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안산,수원에있는문화재(오늘안에)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6,663 작성일2009.10.12

오늘안에 답변 해주셔야 합니다

 

안산,수원에 있는 문화재는 어떤것들이있을까요??

 

종목,명칭,사진,소재지,설명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청석초 4-2 신은지)칭구들아 내꺼 배끼지말어~~

 

내공,,15개!!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안산의 문화재)

 

1.한응인영정 및 재실유물일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3호

지 정 일 1995.04.24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1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한응인(1554∼1614) 선생의 초상화 1폭과 초상화를 모셔두었던 사당 안에 남아 있는 9점의 목제 제사도구들이다.

 

한응인은 글씨를 잘 썼으며, 명나라를 오가며 조선과의 화합을 이끌어내었다. 예조판서·우찬성·우의정에 오르고, 네 차례나 공신에 책봉되기도 하였으나,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비단 위에 그린 선생의 초상화는 가로 91.5㎝, 세로 164㎝의 크기이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두 손을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얼굴은 가는 붓으로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표현하였는데, 눈썹과 수염의 움푹한 곳은 붓질을 계속해 어둡게 하고,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을 적게 하여 밝게 하는 훈염법으로 처리하였다. 머리에는 오사모를 쓰고 정장 관복을 입었으며, 가슴부위에는 파도 위를 나르는 두 마리의 학무늬를 그렸는데 금칠을 하여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가슴에 두른 각대는 1품 이상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선생이 문관 종1품 때의 모습임을 짐작하게 한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한 그림형식으로,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을 따르고 있다.

 

9점의 목제 제사도구로는 교의(죽은 이의 위패를 모셔두는 의자처럼 생긴 도구) 2점, 주독(죽은 이의 위패를 넣어두는 궤) 1점, 신주(죽은 이의 위패) 1점, 제상 2점, 향로상 1점, 모자상(제사 지낼 때 신이 내리게 하기 위해 술을 부어두고, 띠 묶음과 모래가 담긴 그릇을 올려두는 상) 2점이 남아 있다. 이들은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목제도구 연구에 기준이 될만한 소중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2.이익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0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1681∼1763)의 묘소이다.

 

부친의 귀양지에서 태어나 이듬해 부친을 여의고, 형 이잠에게 글을 배웠으나 형마저 당쟁으로 희생되었다. 이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실학파의 시조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고찰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대표적 저서『성호사설』을 통해 정치·지방제도·재정·경제·과거제도·학제·병제·관제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대안을 피력하였다.

 

그의 묘는 직계 후손이 없어 방치되었으나 1967년 5월 성호이익추모회에 의해 묘역이 정비되고 묘비와 향로석·망주석 등이 새로이 세워졌다. 

 

3.별망성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73호

지 정 일 1979.09.03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656(공원)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 남양만을 거쳐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바닷가에 있는 두 곳의 얕은 산봉우리를 서로 연결하여 돌로 쌓아 만든 해안산성이다.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 지역에 만호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과 연관하여, 이곳에 수군 만호영이 있었으나 갯벌이 밀려 배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인천의 영종포로 영을 옮겼다가, 바다가 다시 깊어져 배의 출입이 가능해지자 다시 군영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의 크기는 둘레 1040m, 높이 1.2∼2.1m라는 옛기록이 있지만, 한국전쟁 때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을 1988년 복원하였다. 현재 크기는 길이 225m, 높이 1.45m이다. 성벽의 바깥은 돌을 수직에 가깝도록 쌓았고 안쪽은 완만하게 흙을 다져 놓은 상태이다. 평지 쪽에는 군영지로 보이는 터가 남아 있으며, 성 가운데에서 청자와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이 성의 이웃에는 목내리산성, 군자산성이 있어 함께 남양만을 방어하는 서해안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4.안탄대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83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61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선조의 외증조인 안탄대의 묘이다.

 

그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이다. 창빈은 영양군·덕흥군의 생모이며, 덕흥군은 선조의 생부이므로 그가 선조의 외증조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사실상 부원군(府院君:왕비의 친아버지)의 위치에 있었지만 부귀영화를 사양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으며 죽은 후에는 우의정의 벼슬이 내려졌다.

