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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예수회초기의 신부들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해해 조회수 2,289 작성일2007.12.19

제가 알고싶은 인물은

프란시스 사비에르 ,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 프란시스 보르자 , 루이스 곤자가 , 알렉산더 발리냐니 , 마테오리치 입니다..

사비에르,로욜라,마테오리치는 비교적 자료를 찾기가 쉬운데 다른인물은 구체적인 정보를 찾기가 힘드네요 ㅠㅠ

프란시스 보르자,루이스 곤자가,알렉산더 발리냐니 신부 위주로 답변주신다면 감사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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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마리아  無窮之世여

   No  Soul  Left  Behind

       

 

 

 

St.Francis Borgia http://images.google.co.kr/images?gbv=2&svnum=10&hl=ko&newwindow=1&q=St.Francis+Borgia+&btnG=%EC%9D%B4%EB%AF%B8%EC%A7%80+%EA%B2%80%EC%83%89

 ▶프란치스코 보르자(10.10)◀  
 
   성인명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 Borgia)
 축일 10월 10일  
  신분 신부, 총장 
 활동지역 아라곤(Aragun)
 활동연도 1510-1572년 
 같은이름 방지거, 보르지아,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 또는 프란체스코)는 간디아(Gandia)의 세 번째 공작인 후안(Juan)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5세의 비합법적인 딸인 후아나(Juana)의 14명의 자녀 중 맏이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다. 에스파냐 발렌시아 출생의 귀족 가문인 보르자가의 후손인 그는 사라고사(Zaragoza)의 대주교인 아저씨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28년에는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궁중 자문위원이 되었다. 1529년 그는 엘레아놀 데 카스트로(Eleanor de Castro)와 결혼하였고, 카를로스의 고문으로 10년을 봉직하다가 부친이 사망한 1543년부터 간디아의 공작 지위를 승계하였다.

   1546년 그의 아내가 8명의 자녀들을 남기고 사망했을 때 그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548년에 예수회에 입회하려고 결정하였다. 1550년에 그가 로마(Rome)로 갔다가 다음 해에 자신의 재산 상속 문제로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 설교 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기가 일쑤였다. 1554년 그는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에 의해 에스파냐 예수회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수도원과 대학 그리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1565년에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1571년에는 보넬리(Bonelli) 추기경을 수행하여 에스파냐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로마로 돌아온 지 이틀 만인 1572년 9월 30일에 운명하였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 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 때문에, 그는 흔히 제2의 설립자로 불린다. 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성되었다.

 

 

    

알로이시오 공자가  http://images.google.co.kr/images?gbv=2&svnum=10&hl=ko&newwindow=1&q=St.+Aloysius+Gonzaga&btnG=%EC%9D%B4%EB%AF%B8%EC%A7%80+%EA%B2%80%EC%83%89

Alessandro Valignano http://images.google.co.kr/images?gbv=2&svnum=10&hl=ko&newwindow=1&q=Alessandro+Valignano+&btnG=%EC%9D%B4%EB%AF%B8%EC%A7%80+%EA%B2%80%EC%83%89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도문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0303&eid=3iSM6FFBh3lrp8ydNeeLwBpSywEfU3Es&qb=vLrHwbb1xKG9usTaIMfPuvG/obijILHitbW5rg==

200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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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 사비에르 Francis Xavier는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로

김상근씨의 '인물로 읽는 교회사'라는 책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성인(축일은 7월 31일)은

