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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통신사에 대한 의문?
비공개 조회수 3,798 작성일2010.09.23

몇일전 질문하였으나 주신 답들이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하여 다시 올립니다. 한국사에 높으신 지식을 가지신 분들 저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그냥 피상적인 본인의 의견은 사절하겠으며 근거와 학문적인 논리에 입각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가끔 티브이에서 조선통신사 관련한 내용을 볼때 역학관계의 우위에 있는 조선에서 시혜를 베풀어 조선의 선진 문화를 전수해 주러 간 것 처럼 묘사된 것을 볼때마다 의문이 듭니다.

 

왜 우위에 선 조선이 일본의 왕이 아닌 막부장군(물론 권력은 왕보다 장군에게 있었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최고 통치권자는 왕이었으며 그때 일본은 입헌 군주국은 아니고 왕국이었으니까)을 상대로 하여 사절을 파견하였는지와(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일본의 사절은 말 그대로 몇명이 혹은 몇십명이 오는 말 그대로 사절인 것 같은데,

 

우리 조선의 사절은 무슨 조공을 바치러 가는(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처럼 중국에 조공, 또는 무슨 축하 사절을 보내는 식으로 많은 인원이 가는 ) 것처럼 보이는데 이또한 역학관계를 고려해 볼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무력에 꿀려 우리 조선이(지금의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관계처럼 누구는 뭐 말로는 형님이 양보해서 못사는 동생을 인권차원에서 도와주는게 좋지 않느냐 라는 번지르한 말로 포장하여 혹세무민하지만 실제는 무력이 딸려 아니면 막가파 깡패같은 협박에 꿀려 근본적인 해결보다 그냥 달라면 주고 ㅈ ㄹ ㅂ ㄱ하는 것을 막자라는 의미에서) 실제는 굴욕적인 협박에 의해 통신사를 보낸 것이 아닌지 정말 조선통신사의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첫째, 왜 조선의 왕의 공식적 외교관계의 상대가 일본왕이 아니고 막부의 장군인지

둘째, 왜 우리는 대거 4-5백명씩이나 보내면서 일본은 그러지 아니하였는지에 대하여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추가로

조선이 국왕책봉을 승인받기 위해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고 중국이 국왕책봉을 승인하기 위해서 조선에 조선통신사처럼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지는 않는것 같은데..........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보통 약한쪽에서 강한쪽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고 그러는 것이 국가간의 일반적인 관례인것 같은데(동서고금을 막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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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역사 및 의의에 대한 위키백과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조선 통신사

출처: 위키백과
 
조선통신사 행렬도 (대영 박물관 소장)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 일본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줄여서 통신사(通信使)라고도 한다.

 

조선 전기의 통신사

 

일본 열도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통신사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지 않고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라는 동일한 사대국을 가진 동등 외교 관계의 국가로서 파견하는

외교 사절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주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사절들 중에도 일본 막부의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사절들이 있었다.

 

1510년 중종 5년 발생한 삼포왜란을 계기로 세종 이후 파견되던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하게 된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1590년 3월 6일 출발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591년 음력 1월 28일 일본 교토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내놓게 된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이미 명을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기 통신사의 내역

연도정사부사종사관제술관인원특징
1428년(세종 10년)박서생이예김극유---
1439년(세종 21년)고득종윤인보----
1443년(세종 24년)변효문윤인보----
1590년(선조 23년)황윤길김성일허성--1590년 3월 6일 출발
1596년(선조 29년)황신양방형이종성---

 

조선 후기의 통신사

 

통신사의 재정비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도요토미를 대신하여 들어선 에도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쓰시마 번을 통해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간 포로들을 쇄환하기 위해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607년(선조 40년)에 강화를 맺었다.

 

그에 따라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사명당 유정을 비롯한 사절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주 임무는 일본과의 강화와

그 조건 이행의 확인, 일본의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이었다.

 

그 뒤 조·일 국교는 형식상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보내와 사신 파견을 요청해 오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60여 차에 걸쳐 차왜(差倭 : 일본에서 보내는 사신)를 보냈으나,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재상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통신사의 파견 목적과 구성

 

조·일 국교가 수립된 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대략 4~5백 명의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통신사의 경로와 교류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처음에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파견되었지만,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그 역할이 사라지는 대신 문화적으로 선진 문물의 전달 창구로서의

조선 통신사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배로 부산에서 오사카에 이르고, 다음에는 육로로 갔다.

통신사가 지나는 각 번은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대접하였고,

일본 유학자 및 문인과의 교류, 그 외에도 일본 민중 문화에 끼치는 영향 또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유산으로는 당인의 춤(唐人誦), 조선 가마, 필담창화(筆談唱和)의

시문(詩文)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등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를 휴대하고,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 일본 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고, 성대한 향응을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 수행원으로부터 글이나 글씨를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해 마상재(馬上才)로 불리는 2명의 광대를 데리고 가서

쇼군 앞에서 곡예를 연출했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여 곡마 묘기나 통신사의 행진을 자개로 새긴

도장주머니가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

 

일본의 화가들은 다투어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대형 병풍, 판화, 두루마리 그림 등으로 그렸는데

수많은 작품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을 귀중하게 간직하여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통신사가 한 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 조선 붐이 일고,