 

묘는 부인 황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묘비는 효종 7년(1656) 외손 계열인 신최가 짓고, 신승이 글씨를 쓴 것이다.

 

5.고송정지(탄원고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01호

지 정 일 1987.02.12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산58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순조 27년(1827)에 김처일이 그의 9대조인 김충주를 애도하여 지은 고송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자리이다.

 

김충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하자 밤중에 도성을 도망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화정동에 숨어살면서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베옷에 평민들이 쓰던 모자를 쓰고 다녔다고 한다. 단종에 대한 충성이 약해질 때마다 단종의 묘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명에 숨진 것을 애통하게 여겨 흘린 눈물에 소나무가 말라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풀을 엮어 집을 짓고 숯을 구워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며 스스로를 숯굽는 노인<탄옹>이라 했다하여 고송정터를 탄옹고터라고도 한다.

 

정자는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자 왼쪽에는 ‘탄옹고지’라고 새긴 바위가 있으며, 고송정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그가 단종을 그리며 울던 망월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6.안산읍성 및 관아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27호

지 정 일 1991.10.19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산26-4일원 
시 대  안산읍성 - 고려후기, 관아지 - 조선후기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에 있는 안산읍성과 관아지는 수암봉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는 능선을 이용하여 평지를 감싸도록 쌓았다. 전형적인 평지산성으로,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은 직사각형 모양이고 각 모서리가 약간 둥글게 처리되었다. 성의 둘레는 772m이고, 서쪽과 북쪽은 바깥쪽이 매우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어 주요 방어 지역이었을 듯하다. 성의 남쪽에 문터가 있고 북서쪽 꼭대기의 편평한 터는 장대(주변보다 높게 쌓아올린 장수의 지휘대)가 있던 자리로 여겨진다.

 

성의 형태로 보아 행정적 역할이 강한 전형적인 읍성으로, 조선 초기 왜구를 막기 위해 세웠던 서해안 지역의 여러 읍성과 같은 계통에 속한다.

 

관아터는 조선 현종 10년(1669)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관아의 시설들은 모두 파괴되고 곳곳에 흩어진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발견된다. 


7.한응인 묘역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57호

지 정 일 1995.08.07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86-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 백졸재 한응인(1554∼1614) 선생의 묘소이다.

 

선조 9년(1576)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을 적발하여 그 공으로 호조참의가 되었고 다음해 평난공신 1등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왕을 따라 평양에 도착하여 임진강 방어에 힘썼으나 왜장 가토의 유인작전에 속아 크게 패했다. 그 후 요동에 건너가 명나라에 구원군을 급히 파병해 줄 것을 요구했고,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올 때는 그를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오가면서 두루 관직을 지내고 선조 40년(1607)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묘는 부인 전주 이씨와의 합장묘이고 봉분 아랫부분에는 2단으로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멀리서도 묘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돌기둥)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묘역 오른쪽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가 세워져 있는데, 김류가 비문을 짓고 한인급이 글씨를 써서 인조 20년(1642)에 세운 것이다. 

 

 

8.사세충렬문

 

종 목  문화재자료  제8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 
시 대  조선시대


정문은 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가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을 일컫는다.

 

사세충렬문은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김여물(1548∼1592)과,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패하고 죽음으로써 열녀정신을 지킨 이 집안 여인들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지은 정문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 고쳐 지은 것이고 그 후 1983년 보수공사를 했다.

 

김여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웠으나 당하지 못하여 강에 투신·순국한 인물이다.

 

열녀는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 김씨, 아들 김루의 처인 진주 유씨,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 박씨, 증손자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로 적군으로부터 순결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 물에 몸을 던졌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되어 있는데,가운데 칸에는 민가 대문 형식의 문을 달고 ‘사세충렬문’이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안쪽은 2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른쪽방은 마룻바닥으로 김여물의 충신정문이 있고 왼쪽방에는 4대 열녀의 정문을 세웠다.

