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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 예전 락밴드의 시초부터 지금까지의 락밴드 계보를 알고싶은데여
pray**** 조회수 13,673 작성일2004.10.14
한국 락밴드를 최초로 시작한 사람부터 그 이후로 계속
락밴드가 어떻게 이어져 왔고 누가 이어 왔는지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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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
영웅
록, 메탈 음악 80위, 피파시리즈, 국내가수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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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밴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가요계의 역사랄까.. 그런것들을 정리해봤습니다만

세월이 지난지라 그 내용이 굉장히 깁니다. 락밴드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등도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라 생각했기에.. -_-;



한국 대중음악의 시작은 미8군 무대에서 부터라고 해도 좋을것입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대중가요의 발전을 이룬 음악인들이 거의 이곳 출신이었기 때문이죠..

한국 락의 아버지 '신중현'도 마찬가지였구요.

미8군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분기별로 USIS라는 곳에서 오디션을 거쳐 실력을 인정받은

후에야 무대에 설수 있었습니다. 오디션을 통해 레벨이 갈린 음악인들은 그 레벨데 따라

보수가 정해졌었습니다.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다모인곳이 바로 미8군무대라는거죠;

신중현은 1957년에 미8군무대의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어 1962년경 미8군 톱스타의 위치에 서게 되었고 AFKN에 특별출연하거나 미8군내

영자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하는 등의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죠.

그러다가 1962년경 한국 최초의 락밴드 'Add 4'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1964년

한국최초의 락 앨범을 발매하였고 1970년에는 거의 매달 앨범을 발표하는등의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 '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하게 되죠.

그러다가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취조를 당했고 4개월동안의 구치소 생활,

1979년 해금될때까지 신중현의 곡들을 방송금지를 당했고 음반마저 판매금지가 되어버려

음악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해금된 이후에도 '미인'등 '신중현과 엽전들'에

수록되었던 곡들은 방송금지가 되었다가 1987년에 완전한 해금을 맞게 됩니다.




'조용필'또한 1969년초 스카우트 되어 미 8군 무대에 서게 됩니다. 1970년대 말 조용필은

이남이, 최이철 등과 '김트리오'로 활동하였고 1972년 해체되자 8인조의 '조용필과 그림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1976년 킹 레코드사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지만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금지가수가 되었으나 이때 피나는 노력으로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죠.





1977년 MBC에 의해 제 1회 '대학가요제'가 개최됩니다. 이 1회 대학가요제로 인해

산울림의 이름이 부각되기 시작했었죠. 이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당시 참가팀들중

유일한 그룹사운드였던 '센드페블즈'라는 그룹이 '나 어떡해'라는 곡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밴드는 미군부대나 카바레 등에서나 하는 저급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기때문에

샌드페블즈의 대상 수상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죠. 그러나 사람들은 이들이 부른

'나 어떡해'라는 곡에 열광했고 이들이 서울대 학생들이었기때문에 대상을 수상하게 된것이죠

'나 어떡해'라는 곡은 산울림의 김창환의 동생 김창훈이 후배에게 준 곡입니다.

산울림또한 그때의 대학가요제 예선에 참가해 1등을 하였지만 김창환이 당시 학교를

졸업했기때문에 자격미달이 된것이죠. 그 후 산울림은 자신의 음악을 가지고 직접

서라벌 레코드로 찾아갔고 1977년 산울림의 1집이 발매됩니다. 앨범의 수록곡

'아니 벌써'는 전국을 강타하였고 사람들은 이들의 음악을 듣기 위해 당시 카세트

플레이어가 상당히 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입하게 되었죠.

그리고 1978년 산울림 2집이 발매되었고 2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활주로'

1980년 4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마그마'등 많은 락 밴드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1981년 이후 이들의 명맥은 끊기고 1986년 시나위의 등장까지 공백상태는 계속됩니다




1979년 해금과 동시에 조용필은 지구레코드와 10년 계약을 맺게 됩니다.

