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김정호에 관하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4,727 작성일2009.04.21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 수성구 범물동 복명초등학교에 다니는 5학년 3반 심채영이에요~제가 숙제로 김정호에 관해서 조사해 가야 하는 데요, 이것들 좀 알려주세요.

1.김정호의 어린시절

2.대동여지도를 만들때 있었던 일이나 사건

3.김정호가 남긴 그밖의(대동여지도 제외)문화 유산

이것들 말고도 다른것들도 괜찮아요~ (단, 내공냠냠이나 무서운 이야기, 욕설,나쁜말 등을 쓰면 곧바로 신고합니다.)

그리고 혹시 제 친구이거나 아는 분이면 답변으로 어느초등학교 몇학년 몇반 누구인지 써주고 인사 좀 해 주세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4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whdd****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다. 조선조 말에 《대동여지도》를 만든 분, 지도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을 여러 번을 올랐다는 그런 이야기도 들은 듯하고 하여간 그분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지리학자이면서 지도제작자인 줄 알고 있는 필자는 최근 그분이 썼다는 《대동지지(大東地志)》란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국학자료원에서 만든 《대동여지도국한문색인》본과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영인본으로 펴낸 《대동지지》를 각각 구해서 지금 읽고 있는 중인데 김정호 선생께서 우리 고대사에 대해 자기 의견을 단 부분을 읽어 갈 때마다 이 분은 정말 대단한 분이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으며 그 기분을 말하라고 한 마디로 마치 강한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커다란 충격을 것처럼 그저 멍멍하기만 하다.

 

  필자가 고산자에게 속된 말로 뿅가게 된 것은 후술하겠지만 고구려의 서울 평양이라는 지명의 변천사에 대한 창발적 견해와 어환의 《위략(魏略)》에 나와 있다는 조선후(朝鮮侯)의 자손들이 거만을 떨므로 연나라에서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방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렀다는 내용 등과 관련하여 주석을 통해 보여준 선문답처럼 가볍게 내던졌던 몇 마디 말이 그저 촌철살인 그 자체요, 구구절절 관주가 아닐 수 없었다. 아! 바로 이거였구나 하면서 제 무릎을 치며 괜스레 서재를 거닐며 깊은 상념에 젖고 말았다. 우리 민족은 왜 이렇게 훌륭한 식견과 학시을 가진 당대의 대학자를 눈여겨 보지 않았는지 우리 민족은 사람 볼 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갔습니다. 

 

  먼저 중국의 주석가들이나 식민사학자들이 줄곧 주장하는 고조선의 서울이 평양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생각건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평양이 세 조선의 서울이라고 하고,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는 패수(浿水)의 주에서 조선국 평양성 동쪽, 오늘날 대통강(大通江)이라는 곳에 있다고 하였으며, 왕검성의 주에서는 곧 평양성으로 기자의 고도이며 오늘날 조선국의 평양부라고 말했는데 이는 《수 · 당사(隋唐史)》 및 《동사(東史)》에 기록된 대로 기록했을 뿐이다.

평양이라 일컫게 된 것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때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곧 오늘날의 요양(遼陽)이다. 장수왕이 수도를 남으로 옮긴 뒤에 옛 서울인 평양과 패수를 신도에 새로운 서울에다 사칭한 것이다. 수 · 당에서도 역시 그대로 답습하여 이렇게 불렀을 뿐이다.

 

  대개 유(幽) · 영(營) 2주는 주나라 때 변방지역으로 기자가 수봉했다는 그 지역의 폭이 조(曹) · 위(衛) · 진(陳) · 정(鄭)나라를 초과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떻게 이 여러 주(州)를 뛰어넘고 또 수십 개의 잡다한 호(胡)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넘어가서 오늘날의 평양에 도읍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국시대 말에 연나라에 격파되어 요좌(遼左)로 옮겨 간 다음에 위만(衛滿)이 도읍한 곳은 곧 험독(險瀆)인데 한나라의 양평(襄平)이기도 하고 또 평주(平州)이기도 한 바, 이곳이 고구려의 옛 서울인 평양인 것이다. 비유컨대, 강좌(江左: 양자강 하류의 동남지역)의 송(宋) · 제(齊) · 양(梁) · 진(陳)이 연(兗) · 예(豫) · 청(靑) · 서주(徐州)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본국의 압록강 동쪽의 낙랑(樂浪) · 평양(平壤)이 영금(寧錦), 요심(遼瀋) 의 구읍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일시적으로 주를 교치(僑置: 빼앗긴 지명을 그대로 쓰면서 그렇치 않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한 것을 빌미로 옮겨간 치소를 수시로 변경해 버리게 되니 신구의 사실이 서로 차이가 생기게 되고 동서의 경계가 서로 서로 바뀌게 되고 마는 법이다.

 

  그 다음에 필자를 감격케 하여 고산자를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지리학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탁견에 있다. 그 내용인 즉, 어환의 《위략(魏略)》에 나와 있다는 조선후(朝鮮侯)의 자손들이 거만을 떨므로 연나라에서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방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렀다는 내용에 대한 고산자의 주석이다. 우리 사학계에 아무도 이 점을 지적한 바 없다고 단언한다. 겨우 리지린이라는 북한 학자가 이와 비슷한 문제 제기를 하여 논리를 편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생각건대 연경(燕京)에서 압록강(鴨錄江)까지 2000리이니 번한(番汗)은 험독(險瀆)에서 동쪽으로 500리쯤 있었던 것을 아닐까하는 의문이 생긴다.(按, 自燕京至鴨錄江爲二千餘里, 則番汗在險瀆之東五百餘里乎, 可疑.) 