 

9.오정각

 

종 목  문화재자료  제7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29 
시 대  조선시대


정문은 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가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을 일컫는다.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이조판서 김문기와 아들 현석에 대한 충신정문과 효자정문 등 5대에 걸친 정문을 한 곳에 모셔놓은 곳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고종 7년(1870)에 세웠다고 하며, 1968년 보수하였고 1976년 단청을 거쳐 1981년에 시흥군에서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정각 입구에는 1983년에 세운 ‘오정각중수기념비’가 있는데, 비석의 앞면에는 ‘오정각중수기념비’라 새겼고, 뒷면과 양쪽 옆면에는 김문기 등 5대의 행적, 관직, 덕망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정각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가운데 칸 처마 밑에는 오정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한 칸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시 ‘오세충효(五世忠孝)’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는 김문기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건물 뒤쪽에는 김문기의 정문을 중심으로 5대 정문이 서 있다. 

 

10.청문당


종 목  문화재자료  제94호

지 정 일 2000.03.24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261-15 
시 대 조선시대


진주 유씨 16세손 유시회(1562∼1635)가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이다.

 

원래는 충북 괴산에 살았는데 유시회의 조카 적이 선조의 사위로 정해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선조의 명으로 이곳 안산에 묘자리를 정하고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 나라에서 넓은 땅과 안산 바닷가의 어염권을 받아 대대로 살아 오면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청문당은 조선 후기에 와서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문인들의 교류장으로 쓰였으며, 특히 조선시대 4대 서고의 하나인 청문당의 만권루는 이들의 학문적인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수원의 문화재)

 

1.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면 적 188,04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면 적 12,28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3.화성행궁


종 목  사적  제478호 
면 적 37,268㎡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4.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종 목 보물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

시 대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선봉사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5.팔달문


종 목  보물  제402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138 등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6.화서문


종 목  보물  제403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25-2 
시 대 조선시대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7.채제공 초상화(시복본)

 

종 목  보물  제1477-1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선경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이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작)>은 채제공 73세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우측 상단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이 있다.

 

시의 내용대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기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8.박유명 초상

 

종 목  보물  제1489호  
지 정 일 2006.12.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역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박유명(1582∼1640)은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그 뒤 당상선전관을 거쳐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박유명 초상>은 낮은 오사모를 쓰고 과장된 둥근 어깨를 하고 있으며 단령이 뒤로 뾰족하게 뻗친 모양, 바닥의 채전 등에서 17세기 공신 도상의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 초상과 함께 후대의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 이모본은 거의 동일한 형상이며 안료는 보다 선명하다.

 

<박유명 초상>은 17세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모본의 경우는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지므로 원본 1점만을 지정한다.

 

ㅇ 규격(세로x가로) : 170 x 88.3cm 

 

9.팔달문 동종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지 정 일 1976.07.0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팔달문 2층 누각에 걸려있는 높이 123㎝, 입 지름 75㎝ 크기의 동종을 이전한 것이다. 종을 매다는 용뉴에 1마리 용을 조각하였고, 그 아래 약간 오무라든 종의 몸체를 연결하였다.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을 준다. 용뉴에는 활짝 핀 꽃을 생동감있게 장식하였으며, 종의 위쪽에는 2단으로 정사각형의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띠에 잇대어 4곳에 유곽과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유곽 둘레에 덩굴무늬를 새겼다. 돌출된 9개의 유두는 보상화무늬로, 가운데 1개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종의 중간에는 이 종에 관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고, 아래쪽에 보상화와 덩굴무늬를 새긴 띠가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고려 문종 34년(1080)에 개성에서 만들었고, 조선 숙종 13년(1687)에 만의사 주지 도화승이 불교 의식에 사용하고자 다시 주조하였다고 한다.

 

이 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용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0.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3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시 대 조선시대


안채·바깥채·헛간·광이 울안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다.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고종 25년(1888)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집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른다. 주변에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옛스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으로 부엌·대청·안방·건넌방으로 되어있다. 초가인 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동편의 끝칸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바깥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서해안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배치형태이며, 이 마을의 대부분 집도 여기에 속한다. 사랑방은 위아랫방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하였고 대문만이 부엌을 향하였다. 마당 앞에는 헛간·외양간이 있다.