1980년 3월 조용필의 1집이 발매되었고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을 받은 사운드를 선보입니다.

그들의 사운드를 구사하고자 한다는건 그의 음악이 본질적으로 락을 지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1집앨범의 수록곡 전부가 히트하는등 1집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방송또한 조용필이

장악하게 되구요. 그러던 중 1980년 12월 2집이 발매되게 됩니다. 2집은 음반사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급히 제작하게 되었고 역시 히트하게 되지만 조용필은 이 앨범의 녹음내용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0-;;

1981년 7월. 조용필은 3집을 발표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인 을 하기 위해

3집의 수록곡 몇몇에는 그가 목표한 사운드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1982년 5월 조용필의 4집이 발매됩니다. 조용필은 4집에서도 락의 색채를 강화시켜갔지만

밴드의 연주가 조용필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5집에서는 전원이 교체되고 말죠.

그리고 1983년 6월 5집 앨범이 발표됩니다. 5집을 통해 조용필은 자신이 목표로 하던

핑크 플로이드의 사운드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지만 서양의 음악을 한국적인 정서로 표현

하기 위한 그의 노력때문에 굉장히 친근한 느낌을 가져다 줍니다.

1984년 2월에 발매한 조용필의 6집 앨범은 음반사와의 계약으로 인한 시간 부족으로 인해

전곡을 다른 작곡가의 곡으로 채우게 됩니다. 이때 조용필은 6집을 포기하고

7집앨범을 준비하고 있었죠. 1985년 4월에 발매한 조용필의 7집은 핑크플로이드 스타일의

사운드에서 벗어나 당시의 주류 팝의 감성을 지닌 사운드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때 조용필은

김광민, 유재하 등 최고의 멤버와 함께 작업을 했었죠..

조용필의 8집이 1985년 12월에 발매 되었고 이 앨범은 6집과 마찬가지로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는 앨범이었습니다. 그의 9집은 1987년 4월에 발매됩니다.



1980년대 중반 한국 경제는 유래없는 급성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1970년대부터 이뤄온 사회기반 산업에 대한 대기업 중심의 투자가 정치과 경제의

극심한 위기를 극복하면에 이루어낸것이구요. 특히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개최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일조를 하게되죠. 그와 더불어 사람들은 보다 다양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으며 정치적인 자유를 요구하고 되었고 이러한 욕구의 증대는

문화와 소비의 다양화로 이어져 이 시기의 가요는 한층더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클래식 음악만이 예술적인 것이며 그 외의 음악은 평가할만한 가치가 없는것으로

치부되었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두명의, 아주 중요한 인물아 나타나게되죠.. '전영혁'과 '성시완'이

그들입니다. 전영혁은 당시 '월간 팝송'의 편집장이었고 1980년부터 70년대 락과

퓨전재즈 등을 보급했었는데,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레드 제플린, 제프 벡 등등과

팻 매쓰니와 같은 퓨전 재즈 아티스트, 조지 윈스턴 등의 뉴 에이지 아티스트를 소개하였고

주다스 프리스트나 잉베이 맘스틴과 같은 뮤지션들또한 널리 알렸죠.

또한 라이센스 앨범 발매에 힘썼고 음반 해설을 첨가하는등의 락 음악을 지속적으로

보급하였고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성시완은 1981년 MBC에서 주최한 대학생 DJ콘테스트에서 1등을 하였고 이듬해부터

아트락 전문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죠. 당시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의

음악을 보급함으로써 락 매니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었습니다. 당시는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 등의 영국 메이저 밴드들의 음악만들 접해오던 그들에게는 충격이었죠.

이 두명의 인물에 의해 당시 락 매니아들의 층이 두터워졌다고 해도 될것입니다.

그리고 잉베이 맘스틴과 게리 무어의 메탈 음악은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었으며

당시 8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정도로 메탈음악이 유행이 되었죠.


