개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종의 중간에는 이 종에 관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고, 아래쪽에 보상화와 덩굴무늬를 새긴 띠가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고려 문종 34년(1080)에 개성에서 만들었고, 조선 숙종 13년(1687)에 만의사 주지 도화승이 불교 의식에 사용하고자 다시 주조하였다고 한다.

 

이 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용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9.봉령사 석조삼존불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령사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봉령사 대웅전 뒤편 언덕에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출토된 삼존불이다. 삼존불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하다.

 

각각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를 가지고 있으며, 1구는 좌상이고 2구는 입상이다. 앉아 있는 본존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은 민머리에 양쪽 귀와 목이 짧으며, 돌이 닳아서 희미하게 보이지만 얼굴은 원만한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두 협시불 역시 본존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옷주름을 잡고 있는 점이 다르다.

 

각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0.화성행궁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65호

지 정 일 1972.07.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248-1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정조 20년(1796)에 수원성을 쌓은 뒤 팔달산 동쪽기슭에 세운 행궁(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으로 수원성의 원래 이름이 화성이었으므로 화성행궁이라고 부른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능인 화산릉에 참배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행궁에는 정전인 봉수당을 비롯하여 경룡관·복내당 등의 전각, 문루 등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건물을 헐어내어 현재는 낙남헌만이 남아있고 1994년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하였다.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ㄱ자 건물인데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一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 기단은 기둥돌과 장대석을 사용하여 틀을 만들고 내부에 벽돌을 채워넣은 특이한 형식인데, 화성 동북쪽에 있는 방화수류정에서도 이와 같은 양식을 볼 수 있다.

 

11.수원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43

시 대 고려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동시에 담당하였다.

 

원래 고려 원종 22년에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져 있던 수원향교는 조선 정조 19년(1795)경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향교는 앞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3칸에 문을 달았고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고 동무와 서무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제사 의례에 적합하도록 앞면에 개방된 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2.팔달산 지석묘군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1.04.1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산3-1

시 대 선사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남쪽 기슭에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8m이고 두께가 0.45m이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쪽 기슭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평평한 구릉 위에 1호·2호 고인돌이 서로 가까이 있다. 이로부터 위로 100m쯤 떨어진 곳에 3호·4호가 있는데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고 옆에 덮개돌로 보이는 돌이 흙속에 묻혀 있다.

 

 

200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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