 

바깥마당 맞은편의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고, 헛간채 남쪽에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 연대를 보인다.

 

부엌 가까이 우물이 있고 뒷동산쪽으로 감나무·단풍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살렸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

 

11.지지대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47-2

시 대 조선시대


서울에서 수원으로 오는 길의 제일 먼저 이르는 고개에 서 있는 비로, 조선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고 있다.

 

정조는 화성(지금의 수원)에 있는 부친의 능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면, 항상 이 고개에서 가마를 멈추고 능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그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그곳에 돌을 쌓아 작은 대를 만들어 느릴 지자 두 자를 붙여서 ‘지지대’라 이름하였다. 이 후 고개이름도 지지대 고개로 바뀌었으며, 순조 7년(1807) 그의 효성을 전하자는 신현의 건의에 따라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비문은 홍문관제학으로 있던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수원유수를 지내던 홍명호가 썼다. 현재는 비각을 지어 모시고 있는데, 부친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듯 하다.

 

12.봉령사 석조삼존불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령사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봉령사 대웅전 뒤편 언덕에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출토된 삼존불이다. 삼존불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부분적으로 훼손이 심하다.

 

각각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를 가지고 있으며, 1구는 좌상이고 2구는 입상이다. 앉아 있는 본존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은 민머리에 양쪽 귀와 목이 짧으며, 돌이 닳아서 희미하게 보이지만 얼굴은 원만한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두 협시불 역시 본존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옷주름을 잡고 있는 점이 다르다.

 

각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3.봉녕사 불화(신중탱화.현왕탱화)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지 정 일 1994.10.2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봉녕사 
시 대 조선시대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한 종류이다. 봉령사 약사전 안에는 2폭의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데, 신중단에 모셔둔 신중탱화 1폭과 현왕단에 모셔둔 현왕탱화 1폭이 그것이다.

 

신중탱화는 가로 168㎝, 세로 17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그림은 위쪽에 제석과 범천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아래쪽에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신장과 용왕, 금강상 등을 그려놓았는데, 각 상들의 배열과 채색이 우수한 조화를 이룬다. 제석과 범천은 석가불을 보좌하는 보살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의 성격을 띤다. 위태천은 남쪽을 지키는 여덟 장군 중 하나로 역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그림의 내력을 적은 기록으로 보아, 조선 고종 28년(1891) 화사 광조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왕탱화는 가로 131㎝, 세로 104㎝의 크기로, 역시 비단에 채색하였다.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재판을 하는 현왕과 그 무리들이 묘사되며, 시왕도와 거의 비슷한 배열을 하면서 지옥 장면만 생략한다. 이 그림 역시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판관·녹사 등을 배치하였는데, 약사전에 함께 걸려 있는 다른 탱화들과는 구도나 채색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폭 아래쪽의 기록을 통해 고종 15년(1878) 화사 완선이 제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14.노송지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9호

지 정 일 1973.07.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이목동·송죽동·정자동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수원의 노송지대는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있는 지지대고개를 시작으로 옛날 경수국도를 따라 소나무들이 길 양편에 늘어서 있는 약 5㎞ 구간을 말한다.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개인용도의 내탕금 1,000냥을 하사하여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대부분 말라죽고, 38그루 정도의 노송만이 살아 남아 있으나, 아직도 긴 가지가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가 울창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수원의 노송지대는 수원화성과 함께 수원시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픈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5.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38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 김준용(?∼1641)이 중국 청나라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한 비가 있는 곳이다.