그리고 1980년대에는 동아기획이 언더그라운드 가요계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좋을만큼

그들에게 큰 힘들 실어주고 있었습니다. 전인권씨가 1985년 9월 조덕환,허성욱,최성원과 함께

동아기획에서 들국화 1집을 발매하였었고 성공하게 되죠. 김현식 3집의 잇다른

성공으로 인대 동아기획은 메이저 기획사로 남게 됩니다.

조덕환을 제외한 3명은 1981년에 '전인권 트리오'로 활동중이었으나 조덕환이 전인권에게

락 스타일의 음악을 하자고 제안해서 결성된것이 들국화입니다. 이들은 1984년 12월에

롯데호텔 크리스털 볼룸에서 라이브공연으로 첫 데뷔를 하게 됩니다.

1985년 발매된 1집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86년 9월 25일 2집을 발매하였지만 실패하고

이듬해 해체되고 맙니다.




그러나 들국화의 성공은 당시 많은 음반사들은 자극을 받게 되고 새로운 락밴드를

찾았고 이에 시나위, 부활, 백두산등의 밴드가 등장하게 되죠.

오버그라운드에서는 김지애, 태진아가 트로트에 락 비트를 받아들여 주현미와 함께

트로트의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었구요.

들국화는 메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당시 국내에서 접할수 있는 유일한 락 밴드였고

이들로 인해 많은 청소년들이 락을 즐기고 악기를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락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죠..

그리고 들국화 이후 한국 락의 아버지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가 등장하게 됩니다.




신대철이 1983년 서울고 2학년생이었을 당시 교내 밴드였던 '센세이션 1기로 활동하다가

보다 전문적이고 강한 헤비메탈 음악을 하고자 안준섭, 김정휴, 주준석과 함께

시나위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러던중 보컬인 주준석이 군입대를 함과 동시에

휴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84년 종로 3가 파고다 극장에 헤비메탈 공연장이 생겨났고 이때 공연을

하는동안 영입한 보컬이 바로 '김종서'입니다.

1985년 초 김종서와 함께 이대원의 라이브 클럽에서 첫 공연을 가졌으나 김종서는

공연후 교체됩니다.

85년 중반에 신중현이 운영하던 'rock world'에서 정식 데뷔를 준비하였고 서울고 동창인

'임재범'이 보컬로 참여하면서 강기영, 강종수, 김형준과 함께 앨범을 준비하게 되죠.

그리고 1986년 1월 킹레코드로부터 레코딩 제의가 들어왔고 3월에 1집이 발표됩니다.

이들의 헤비메탈 사운드에 당시 잉베이에 빠져있던 락/메탈 키드들은 열광했으며

헤비메탈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1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기영이 탈퇴를 하고 1집 발매후에는 임재범이 군 입대를 하게되죠

신대철은 김민기와, 다시 가입한 강기영, 김종서와 함께 2집 준비에 들어갔고

1987년에 발표된 2집은 1집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게 되죠

그러나 2집 발표후 강기영과 김종서는 다시 탈퇴를 하고 김영진, 김성헌이 합류하여

3집을 발표하지만 군복무 중인 신대철로 인해 활동이 어려웠고 3집이후 공백기를 가집니다.




시나위의 1집이 발매되었던 1986년에는 백두산, 부활 등의 락밴드들이 활동했습니다.

당시 부활은 기타리스트 김태원이 이끄는 밴드였고 '이승철'이 보컬로 있었죠. 이들의

데뷔 앨범은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유현상, 김도균, 한춘근, 김주현의 라인업을 가진 백두산의 1집은 락 매니아들의

이목을 끌었고 1987년 발매된 2집으로 최고의 메탈밴드임을 확인시켰습니다.




그러나 1988년부터 많은 메탈 밴드들이 해체하기 시작했는데 음악인들의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80년대 후반부터 이문세, 유재하, 변진섭등의 발라드 가수등의

등장과 라디오 프로그램의 가요 위주의 선곡 등등이 방송 매체에서 헤비메탈을 밀어낸것이죠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위, 백두산, 부활이 주었던 음악적 충격도 잊혀져 갔었구요..

