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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칭기스칸은 몇살까지 살았나요?
추풍령감자탕 조회수 902 작성일2006.04.08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책에서 칭기스칸이 80세의 나이로 말에서 떨어진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봤는데요, 드라마에서는 6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나오네요.

 

어느게 맞는 건가요?? 보니 출생한 년도는 확실하지 않던데 단지 추측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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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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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년 8월18일 징기스칸은 65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정확히 사인이 무슨 병이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말라리아에 의해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징기스칸의 사망에 대한 기술부분만 copy,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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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www.khaan.net/baikal/man/jinggishan.html

1219년 징기스칸이 호라즘정벌에 나설 때 서하왕에게 원병 차출을 요청했으나 서하왕은 몽골을 지극히 싫어한 나머지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이를 응징하기 위해 서기 1226년에 징기스칸은 서하(西夏, 탕구트)로 침입했다. 침입도중에 한가 한 틈을 타서 비탈진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크게 다쳤다. 토룬 체르비가 원정을 연기하자고 건의했으나 징기스칸에 의해 거절되었다. 징기스칸이 서하왕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으나 서하의 대신 아샤감부는 도발 책임을 한 몸에 지고 징기스칸에게 도전했다. 몽골군은 1226년 3월 에친 고르에서 서하로 쳐들어가 감주(甘州 : 지금 酒泉)을 점령하고 여름 주둔지를 산위에 설치하여 쉬고 가을에 동쪽으로 나아가 양주(凉州)를 점령했다. 서하의 대신 아샤감부군을 아랴산산맥에서 격파하고 서하인을 닥치는대로 마음대로 처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야율초재는 비옥한 땅과 솜씨있는 주민들의 가치를 역설하고 주민을 보호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면 파괴하여 살육하는 것 보다 훨씬 이익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징기스칸은 야율초재로 하여금 규칙적인 행정을 취하도록 조치했다.

한편 오고타이는 무장 차간을 사령관으로 하여 1226년에 금나라로 진입하여 금의 기병을 제압하고 위수(渭水)를 따라 서안(西安)까지 이르러 변경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자 겁을 먹은 금제(金帝)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하여 1226년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후 징기스칸은 서하(西夏)만 공략할 때 우려되는 배후위협을 제거했다.

징기스칸은 몸이 계속 쇠퇴했지만 서하 정벌을 재촉했다. 1226년 11월에 영주(靈州 : 연대기에 도루메게이로 표시된 도시)를 공격하여 서하의 원군을 평원에서 격파하고 12월에 영주를 점령했다. 징기스칸의 보조군은 수도 영하(寧夏 : 지금의 銀川)를 포위했다. 징기스칸은 주력군을 이끌고 하주(荷州 : 蘭州 서남쪽 100킬로 되는 지역)를 공략했다. 그리고 3월에 서영(西寧)을 함락했다. 4월에 육반산(六盤山)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그리고 여름 더위를 피했다. 서하왕 이현(李晛)은 화의를 청했으나 거절되고 서하왕의 처형은 토룬 체르비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결국 영하성은 함락되고 서하왕 이현(李晛)은 항복했다. 그래서 서하는 망하고 말았다. 1227년 2월 장남 주치는 아랄해 북쪽 영지에서 병사했다. 징기스칸이 서하를 점령한 이유는 배반에 대한 응징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금국의 서쪽을 노출시켜 차후 금정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하를 항복받은 후 징기스칸은 더위를 피하여 육반산(六盤山)에 머물며 재발한 병을 조리했다.

징기스칸은 중병으로 사망하기 전 금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고 죽는데 대한 아쉬움을 남기면서 아들 오고타아와 투루이 및 제장을 모아놓고 금나라를 점령하는 방안을 유언하고 병사했다.

 

 

제가 찾아보니 이게 맞습니다.

200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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