F.사비에르와 함께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를 창립한 분으로 

북()에스파냐바스코 지방 로욜라 성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세속적인 생활을 하였는데, 팜플로나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병상에서 《그리스도전()》과 《성인전》을 읽고서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려고 결심한 그는 만레사의 동굴에서 기도와 고행에 몰두하면서 내적 싸움과 신비적 조명을 경험하고 《심령수업 Exercitia spiritualia》을 썼으며, 후에는 예루살렘을 순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려면 학문이 필요함을 깨닫고 32세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훗날 그가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을 때 F.사비에르, P.파베르 등 6명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예수회'라는 수도회로 발전하였지요. 1540년 그는 예수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회원을 양성하고 회헌()을 만듦으로써 그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으로 동요하고 있던 가톨릭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프란시스 보르자Francis Borgia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 또는 프란체스코)는 간디아(Gandia)의 세 번째 공작인 후안(Juan)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5세의 비합법적인 딸인 후아나(Juana)의 14명의 자녀 중 맏이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에스파냐 발렌시아 출생의 귀족 가문인 보르자가의 후손인 그는 사라고사(Zaragoza)의 대주교인 아저씨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28년에는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궁중 자문위원이 되었고 1529년 그는 엘레아놀 데 카스트로(Eleanor de Castro)와 결혼하였으며, 카를로스의 고문으로 10년을 봉직하다가 부친이 사망한 1543년부터 간디아의 공작 지위를 승계했습니다. 
   1546년 그의 아내가 8명의 자녀들을 남기고 사망했을 때 그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1548년에 예수회에 입회하려고 결정하였지요. 1550년에 그가 로마(Rome)로 갔다가 다음 해에 자신의 재산 상속 문제로 에스파냐로 돌아옵니다. 그 이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 설교 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1554년 그는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에 의해 에스파냐 예수회의 총대리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수도원과 대학 그리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1565년에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됩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1571년에는 보넬리(Bonelli) 추기경을 수행하여 에스파냐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로마로 돌아온 지 이틀 만인 1572년 9월 30일에 운명하였습니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 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 때문에, 그는 흔히 제2의 설립자로 불립니다. 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성되었지요.

 

  루이스 곤자가 Aloysius Gonzaga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또는 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의 후작 페란테(Ferrante Gonzaga)와 마르타 타나 산테나(Marta Tana Sant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다소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깊은 사랑으로 알로이시우스를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알로이시우스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정 교사였던 피에르프란체스코(Pierfrancesco del Turco)는 알로이시우스의 영혼과 정신을 길러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577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는, 알로이시우스를 피렌체(Firenze)의 대공 프란치스코 데 메디치(Francesco de Medici) 궁의 시동(侍童)으로 보냅니다. 2년 후인 1579년에 알로이시우스와 그의 동생 로돌포(Rodolfo)를 브레시아(Brescia) 지방 만토바(Mantova)로 옮겼습니다. 1581년 알로이시우스의 가족은 마드리드(Madrid)로 갔고, 알로이시우스는 펠리페 2세 궁정에서 왕자 돈 디에고(Don Diego)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철학을 공부하였지요. 그 후 왕자가 사망하자 1583년 8월 15일 알로이시우스는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합니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며,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아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온갖 방법으로 알로이시우스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1585년 11월 2일 로마(Rome)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한 성 알로이시우스는 밀라노(Milano)의 예수회 분원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만토바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하여 잠시 집에 들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학업에 정진하였습니다. 그는 나폴리(Napoli)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로마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지요. 1587년 11월 25일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신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를 가르치던 교수들 중에는 당시의 유명한 학자 바스케스(G. Vazquez, 1549-1604)가 있었으며, 훗날 성인이 된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9월 17일)가 알로이시우스의 영성지도 신부였습니다.
   성 알로이시우스가 신학을 공부한 지 4년째 되던 1590년 도시 전체에는 흑사병이 퍼졌다고 합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던 알로이시우스는 이듬해 3월 초 이 병에 전염되어 6월 21일 사망하였는데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Ignatius) 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시중하고 분별력 있게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탁월하였던 알로이시우스는 철학과 신학의 전 과목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에게도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반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정결에 대한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지요. 또한 그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162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12월 31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 후 3년 후 알로이시우스 성인은 젊은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지요.

 

  알렉산더 발리냐니 Alexander Va-ligmani 중국의 첫 선교사였던 모리슨Rev.Rogert Morrizon D.D가 중국에 발을 디딘 것은 1807. 9. 4. 이었는데 이보다 200년 전 이태리 예수회 동방 감독 알렉산더 발리냐니는 마카오에 10개월 체류, 중국대륙 입국을 시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그의 기대는 좌절되고 1606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절규에 찬 한 마디를 부르짖었지요.

  '석두石頭야, 석두야 네가 언제 비로소 내 주님을 맞아들이랴..?'

  발리냐니의 그 한마디는 17C에서 19C까지 긴 여운을 남깁니다.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6C 동양 선교에 큰 몫을 했던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신부는 중국에 처음으로  宣武門 성당인 南堂을 세우신 분입니다.  1522  이탈리에서 태어났지만 1610 북경에서 생을 마친 선교사 마태오리치는 중국에서 활동한 유럽 출신 선교사 중 중국과 문화 교류와 형제애적 친교에 있어 가장 모법적인 인물로 꼽힙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7.3. 25.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 교황청의 주요 현안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가운데 중국과의 대화에 있어 마태오 리치의 선교 정책과 활동이 이상적인 모델의 하나로 평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가톨릭 출판사)

200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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