 

  중국의 리수는 우리와는 다르다. 중국에서는 1리는 500미터쯤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0리가 4킬로미터이니 1리는 400미터가 되어 약간의 차이가 난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진개에게 빼앗기기 전에 고조선의 서쪽의 경계가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은 굳이 패수를 대동강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압록강이라도 한다. 만약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압록강이었다면 우리나라 3천리 금수강산의 3분 2를 빼앗겼다는 셈이 되는데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전후 관계를 논리적으로 따져 들어가도 도대체 이해가 되지를 않은 부분이다. 중국의 주석가들이 무심코 한 마디씩 던진 그곳이 오늘날의 평양이다, 그곳이 오늘날의 대동강이다라고 억단한 내용을 그대로 우리는 따랐다. 그리고 무조건 배웠다.

 

  따라서 고산자께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진개에게 빼앗겼다는 2000리를 중심으로 역추적해서 추론해 가면 비로소 연나라와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윤내현 교수를 비롯한 소위 재야사학자들은 그곳이 난하 중 · 하류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책의 해제를 쓴 사람은 식민사관을 주도한 바 있는 이병도 선생이신데 이 분이 쓴 글 내용 중에 당신이 삼한관련 논문을 쓰면서 이 책이 많은 참고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정작 위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는지 혹시 나중에라도 확인이나 해보셨는지 궁금하다.

 

  이제 필자는 《대동지지》를 근거로 김정호가 이 책을 편찬하면서 참고한 자료를 살펴보고 우리 고대사 부분인 단군 · 위만 · 기자조선 등과 관련된 그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2.  대동지지의 인용도서 목록

 

   국외 서적으로는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 《진서(晉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수서(隋書)》 ·《당서(唐書)》 ·《송사(宋書)》 ·《요사(遼史)》 · 《금사(金史)》 · 《원사(元史)》 · 《명사(明史)》 ·《통감집람(通鑑集覽)》 ·《명일통지(明一統志)》 ·《성경지(盛京志)》 ·《광여기(廣輿期)》 ·《개국방략(開國方略)》 ·《고려도경(高麗圖經)》 ·《문헌통고(文獻通考)》 ·《조선부(朝鮮賦)》 등 22종의 사적서(史籍)와 유서(類書) 등이 있는데 그 가운데 특기할 것으로는 청나라의 개국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개국방략(開國方略)》이란 책과 청나라가 발상했던 성경(盛京)과 관련된 방지(方志)라 할 수 있는 《성경지(盛京志)》 등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만들어진 책으로서 필자가 《만주원류고》를 번역하면서 참고했던 책이기도 하다.

  국내서적으로는 《삼국사(三國史)》(《삼국사기》를 가리킴) 《고려사(高麗史)》 · 《동국사략(東國史略)》 ·《동국통감(東國統鑑)》 ·《동사강목(東史綱目)》 ·《역대총목(歷代總目)》 ·《동국유사(東國遺事)》(《삼국유사》를 가리킴) ·《주관육익(周官六益)》 ·《국조보감(國朝寶鑑)》 ·《여지승람(輿地勝覽)》 ·《선원보략(璿源譜略)》 ·《대전통편(大典統篇)》 ·《문헌비고(文獻備考)》 ·《만기요람(萬機要覽)》 ·《화성지(華城志)》 ·《남한지(南漢志)》 ·《송경지(松京志)》 ·《강도지(江都志)》 · 《호남지(湖南志)》 ·《강역고(疆域考)》《관북지(關北志)》 ·《관서지(關西志)》 ·《발해고(渤海考)》 ·《탐라지(탐羅志)》 ·《택리지(擇里志)》 ·《연려기술(燃藜記述)》 ·《연려전고(燃藜典故)》 ·《군국총목(軍國總目)》 ·《통문관지(通門館志)》 ·《서포만필(西浦漫筆)》 ·《연암외집(燕岩外集)》 ·《부계기문》 ·《관북연혁고(關北沿革考)》 ·《박씨소원록(朴氏溯源錄)》 ·《존주록(尊周錄)》·《이계록(耳溪錄)》·《수경(水經)》 ·《동국지리변(東國地理辨)》 ·《지리군서(地理群書)》 ·《조두록(俎豆錄)》·《정리표(程里表)》 ·《와유록(臥遊錄)》 ·《여지도(輿地圖)》 등 42종이다.  인용된 책들에 대해서는 원문의 하단에 할주로 작자를 밝혀 두었음은 물론이다.

 

  이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인터넷 사전 등을 통해서 알아보시도록 하고 어떻든 이 한 권의 책을 짓기 위해 김정호가 동원한 사적류는 모두 64종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였다.