임재범과 손무현이 결성한 '외인부대'와 '블랙 신드롬', '디오니서스', '블랙홀',

'태백산맥'등이 이시기에 등장하였고 헤비메탈 씬의 양적 확대를 이루었었습니다.

이때 김종서는 시나위를 나와 김민기, 이근형, 박현준과 함께 '카리스마'라는

정예 멤버로 밴드를 구성하였고 많은 락 매니아들은 이 밴드에 기대를 걸었지만

기울어가는 락 음악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듬해 해체하고 맙니다.




1989년 신대철은 제대후 시나위의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였고 이과정에서 베이시스트인

'서태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카리스마'의 김종서를 다시 시나위로 불러들여 보컬로 두었고 4집을 제작하게 됩니다.

시나위의 4집은 쓰러져가는 락/메탈 씬을 걱정하던 많은 매니아들이 기대하던 앨범이었죠.

덕분에 이들의 4집은 음악적 완성도와 더불어 상업성을 염두에 둘수밖에 없었지만

이들의 4집은 락/메탈씬을 살리지 못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김종서는 신대철과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해 탈퇴하고 솔로 앨범을 준비하게 되죠.




1988년 백두산이 해체하고 김도균은 솔로 앨범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1989년

'Rock in korea'앨범 제작에 참여하게 되는데 여기서 1988년에 외인부대에 있던

임재범을 만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하여 1989년 '아시아나'가 결성됩니다.

아시아나는 일본밴드인 라우드니스의 내한공연에 오프닝으로 참여하여 라우드니스를

능가한다는 평을 듣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데뷔 앨범또한 당시의 음악적

유행으로 인해 환영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후 임재범은 1991년 솔로앨범을 발표하였고 김종서또한 1992년 1월 솔로앨범을 발표하였고

성공하게 됩니다. 신대철은 신승훈 2집과 이현우 리믹스 앨범에 참여했으며 프로듀서와

작곡가로 활약하였고 손무현은 김완선이 부른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로 정상의

음악가가 됩니다. 이와 같이 메탈씬의 음악가들은 대거 오버그라운드로 진출하였고

1992년 김도균은 백두산 3집을, 신대철은 '자유'라는 밴드를 만들었었죠;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신해철을 중심으로한 '무한궤도'가 '그대에게'라는 곡으로대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해철은 무한궤도의 멤버들에게 프로 뮤지션으로 활동하자는

제의를 하게 되지만 다른 멤버들은 음악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없었기에 무한궤도는

해체하게 됩니다. 그후 신해철은 1990년 6월 솔로로 나서게 되고 성공하게 되죠

그리고 신해철을 제외한 나머지 무한궤도 멤버들은 015B를 조직해 신해철의 솔로앨범 발매와

비슷한 시기인 1990년 6월에 1집을 발매하구요..


1992년, 한국 가요계에 큰 획을 그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1992년 6월 신해철은 N.EX.T를 조직해 컨셉트 앨범인 'Home'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1집의 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시대에

뒤쳐진 것이 되어버렸고 실패하게 되지만 1994년 넥스트의 2집으로 실패를 극복하게 됩니다.



한편 서태지는 은퇴 이후 1998년 7월 그의 솔로 1집으로 컴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0년 9월 솔로 2집으로 돌아온 소태지는 외국 락밴드의 공연을 무색하게 할만큼의

강한 사운드를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의 2집이 히트하면서 한국에서는

Korn, Rage against the machine, Limp Bizkit등으로 대표되는 뉴 메틀 장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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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느라 고생했습니다 -_-;;;

채택안해주면 울어버릴겁니다 ㅋㄷ

200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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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내 머리 + 한국 대중 음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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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fr****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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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내용이 우선 참 간단하면서도 어렵습니다 ㅎㅎ

우리나라는 미국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 나라죠.

미국의 70~80년대 때부터 우리나라도

락은 같이 시작됐다고 봐도 좋습니다.

미국은 70~80년대가 락의 전성기라도 할수 있었습니다.

