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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비교
비공개 조회수 3,868 작성일2011.10.21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1. 출생과 성장 배경

2. 가문, 당파

3. 학문적 성향 등의 내용을 비교하여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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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박지원은 25년이란 시차가 있지만 연암은 다산 처럼 살수없었고  다산은 연암처럼 살수없었든 관계 입니다  라이벌은 침묵하는게  프로정신 이라 할정도로 다산은 연암에대해 그많은 저서에 (500여권)한줄표기도하지 않았고 연암은 열하일기에 한두 줄 정도 언급한것은 동시대 살아온  조선후기  두거목  인테리겐차(지식인)의 아집과 양보할수없는 영역을 확보한 학자적 고집과 자존심의 대결때문입니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둘의 관계를

다음과같이 현대적 용어로 표현 합니다

 

1.사상의 유목민 과 정착민

2.열정의 패러독스 혁명의 파토스

3.유쾌한 노마디즘과 치열한 앙가주망 

 

 유쾌한 노마디즘과 치열한 앙가주망 사이
18세기 지성사의 빛나는 두 별, 연암과 다산의 팽팽한 대립과 긴장을 그들의 생애와 글쓰기 전반에 걸쳐 두루 확인할 수 있다. 연암은 당시 주류 집권층인 노론 경화사족(京華士族ㆍ한양이나 그 인근에서 대대로 살아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가문의 촉망 받는 천재였지만 일찌감치 입신양명의 길을 접었다. 신분과 당파의 경계를 가로질러 우정의연대를 실천했고, 백탑(탑골 공원) 근처에서 서유구, 이덕무, 박제가 등소위 ‘연암그룹’ 문인들과 어울려 북벌론에 맞선 ‘북학(北學ㆍ청나라문명 배우기)’ 패러다임을 창안했다.
그의 생애는 밋밋하기 짝이 없다. 이름깨나 날리는 사대부들이 겪은 유배나 정치 스캔들도, 시대와 불화한 천재의 고독한 그림자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삶과 글을 관통하는 건 경쾌한 유머와 패러독스다. 말하자면 그는 권력과 직접 맞서기보다 그 외부에서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힌 유쾌한 노마드(유목민)였던 것이다.

 


다산은 그와 정확히 대칭될 만한 인물이다. 연암의 생애가 아련한 운무에 휩싸인 것이라면, 다산의 생애는 상승과 하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 눈부신 도약의 시절을 맞은 그의 삶은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그렇게 가혹하게 추방당했어도 그는 한번도 유교적 이상사회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꽃핀 다산학의 엄청난 양과 질은 그 꿈에 대한 열렬한 표출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영원한 제국’내부의 정착민이었다.
다산을 대표하는 시는 ‘생식기를 자른 것을 슬퍼하다’는 뜻의 ‘애절양(哀絶陽)’이다. 강진 유배 시절 노전(蘆田)에 사는 한 백성이 낳은 지 사흘 된 아이가 군보(軍保ㆍ병역을 면제 받은 사람에게 병역 나간 집안의 농사일을 돕게 한 것)에 등록되자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베어버렸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식기를 가지고 관가로 가서 울면서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섰다

이런 모습을 본 다산은 --중략---

 

201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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