 

  이밖에도 《양자방언(揚子方言)》이라는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해 인터넷을 통해 겨우 알게된 희귀한 저술까지 동원하여 우리 고대사를 이해하기 애를 쓴 점을 발견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양자방언》이란 책의 원제목은 《유헌사자절대어석별국방언(軒使者絶代語釋別國方言)》란 아주 기다란 이름의 책인데 《방언(方言)》으로 간칭되며 우리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疎)》를 읽을 때 《방언(方言)》에 어떠 어떠한 말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되는비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 책은 기원 1세기 초 서한의 양웅(揚雄)이라는 분이 쓴 언어와 훈고서로서 책 제목에서 시하하듯이 중조국인 중국에 사신으로 왔다 사절 등을 통해서 그들이 남겼던 각 지역의 방언을 수집하여 수록한 책으로서 원래는 15권이었는데 현재는 13권만 전해져 오고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저작권이 없는 도서이므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는 자료이다. 필자도 다운받았는데 벌써 일본 사람들이 연구하느라고 자기들 나름대로 구결을 다 찍어 놓아 일본어를 좀 공부했던 분들은 자료 이용에 아주 편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기에 수록된 방언 12개의 방언구역으로 갈라진다고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일찌기 임어당이란 학자가 이미 14개 구역으로 구분한 것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며,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우리의 고대어를 많이 함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북연조선방언구(北燕朝鮮方言區)" 분야로서 바로 이곳을 탐구해 봄으로써 양웅이 살았던 기원 1세기 무렵의 우리 선조들의 언어의 원 모습을 어느 정도 추론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기대에서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조선(朝鮮)이라는 말이 27번 나오고 열수(洌水)도 22번이나 나온다고 하므로(유근혜 외, 《양웅방언연구(揚雄方言硏究)》, 파촉서사, 1992년, 219쪽 참조) 거기서 나오는 조선과 열수는 이들을 나란히 언급하는 병칭 아니면 조선의 영토를 의미하는 조선의 열수인지가 확인이 되면 문제의 열수가 과연 어디에 존재했는지를 확인해 낼 수 있는 표지가 될 것 같은 또 다른 기대에서이다.

 

  당장 인터넷을 뒤져 국립중앙도서관에 양웅의 《양자방언》이 소장되었음을 확인하고 이를 무료로 다운받은 한편 중국사이트를 뒤져 양웅방언연구라는 책자를 다운받아 위와 같은 논점을 하나하나 확인하기로 했다.

 

  여기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연나라와 조선의 열수 사이에서는 하나의 방언을 쓰는 그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열수에 대한 중국 진나라 때의 유명한 곽박(郭璞)이란 사람이 한 주석에 "열수는 요동에 있다(洌水在遼東)"는 단 이 한 마디에 있었다.곽박은 서기 276년에 나서 324년에 죽은 사람으로 생몰년대가 정확하게 확인이 되는 아주 유명한 정치가요, 언어학자요, 주석가로서 우리는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그 이름을 수시로 접하게 될 것이다. 

 

  필자가 이 책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조선의 열수와 병열시킨 옛날 고조선과 서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연나라에 관한 여러 표현에 있다. ① 연지외비조선열주지간(燕之外鄙朝鮮洌水之間)  ② 연대조선열수지간(燕代朝鮮열水之間) ③ 연지북비조선열수지간(燕之北鄙朝鮮洌水之間) ④ 연지외비조선열수지간(燕之外鄙朝鮮洌水之間) ⑤ 연조선열수지간(燕朝鮮洌水之間) ⑥ 북연조선열수지간(北燕朝鮮洌水之間) ⑦ 동북조선열수지간(東北朝鮮洌水之間) ⑧ 연지동북조선열수지간(燕之東北洌水之間) ⑨ 북연조선지간(北燕朝鮮之間) ⑩ 조선열수지간(朝鮮洌水之間) ⑪ 연지외교조선열수지간(燕之外郊朝鮮洌水之間)  

 

  이제 이 책을 썼다는 양웅이 누구인가를 살펴볼 차례다.

  이 책의 이름이 《양자방언》이라고 한 이름에서 시사하듯이 어떤 사람의 성씨 뒤에 아들자를 쓸 때의 "子"자는 아들자자가 아니라 공자 · 맹자 등 고대에 남자에 대한 미칭이 될 수도 있으며 또한 제자백가의 저작을 이르는 경우도 있다.  

  양자의 이름은 양웅(揚雄)이요,자는 자운(子云)으로 촉군 성도사람이다. 기원전 53년에 나서 기원후 18년에 죽은 다른 이름으로 양웅(楊雄)이라고 하며, 서한의 문학가 철학가 언어학이다. 성제 때 급사황문랑, 신망 때 교서천록각으로 관작은 대부였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나라는 신라 고구려가 건국이 되고 백제가 건국되기 1년전이다. 이 때 조선이라는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는 방언이라는 책에서 연나라와 조선의 열수라는 말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레 썼다. 이 때의 조선은 과연 어느 나라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제기로 될 수 있다. 또 그 표현에 있어서도 어떤 때는 연(燕) · 북연(北燕)으로, 어떤 때는 연(燕)의 북비(北鄙) · 외비(外鄙) · 외교(外郊) · 동북(東北) 등이라고 하였는데 연과 조선의 서부 국경이 연나라의 동북쪽 경계가 여러 곳에서 접합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들 사이의 언어군을 여러 곳으로 세분할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우선 연(燕)과 북연(北燕)부터 구분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북연은 오호십육국 가운데 하나로 한족 풍발(馮跋)이 용성(龍城)에 도읍하여 세운나라로 북위의 태무제(太武帝)에 멸망한 나라로 존속기간도 5세기경인 바, 우리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논외하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는 연의 북쪽 그런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 역사에는 남연(南燕)이라는 나라가 있다. 성이 길로서 개국군주는 백숙(伯儵)인데 황제(黃帝)의 후예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하남 동북 연진에 있는데 후인들은 북쪽의 연(燕)과 구별하기 위해 남연(南燕)이라고 한다.(상해사서출판사, 《고한어대사전(古漢語大辭典)》, 1522쪽 참조) 어떻거나 이제 연나라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하는데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없어 《사해(辭海)》라는 사전을 중심으로 개괄하고자 한다.