 

김준용은 선조 41년(1608)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에서 중국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후 지방관과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죽은 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조 18년(1794) 수원성 축성의 총 책임을 맡았던 영의정 채제공이 그의 업적을 전해듣고 전승터였던 광교산 바위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16.심온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3호

지 정 일 1979.09.10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13-1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문신 안효공 심온(?∼1418)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 왕조 건국에 참여하였다. 태종 11년(1411)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포악한 정치를 일삼던 박영우를 파직시키고 대사헌이 되어 관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이 되었다. 태종 18년(1418)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은 국왕의 장인으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 등이 거짓으로 꾸민 사실이 후에 밝혀지게 되어 세종은 관직을 복직시키고 안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석등과 좌우에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안평대군이 글을 쓴 묘비가 있다. 묘역 아래에는 9대손 심하단이 글을 짓고 서명균이 글씨를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17.팔달산 지석묘군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

지 정 일 1991.10.1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산3-1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남쪽 기슭에 바둑판식 고인돌 4기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8m이고 두께가 0.45m이다.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오른쪽 기슭을 따라 팔달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평평한 구릉 위에 1호·2호 고인돌이 서로 가까이 있다. 이로부터 위로 100m쯤 떨어진 곳에 3호·4호가 있는데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고 옆에 덮개돌로 보이는 돌이 흙속에 묻혀 있다. 

 

18.아담스기념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

지 정 일 2001.01.22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0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말 수원지방에는 감리교가 들어오면서 수원과 남양 지역의 교회들이 많은 남녀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이 지역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삼일학교의 아담스 기념관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국 아담스(Adams) 교회 신도들의 온정으로 신축되었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W.A.Noble) 목사는 삼일학교가 설립초부터 교사도 없이 중포산 기슭의 교회 건물에 더부살이하고 있어 고통을 겪는 딱한 사정을 아담스 교회에 호소하였고, 교인들이 교사의 건립기금으로 20,000엔을 노블 목사를 통해 삼일학교 측에 전달하여 1923년 새 교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당시 교회의 신축 설계는 미국 아담스 교회 선교부에서 하였으며 공사는 중국인 왕영덕이 맡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새 교사인 고 최태영 기념관을 건립할 때까지 교실과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나 이후에는 삼일중학교의 본관으로 교장실과 교무실, 채플실, 기도실 등으로 사용하였다.

 

1988년에는 현관 부분을 수리하였고 1층 내부에 강관 기둥을 설치하여 보강하였으며 1997년에는 건물의 안전도와 결로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1층을 미술과 특별교실과 방송실, 창고 등으로 쓰고 있으며 2층에 화장실을 증축하여 재단사무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농구부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스 기념관은 우진각지붕의 2층 벽돌조 양옥으로 건물 한쪽에 치우쳐 현관이 위치하고 있다. 지하층에는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고 1,2층은 적벽돌로 벽체를 쌓았으며 층간에 목조 마루틀을 설치하여 바닥을 꾸몄다. 지붕은 벽체 위에 목조 트러스(truss)를 올리고 널판을 깔아 함석판을 올린 구조이다. 수원지역에 세워진 기독교 선교학교(mission school)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음을 고려해볼 때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함.

 

19.수원축만제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축만제둔의 관개시설로 만들어졌다. 정조23년(1799) 정조는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만제를 만들게 하고 수문 2곳을 갖추었다. 몽리면적은 232두락으로 화성 주변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으며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뒤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로 불리고 있으며 서호에 비치는 낙조로 유명하다.

 

20.여기산 선사유적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01호

지 정 일 2005.10.17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6-1외 
시 대 청동시대


여기산유적은 서호 서쪽의 구릉에 있다. 1979~1984년까지 4차에 걸쳐 숭실대학교박물관에서 유적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경질무문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원삼국시대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터의 시설 중 특징적인 것은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 시설이 확인되었고, 서까래와 볏집 지붕이 조사되어 당시의 가옥구조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용구인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거지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어 서호 일대 주변 저습지대에서 벼농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갔음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수원지방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21.수원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권선구 교동 43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동시에 담당하였다.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던 수원향교는 조선 정조 19년(1795)경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향교는 앞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3칸에 문을 달았고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고 동무와 서무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제사 의례에 적합하도록 앞면에 개방된 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2.박유명 초상 모본

 

종 목  문화재자료  제142호

지 정 일 2009.03.1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원본인 보물 제1489호 박유명 초상화를 이모한 초상으로 원본에 충실하며, 17세기 공신도상 중 정사공신상과 진무공신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09.10.12.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문화재청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