일본의 유행이 바뀔 정도로 일본 문화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같은 지식인은 통신사에 대한 환대가 중국 사신보다도 높은 데

불만을 품고 이를 시정할 것을 막부에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18세기 후반 이후 일본의 국수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새로이 연구하는 국학(國學) 운동이 일어난 것을 일본 지식인의 조선 붐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는 일본에서 겪은 견문을 기록하여 많은 견문록이 전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에 준 영향

 

일본에 평화가 정착된 에도 시대 이후 문화와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18세기 이후에는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711년 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간 조태억은 당시 일본의 최고 유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와 필담을

하였는데, 동서양양의 지식에 해박했던 아라이의 학문과 세계관이 조선통신사에 크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통신사의 수행원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발전상에 대한 찬사가 상당수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일본의 발전상은 조선의 학문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을 예로 들어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학문적으로도 일본의 유학 사조인 고학(古學)의 연구성과가 조선에 들어와 정약용 등을 비롯한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역지통신과 그 이후

 

마지막 통신사 파견이었던 1811년의 통신사는 양국의 재정이 불안하여

대마도에서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로 거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통신사 파견은 경제적인 부담과

양국 내정의 악화와 더불어 양국에 적극적인 파견이나 요청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흐지부지되었다.

 

그 후 일본에서는 국학 운동이 해방론(海防論)으로 발전하고,

다시 19세기 중엽 메이지 유신 등으로 인하여 일본이 개화하고 난 후에는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자는

 정한론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1876년의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통신사를 보는 관점

 

일본의 사학계 일각에서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조선 통신사에 대응할 만한 일본 측 사절단의 파견이 없었다는 점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 이래 개항할 때까지 외교정책은 성리학적 외교원칙인 사대교린으로서,

중화에 버금가는 소중화를 자처하고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여진, 일본, 류큐 등은 어디까지나

교린의 대상이었지, 결코 사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에 대한 일본학계의 자의적인 해석은 나올 수 있어도,

당시의 조선이 사대의 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통신사 파견 요청 자체가 전적으로 에도 막부 측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에 대응할 만한 일본국왕사가 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군이

일본국왕사의 상경로로 침공한 것에 대한 응분의 조치로 일본 사절단의 상경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본 막부 측에서 조선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대마도로 하여금 대차왜(大差倭)를 파견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 통신사를 깎아내리는 경향은 에도 막부 당시의 국학파들 사이에 존재했으며,

조선에서는 자국의 국왕이 일본의 군주(천황)보다 낮은 지위로 외교 관계를 맺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론이 일었다.

 

원중거 등 파견된 통신사 중 일부는 일본의 이중적인 권력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비록 실권 없이 상징적이기는 하나, 형식상 쇼군을 임명하는 국가의 상징이 되어 있는

군주, 천황의 존재를 의식하여, 후일에 막부를 타도하고 군주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 일어나면,

형식상 군주의 신하인 쇼군과 동등한 지위를 맺고 있는 조선 국왕에 대해서 외교의례적 문제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 예견은 실제로 메이지 유신으로 말미암아 현실화되었다.

이 또한 19세기에 들어 조선 통신사의 파견이 중단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기 통신사 내역

연도정사부사종사관제술관인원특징
1607년(선조 40년)여우길경섬정호관-467국교 회복
1617년(광해군 9년)오윤겸박재이경직-428오사카 전투 직후에 파견
1624년(인조 2년)정립강홍중이계영-300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취임 축하
1636년(인조 14년)임광김세렴황호권칙475병자호란 중에 파견
1643년(인조 21년)윤순지조경신유박안기462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탄생 축하
1655년(효종 6년)조형유창남용익이명빈488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취임 축하
1682년(숙종 8년)윤지완이언강박경후성완475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취임 축하
1711년(숙종 37년)조태억임수간이방언이현500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취임 축하
1719년(숙종 45년)홍치중황선이명언신유한479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취임 축하
1748년(영조 24년)홍계희남태기조명채박경행475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취임 축하
1764년(영조 40년)조엄이인배김상익남옥472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취임 축하
1811년(순조 11년)김이교이면구-이현상336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취임 축하

 

[내용추가][내용추가][내용추가]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추가질문에 대해

필자는 개인적인 정치적 판단이나 근거 없는 추측을 밝힐 입장이 아닙니다.

질문의 범위를 더 이상 확장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굳이 질의를 계속하려고 한다면,

세분화된 질문을 새로 게시해서

다른 분들도 답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바랍니다.


1. 조선은 싫어했지만 강력한 막부의 요청이 있어서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강력한 요청이 있으니까 파견해준다(?) 라는 의미가 더 큰것인가
불명확한데 알고 싶습니다.

2. 조선왕 대 일본왕의 외교관계가 아니라 조선왕 대 일본막부장군의 외교관계가 잘
못됬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것을 고치지 않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조선은 명분이라면 죽자코 지키려고 했던 성리주의를 신봉하고 왕에게
도 대들 정도로 강했던 나라인데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정말 대단히 중요한 국가
간의 역학, 또는 서열 문제인데 그냥 넘어 갔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3. 그리고 왜 우리의 경비를 사용하여(조선내에서의 경비는 일본이 부담하지 않았
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님 파견경비를 일본에서 부담했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합
니다) 일본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절단을 보내야 될 만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201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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