 

  연(燕)나라는 옛 나라 이름으로 원래 언(匽)언郾)으로 쓴다. 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에 의해 분봉된 제후국이다. 성은 희(姬)씨요, 개국군주는 소공석(召公奭)이다. 지금의 하북 북부와 요녕 서단에 있었으며, 지금의 북경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계(薊)에 건도를 했다. 전국 때 칠웅의 하나이다. 또 지금의 하북 이현 남쪽에 있는 무양(武陽)을 하도(下都)로 했다. 연왕 쾌(噲)  때 임금의 자리가 국상 자지(子之)에게 양위됨으로 인하여 내란이 일어나고 한 때는 제(齊)나라에 의해 공점당하기도 하였다. 연소왕(燕昭王) 때 낙의(樂毅)가 장군이 되어 각국을 연합, 제나라를 공파하고 제의 70여 성을 점령하였다. 같은 무렵 연나라 장수 진개(秦介)가 동호를 격퇴하고 동북으로 확대 발전하여 상곡 · 어양 · 우북평 · 요서 · 요동 등에 군(郡)을 설치하였다. 소왕(昭王)이 죽은 뒤 제나라에 져서 이미 얻었던 제나라 땅 전부를 잃었다. 기원전 226년에 진(秦)나라에 공파당하자 연왕 희(喜)은 요동으로 옮겨갔다. 기원전 222년에 진나라에 멸망당했다.

 

  중국 역사에서 연나라는 《양자방언》이라는 책이 쓰여지기 훨씬 이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니 양웅이 말하고자 하는 연은 나라 이름이 아닌 지명으로 여겨진다. 연이 국명이 나이고 지명이라면 과연 어디를 가리키는가? 앞의 《사해》라는 사전에는 예전에 하북성의 별칭이라고 한다.  필자가 《만주원류고》를 번역하면서 중국 사서에 자주 나오는 "아무개를 연(燕)으로 옮겼다"는 것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적이 많았다. 왜냐하면 거기서 말하는 연은 이미 국명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 때는 그냥 연으로 올겼다고 하였는데 그럴 때의 연은 오늘날의 북경지방을 일컫는 말로 보여진다. 오늘의 중국 서울을 연경이라 한 때도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후술하는 바와 같이 《양자방언》에 "연의 바깥쪽 변경과 조선열수 일대(燕之外鄙朝鮮洌水之間)"라는 본문 구절에 대해, 역시 후술하는 곽박(郭璞)이 주석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 이것이요, 열수는 요동에 있으며, 열의 발음은 열이다.(朝鮮今樂浪郡是也, 洌水在遼東, 音烈)"고 한 곳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이란 말할 수 없다. (양웅저, 《양자방언》영인본, 국립도서관소장, 8쪽 참조)

 

  곽박(郭璞)은 기원후 3세기 사람으로서 분명히 열수가 요동에 있다고 하였는데 어째 우리나라 식민사학자들은 열수가 대동강이라 한다는가 어떤 분은 청천강이라 하는가. 참으로  한심하다. 지금 이책을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구결을 달아 놓았던을 보니 자기들만 보고 조선 사람은 아예 보지 못하게 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이병도 선생이 쓴 이 책의 해제에 의하면 삼한관련 논문을 쓰면서 자기도 보았다는데 또 조선 사람이 못 보았다는 것도 말도 안되고 하여간 곽박은 그 당시 자기가 알고 있는 역사지리 지식에 의해 그와 같은 주석을 했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대동지지》에 인용된 전적 이야기를 하다가 담론이 자꾸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어떻거나 이 책에 담고 있는 책의 제목들만으로도 고산자 김정호의 박학불군(博學不群: 학문이 넓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남)함을 알겠고, 어떤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저자가 다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저술하려는 내용의 어떤 부분에 참고 자료를 알고자 할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내용을 속속들이 파악하지 않고는 적기적시에 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박람강기(博覽强記) 즉 널리 읽고 한 번 읽은 것은 잊지 않는 기억력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만드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를 못했을 것이다.

 

 

3.  대동지지 중 고대사 관련 분야

 

  이 책의 방여총지(方輿總志) 역대지목록(歷代志目錄) 一란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우리 고대사 관련 지지(地志)를 담고 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한이부(漢二府), 요심제국(遙瀋諸國), 삼한제국(三韓諸國), 신라소병제국(新羅所竝諸國), 지분미상제국(地分未詳諸國)

 

  여기에서도 할주로 부기한 내용이  있는 바, 한사군(漢四郡)과 관련해서는 낙랑 · 현도 · 임둔 · 진번, 한이부(漢二府)과 관련해서는 동부도위부, 평주도위부를 적고 요동과 요서를 부록으로 실었다. 요심제국(遼瀋諸國)과 관련해서는 모두 35국이라 하고, 삼한제국(三韓諸國)과 관련해서는 78개국인데 전(傳)이 없다고 하였으며, 신라소병제국(新羅所竝國)과 관련해서는 모두 21국으로 되어 있으며, 지분미상제국(地分未詳諸國)과 관련해서는 모두 13국이라고 하였다.

 

(1)  단군조선

 

  《사기(史記)》  장안(張晏)이 《조선전(朝鮮傳)》에 주하여 일렀으되, "조선에는 습수(濕水) · 열수(洌水) · 선수(汕水)가 있는데  이 세 강물이 합해서 열수(洌水)가 되었으니 낙랑(樂浪) · 조선(朝鮮)의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하였다.