실력있는 밴드들이 죄다 미국에서 활동을 했구요.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도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부터

밴드음악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친구"에서도 나왔듯이 그 당시 밴드를 한다는 건

상당한 유행이였죠.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 음악시장은 장비 문제며 시스템 문제면

밴드 음악을 하기엔 상당히 힘든 환경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락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요.

그룹명은 아니지만 자기세션을 가진 밴드들이 나오기 시작했져.

대표적인 분이 신중현 씨 입니다.

락의 관점에서 보면 음악자체가 락적이진 않지만 계기와 시초를 만들고

연주실력과 노래가 상당히 좋은 분이십니다.

그 후 신중현씨의 영향으로 태어난 밴드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락그룹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죠.대표적으로 시나위,부활,블랙신드롬 봄,여름,가을,겨울 등등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현대 락음악계의 소위 형님들께서 나오신 시대입니다.

락 음악은 아니지만 밴드음악하신 분으로는 조용필 형님이 계시구요.

이때부터 밴드음악과 락음악이 젊은 층에서 상당한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

다.LP판의 최대 전성기였기도 하구요.

그 영향을 받아 밴드활동은 아니였지만 세션밴드를 끌고 다니며 음악하는 분들

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이문세,이수만(이수만씨도 옛날엔 밴드음악을 했었다

는....),강산에....등등

이후 90년 초반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락음악계는 판도가 바뀌게 됩니다.

장르의 구분과 활동의 구분이 명확이 갈리게 됩니다.

오버로 활동을 하시는 분들과 인디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구분되게 되고

그만큼 인디에서 활동하는 락그룹들이 많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오버로 활동하는 그룹중 넥스트,강산에,그리고 80년대 중후반 그룹들이

오버의 무대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디에선 젊은 층등의 대거 가세로 인해 밴드의 풍년을 맞게 됩니다.

티삼스같은 그룹이 나온 시대 이쯤이죠.

93~7년 사이에 우리나라 락그룹들은 상당히 주춤 하게 됩니다.

댄스음악과 힙합이 가요계에 등장하면서 락음악과 밴드음악이 상당히

기세가 줄었고 듣는 층도 이젠 더 이상 젋은 세대가 아니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9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인디에 있던 밴드 들이 하나둘씩

오버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서 다시금 락의 계보가 이어지게 됩니다.

윤도현밴드,김종서,크래쉬,자우림,등등(그 당시 오버로 나온 그룹은 상당히

많습니다.)

더욱이 인디계에도 크라잉 넛,노 브레인,등등 펑크가 주가 되는 많은 그룹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죠.이때부터 락음악계를 애기하는데 있어서

오버 뿐만 아니라 인디 또한 빼놓고 애기할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레이니 썬 등등 펑크가 아니더라도 음악성과 연주실력이 되는 밴드들이

인디시장에 얼굴을 많이 내보이기도 했구요.

90년대 후반에 가장 큰 변화중 하나가 하드코어 그룹들이 인디 시장에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크래쉬와 디아블로 등등의 그룹들이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그외에도 예레미 같은 프로그래시브

그룹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구요.

2000년대 들어 락음악계에는 하드코어가 많은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헤머,피아,크래쉬 같은 그룹들이 상당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는 후에 괴수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면서 유명했지만 당시 상당한 메니아층이

있었습니다.

2002~200?부터는 더욱 많은 인디밴드들이 생겨나게 되고,

오버로 올라오는 밴드들이 많아지게 됐습니다.

체리필터,트렌스픽션,럼블피쉬,더 브리즈,넬,피아 등등 그 외에도

락은 아니지만 밴드음악으로는 퓨전째즈와 재즈그룹들이 많이 생기기도 했고

커먼 그라운드,아소토유니온 등등의 그룹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밴드 음악이라고 해도 락 뿐만 아니라 째즈와 싸이키델리등등 많은 장르

의 음악을 하는 밴드가 많습니다.

저의 짧은 지식이 도움이 되을지 모르겠군요^^;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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