 

  《전한서(前漢書)》  (장안이)  낙랑군 탄열현(呑列縣) 주하여 일렀으되, "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점선(黏蟬)에 이르러 바다에 흘러들어가기까지 820리를 흘러간다"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낙랑군(樂浪郡) 열구현(列口縣)에 주하기를, "열(列)은 강물 이름이다.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하고, 이에 주하기를, "열(列)은 강물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양자방언(揚子方言)》에 이르기를, "연(燕)과 조선의 열수(列水) 일대를 열(涅)이라 한다"고 하였다.

 

  《수경(水經)》에 열수를 주하기를,  "열양현(涅陽縣) 서북 기자산(岐棘山)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  삼가 생각건대, 《전한서(前漢書)》에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는 열양후(涅陽侯)로서 열(涅)은 발음이 열(列)이다. 발해가 불열(拂涅)의 옛땅을 동평부(東平府)로 만들었는데 요하(遙河) · 양장하(羊腸河)가 있다. 불열(拂涅)은 분려(分黎)가 변해서 생긴 말이다.

 

  《요사(遼史)》에 이르기를 요주(遼州)는 원래 불녕국성(佛寧國城)이라고 하는 바, 역시 불열(拂涅)이 변해서 생긴 말이다.  

 

  《위서(魏書)》에서 용성(龍城)에 주하기를, "유성(柳城) · 창려(昌黎) · 자성(棘城)을 병합하여 이에 소속시켰다"라고 하였는데 자성(棘城)은 기자산(岐棘山)으로 인해 이렇게 불려지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고 하였다.

 

  한구암(韓久庵: 한백겸)이 열수(列水)에 관해서 논하여 이르길, "한강(漢江) 이외에는 강물의 길이가 800리나 되는 큰 강은 없으니 아마도 한강이 열수(列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오늘날 평양(平壤)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애매 모호한 말이 될 따름이다. 만약 한강을 열수라고 한다면 분려산(分黎山)은 마땅히 강원도 땅에 있어야 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한 뒤 여산주(黎山州)를 두었는 바, 이에 의하면 열수는 요광(遼廣)의 경내에 있어야 하는데 확실히 어디를 가리키는 지 알 수 없다.  

 

  여기까지는 고산자가 열수에 관련된 사적등을 찾아서 《사기(史記) · 조선전(朝鮮傳)》에 나오는 열수(列水)에 관한 중국 주석가들의 주장과 우리나라의 한백겸의 주장을 보태어 열수(列水)가 어디인가를 고증해 본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고산자의 주장을 하나 하나 확인해 갈 것이다. 우선 《전한서(前漢書)》에 나온다는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중국인명대사전》을 찾아보니 노인(路人)은 서한 어양인으로 조선의 국상이라고 되어 있으며 무제 원봉 2년(B.C 109)에 군사를 내어 조선을 치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는데 중도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의 최(最)에 관해서는 《사기》 115권에 한무제가 일으킨 조선과의 일전의 맨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 장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좌장군은 자기의 군대와 누선장군의 궁대를 합치자 곧 조선을 급습했다. 조선의 대신 노인(路人) · 한음(韓陰) · 이계(尼谿)의 대신 삼(參) · 장군 왕혐(王협) 등은 상의하기를,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이제 누선장군은 체포된 몸이오. 좌장군 혼자서 양군을 병합해서 거느리게 되어 싸움은 점점 급박해졌소, 우리 군대는 필시 한나라 군대에 대항해 싸울 수는 없을 것이고, 또 우리 왕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하고, 한음 · 노인 · 왕협 등은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했는데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 3년(B.C 108) 여름에 이계의 대신 삼(參)은 사람을 보내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아직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우거의 대신이었던 성기(成己)는 또 한나라를 배반하여 다시 한나라의 군리를 공격했다. 그래서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노인의 아들 최(最)에게 명하여 그 백성들을 달래게 하고 성기를 주살했다. … (중략) … 최(最)는 아버지가 죽고 또 공적이 있다 하여 열양후(涅陽侯)로 봉해졌다.(박일봉, 《사기》 (열전2), 육문사, 1994년, 282쪽 참조) 

 

  한 마디로 노인은 조선의 재상으로서 주군을 보좌해서 국방을 튼실히 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방을 게을리 하지 않았아야 될터인데 도리어 이적행위를 해서 한나라에 적진 투항을 한 매국노요 그의 아들이 최이다.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함께 모의했던 대신 참은 제 나라 왕을 시역하는 대역죄를 범하고 그것도 모자라 조선왕 우거의 못난 아들 장항과 노인의 아들 최는 좌장군의 하수인이 되어 마지막 저항을 하는 우거의 충신 성기를 주살하고 말았다. 그런 공으로 열양후로 봉해졌다는 이야기이다.  

 

 고산자는 "열(列)"자란 글자 한 자를 고증하기 위해 조선의 배신자 노인의 아들이 받았던 봉호인 열양후(涅陽侯)까지 찾아내서 "열(涅"자의 발음이 열(列)과 통한다는 사실 밝혀내고 말았다.

 

  다음에는 발해가 불열(拂涅)의 옛땅을 동평부(東平府)로 만들었들었는데 거기에는 요하(遼河) · 양장하(羊腸河)가 있다는 기술 부분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만주원류고》 권10, 강역3은 발해 국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거기에는 동평부(東平府)라는 항목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불녈(拂涅)의 옛땅을 동평부로 삼아 이주 · 몽주 · 타주 · 흑주 · 비주 등 5주를 관할했다(졸저, 332쪽 참조)

 

  이 책에서는 "불녈"이라고 번역한 것은 자전에 "녈"자의 원음이 진흙이란 뜻일 때는 "날"이요, 열반이라고 쓸 때는 "렬"이라 한다고 했는데 원음을 살려서 불렬이라고 했으나 발음상 어려워 불열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열반이라는 발음에 익숙해 있다.

 

  동평부에 요하 양장하라는 두 강이 있다는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 중에 양장하와 관련해서는 《만주원류고》 권15, 산천2에 이름만 올라 있다.(졸저, 445쪽 참조) 원래는 원문을 다 번역하려고 했으나 그럴 경우 책의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해당 항목마다 주를 달아 생략했다고 했는데 굥교롭게도 그 중의 하나이다.

 

  《만주원류고》 원문을 다시 살려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요사》   요주(遼州)에 양장하가 있다.

 

  《원일통지》  양장하는 요양로(遼陽路)에 있는데 그 발원지는 주의 서쪽 폐휘주(廢徽州) 경내에 있으며 주의 북쪽 40리를 거쳐 하류로 흘러가다가 요하로 합해 들어간다.

 

  《명통지》  노하는 광녕위 동쪽 40리에 있는데 그 상류가 양장하요, 그 발원지는 백운산에서 나와 진무보(鎭武堡)를 거쳐서 염도호(鐮刀湖)로 들어간다. 또 동쪽으로 조하(潮河)와 합해져서 요하로 들어가며, 바다로부터 운하는 폐해져서 하도는 막혀 있다.

 

  □ 고산자는 불열(拂涅)은 분려(分黎)가 변해서 생긴 말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음운 현상은 소위 음전(音轉) 또는 전음(轉音)이란 말로 자주 설명이 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누구든지 할 수 있으며 이런 음운 현상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의할 것은 이런 중국 지명을 설명하면서 우리말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이 우리의 고대어가 어떤 것인지 밝혀 낸 바도 없고 또 밝혀 낼 수도 없다. 언어라는 것은 무한히 생성 발전 소멸하는 것인데 고대의 조선어가 어떠했을 것인지 추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생각이 된다. 

 

  《만주원류고》 권18 어언편에는 《후한서(後漢書)》에 소개된 진한어(辰韓語) 5 단어가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따르면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弧)"라 하고, 도(盜)를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린다는 뜻의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헤어지는 것을 "사(사)"라 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졸저, 546쪽 참조)  이에 대해 어떤 비교언어학자는 각종 언어학 이론을 동원하여 그 음가를 따져보려고 했는데 우리가 지금 보기에는 답을 가지고 물음에 대신하는 소위 동어반복이라 할 수 있고, 우리 고대어의 모습을 전혀 접근해 갈 수 없다. 더우기 《후한서》에는 묘한 말까지 덧붙였다. 즉, 진한어는 진나라의 말과 비슷하다. 과연 그럴까? 우리 동이족은 우랄알타이어족으로서 실사에 허사가 반드시 따라붙는 소위 교착어를 사용하고, 진나라는 중국사람으로서 고립어를 사용하는 어족인데 어떻게 말이 비슷할 수 있겠는가.

 

□  《요사(遼史)》에 요주(遼州)는 원래 불열국성(拂涅國城)이라고 하였다. 역시 불열(拂涅)이 변해서 생긴 말이다.

  출전은 정확하게 《요사(遼史) · 지리지(地理志)》를 말하며 거기에는 동경의 요주(遼州)는 시평군(始平軍)으로 원래 불열국성(拂涅國城)을 발해가 동평부(東平府)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만주원류고》에서도 확인된다.(졸저, 《만주원류고》, 275쪽 참조)

 

□ 《위서(魏書)》에서 용성(龍城)에 주하기를, "유성(柳城) · 창려(昌黎) · 자성(棘城)을 병합하여 이에 소속시켰다"라고 하였는데 자성(棘城)은 기자산(岐棘山)으로 인해 이렇게 불려지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고 하였는 바, 이 같은 사실은 《위서(魏書)》 권106, 지(志)제5  지형지 상, 영주(營州)조에 북위 진평 진군 8년(447)에 위와 같이 유성 · 창려 · 자성을 병합하여 용성에 소속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생각건대(앞으로 필자의 견해를 밝힐 때 선인들을 본받아 이런 표현을 자주 쓰는 투식어임을 이해 바란다), 고산자가 수집한 자료 가운데 《후한서(後漢書)》에서  낙랑군(樂浪郡) 열구현(列口縣)에 주석에, "열(列)은 강물 이름이다.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이 자료는 《후한서(後漢書) · 지(志)》 제23, 군국(郡國)5에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에 소속된 성과 인구를 기록한 것으로서 거기에 소속된 18개 성 가운데 열구(列口)에 관해서만 위와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후한서》는 남북조 때 유송(劉宋)의 범엽(范曄)이 찬한 것으로 《후한서》에 주를 한 사람은 기 · 전(紀傳)은 당나라 때 이현(李賢)이 하였고, 8지(志)에 대해서는 양나라 때 유소(劉昭)의 구주(舊注)라고 한다.

 

  거기에는 곽박(郭璞)이라는 사람의 《산해경(山海經)》의 주를 인용하여 그와 같은 내용의 주를 달았던 것이 확인이 된다. 그는 분명히 열수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인용된 자료가 아니라 다음에 나오는 《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는 자료의 출전에 관해 살펴 보기로 하자. 사실 이 자료는 산해경 원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책 〈해내북경(海內北經)〉에 나오는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이라는 귀절 가운데 "朝鮮在列陽東"에 대한 곽박(郭璞)이란 사람의 주석의 일부분만을 인용한 것이다.

  이제 곽박의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었다(朝鮮在列陽東)"는 내용에 대한 원래의 주를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은 오늘날의 낙랑현(樂浪縣)으로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열(列) 역시 물이름으로 오늘날의 대방(帶方)에 있으며, 대방에는 열구현(列口縣)이 있다."고 하였는데 무슨 특별한 견해가 아니고 《한서 · 지리지》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서 별 게 없다.

 

  우리는 가끔 곽박이란 사람의 주석 한 마디에 우리 고대사에 나오는 지명이 중국 대륙이 되기도 하고 한반도로 밀려나기도 하면서 일희일비하는 꼬락서니가 가관이다.

 

  그 같은 사람이 또 있다. 《수경주(水經注)》를 쓴 역도원(酈道元)이란 사람이 또 있다. 이 두 사람에 의해 우리 고대사는 속절없이 그들의 말 한 마디에 강역의 일부를 중국에 내주게 되는 등 우리를 아주 갖고 놀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우리가 너무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서 패수가 중국 《수경(水經)》의 원문에는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는 기록에 대해, 역도원의 주석에 의하면 자기 말로도 한나라 때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패수(浿水)는 누방(鏤方)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자기네들 기록까지 정확히 확인했으면서도 뭐 중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대한 지리 방위 관념이 없어 패수는 서쪽으로 흐른다고 해야할 것을 동쪽으로 흐른다고 착각했다나. 더욱 가관인 것은 그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직접 패수를 현장조사하고 분명히 오늘날의 대동강(大同江)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나 뭐 이런 주석이다.

 

  필자는 수사기관에서 오랫동안 실체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사관으로 근무한 바 있다. 수사기관에서 어떤 범죄 혐의가 입증되면 범죄자를 처벌해 달라고 법원에 기소를 하여 판사의 판결을 받게 되는데 그 일련의 재판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민형사 할게 없이 모두 자백이 제일 중요하다. 자백이란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웃 나라들과 치열한 역사의 전쟁을 하여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본격적인 역사의 전쟁에서 승패를 가리기도 전에 먼저 자기 민족에게 불리한 사실을 스스로 시인해 버리는 바보 멍청이 짓이 있을 수 있다. 재판에서는 이를 선행자백이라고 한다. 본격적인 변론도 하기 전에 은연중 자기의 잘못이나 불리한 점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경우 더 이상 재판과정에서 또 다른 증거조사방법을 진행시키지 않고 그냥 판사의 심증을 형성하는 증거로 되어 버린다.

 

  중국 사람들이 가장 큰 패착이요, 실수라면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문제시 되고 있는 패수에 대해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 기록을 남긴 점이라고 하겠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동고서저(東高西低)라 동쪽에는 태백산맥 등 높은 준령이 있어 모든 강물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든다. 물론 두만강이나 기타 소소한 동류의 강은 있을 줄 모르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렇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거의 동쪽으로 흘러 발해나 황해로 쏟아낸다. 이런 것을 일컬어 "역사의 선행자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뿐인가. 역도원은 패수의 동류설을 옹호한답시고 우리도 잘 모르는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패수는 동쪽으로 흐른다는 사실까지 아주 친절하게 일깨워주었다. 이같은 류가 선행자백의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재판과정에서는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답변서라는 것을 쓴다. 답변서는 가능하면 간결하면서도 요점만을 아주 요령있게 써내야 한다.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다가 자칫 잘못해서 안 해도 될 말까지 해버려 괜스레 자기 잘못을 결과적으로 시인해 버리는 시체말로 "뻘짓"을 하는 경우가 있다. 행여 이 같은 역사의 전쟁에서 중국측에 동조하는 우리네 학자가 있다면 이는 매국노라 할 수 있다. 소위 실증사학을 내세워 패수를 대동강이라고 주장하고 은연중 역도원의 주장에 동조하는 우리 식민사학자들의 주장도 알고 있다.

 

  우리민족의 선주지가 아직 어디인지 정설이 없다. 중국 대륙 어딘가에 살다가 그들의 세력에 밀려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해 가면서 그들이 함께 썼던 지명도 이동해 간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잘 쓰는 교치(僑置)라는 말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것이다. 육조시대에 유행했는데 다른 나라에 빼앗긴 지명을 자국 수중에 있는 땅에다 옮겨 놓음으로써 마치 그 땅이 빼앗기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을 말한다. 평양도 그렇고 패수도 그렇다. 나중에 관계된 항목에서 서술할 예정이다. 

 

  《산해경(山海經)》은 정말 신비로운 책이다. 필자도 읽어보고 있는 중인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부분만을 대충 훑어보고 주석자들이 한 말을 천착하고 있을 뿐이다.

 

  《산해경(山海經)》은 18편으로 되어있다. 작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고, 각편의 저작 시대에 관해서도 정론이 없다. 근대 학자들은 거개가 다 이 책은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다. 그 가운데 14편은 전국시대의 작품이요, 해내경 4편은 서한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의 주요 내용으로는 민간전설 가운데 지리지식인데, 산천 · 도리(道里) · 민족 ·물산 · 약물 · 제사 · 무의(巫醫)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아주 먼 오랜 옛날의 신화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 책은 고대역사 · 지리 · 문화 · 중외교통 · 민속 · 신화 등 연구에 대해서 모두 참고가 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상해사서출판사, 《사해(辭解)》음순축인본, 2002년, 1452쪽 참조)

 

  결론적으로 말해서  한구암, 즉 한백겸의 책은 아직 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고산자의 반박자료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보면, 한백겸이  《전한서(前漢書)》에  장안이란 사람이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 대한 주석에서 "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점선(黏蟬)에 이르러 바다에 흘러들어가기까지 820리를 흘러간다"는 기록에 근거해서 그렇다면 한반도 내에서 800여리를 흘러서 서해로 들어가는 강은 한강 밖에 없으니 열수를 한강으로 비정한 데 대해 그런 논리라면 열수, 즉 한강의 발원지는 강원도 쯤이 아니겠느냐는 반론이다. 고산자는 열수와 관련된 여러 자료를 통해서 열자가 들어가는 지명이나 전음(轉音)이 된 지명은 결코 반도 내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논증해 열수반도존재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단군

 

  《동국고기(東國古記)》에 이르기를, 신인이 있어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왔는데 요님금과 더불어 나란히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르기를, 옛날에 곰 한 마리가 있어 하늘에 여자가 되기를 빌었는데 천신이 곰과 교접을 해서 낳았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단인(檀因)의 아들 - 《고려사(高麗史)》에는 단인(檀因)으로 썼고, 《조두록(俎豆錄)》에는 환인(桓因)으로 썼다 - 이 당요(唐堯) 25년 무진년에 즉위하였다. 상나라 무정(武丁) 8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을 하였다가 백악으로 수도를 옮겼다.-  《사기(史記)》 험독현(險瀆縣)의 주에는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고, 또 여러 책에서는 험(險)이 바뀌어 검(儉)으로 되어 있다. 《동사(東史)》에서는 왕검(王儉)을 단군(檀君)의 이름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지명이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옛날 2천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란 분이 있어 즉위하여 아사달에 도읍을 하고 나라를 열어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하매 당요(唐堯)와 같은 때라고 하였는데 《동사(東史)》에 있는 그대로 그록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숭녕전(崇寧殿)- 평양에서 단군을 모시는 곳이다  삼성사(三聖祠)- 문화(文化)에서 환인(桓因) · 환웅(桓雄) · 단군(檀君)을 모시는 곳이다. 

 

(이를테면 미완성 원고를 독자들에게 선보인 것이다. 의욕만 앞섰지 주제가 너무 방대하고 논리를 전개하기가 힘들다. 왜냐구요, 별로 아는 게 없거든요. 만주원류고 하나 달랑 번역한 것 빼놓고는....매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여기까지 이어왔다. 책 내용이 방대하여 시간날 때마다 덧붙여 갈 작정이다.

 

2009.04.21.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kluc****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제가 아는 건 2번밖에 없네요,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관청에 주니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팔아 먹는 다며 모든 문화유산을 태우고 곤욕을 치뤘어요,죄송

2009.04.22.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desert flower
중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김정호란 인물은 중요한 인물이지만, 언제 태어났는지 밝혀진 바가 없고 특히 검색을 해봐도 잘 안나오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알고 있는 사실에 여러가지 사실을 덧붙여 말하자면

 

김정호는 지도들이 불명확하고 하나같이 종이에 일일이 배껴야 한 다는 사실을 알고 나무를 일일이 파서 그냥 찍기만 해도 만들수 있는 정확한  지도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지도는 한반도를 북에서 남까지 동서로 끊어 22폭으로 나누어 담은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자세하고 뭐 그랬어요.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국가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를 물어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다는데 김정호가 만든 지도와 지리서가 보존되었다는 점, 그의 후원자였던 실학자 최한기와 고위 관리를 지낸 신헌 등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신빙성이 적다는 군요

그리고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30여년간 만들었고 백두산을 7번 이나 올라갈 정도로

의지가 대단했다네요 그리고 도시,산,강 등 아주 자세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진 지도에요

2009.04.22.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5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김정호(지리학자) 누구인가?

 

출생 1804년(황해도 토산)/사망 1866년(남대문 밖 약현)

 

김정호(金正浩, 1804년? ~ 1866년?[1])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였다. 자는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이며, 호는 고산자(古山子)[2]이다.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이며,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1) 생애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4]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신분은 한미했다.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이었으리라 추측한다.[5]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大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6] 반면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아무튼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7]고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나타나 있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1834년(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1861년(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고종 3년)까지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죽었다.

 

(2)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3) 김정호와 관련한 오해

 

(가) 김정호의 전국 답사설

 

김정호의 대작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기 위해 직접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정호가 탐사로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 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때 가장 지도란 사사로이 만들어 집에 보관하던 지도로, 대부분 그들 소유의 산림이나 논밭을 그리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 않았다.[8]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9]라고 하였다. 그밖에 정상기·최한기·신헌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예는 서양에도 있는데, 유명한 세계 지도 제작자인 당빌은 프랑스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나) 김정호 옥사설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로서 흥선대원군이 고산자 김정호를 죽였다는 허위주장이기 때문이다.[10] 게다가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11]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12],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또한 유재건이 지은 《이향견문록》에 죄인을 수록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지며 또한 김정호가 몰(沒; 죽다)로 표현하며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서도 김정호가 옥에 갇힌 기록은 없다.[13]

 

(다)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중간설

 

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3) 지도와 지리지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1864년 편찬설이 있음)[1]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2]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2009.04.24.

  • 출처

    z8vj5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