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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길종 감독에 대해..
f1**** 조회수 4,879 작성일200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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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n****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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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사회비판적 영화를 만들어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준 영화감독.

활동분야 : 영화감독
출생지 : 부산 초량
주요작품 : 《바보들의 행진》(1975)


9남매 중 일곱번째로 태어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러나 부모가 일찍죽는 바람에 성격이 내성적이고 우울하게 변하였다.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갔다. UCLA 영화과에 입학하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친하게 지냈으며, 단편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졸업 후 197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1972년 작가적인 실험정신과 은유적인 사회비판의식이 녹아 있는 《화분》으로 데뷔하였다. 사회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수절》(1974), 《바보들의 행진》(1975), 《한네의 승천》(1977) 등 그의 초기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상영하는 영화마다 많은 부분이 편집되어 잘려 나갔다. 특히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꿈과 사랑, 그리고 좌절을 그린 영화로 답답한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낭만적이고 애상적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에서 청바지·통기타·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는 젊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영화에 삽입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왜 불러》는 1980년대 중반까지 금지곡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기 영화에서는 비판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상업화되어 갔다. 이때 발표한 영화가 《여자를 찾습니다》(1976),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등이다. 감독으로서의 활동 외에도 이장호(李長鎬), 김호선(金浩善), 홍파(洪坡) 등과 같은 젊은 영화감독들과 함께 한국영화의 예술성을 높이기 위하여 연기자를 공모·양성하고 영화전문지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아깝게 38세의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요절하였다
-여기까지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생애
하길종은 1941년 4월 13일 부산 초량동에서 9남매중 일곱째로 태어나 불과 다섯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살때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경남중학을 마친 하길종은 형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중동고교를 거쳐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하길종의 대학생활 4년은 기행과 실험­자기성찰의 나날이었다.
김지하 김승옥 주섭일 김송현 등과 함께 「문리대 거지그룹」을 탄생시켰고 교내 영화상을 만들어 신성일에게 「최악의 연기상」을 주기도 했다.
신인발굴에 큰 차질을 빚게 했으며 스타란 잘 생겨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주었다는 이유에서다. 어느해인가는 머리를 박박 밀고 계룡산으로 잠적하더니 「태를 위한 과거분사」라는 시집을 펴냈다. 암호문을 조립한 듯한 시는 앙드레 브르통을 뺨칠 정도였다.
하길종은 대학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에게는 앙가주망이 문제가 되었고 인간의 모든 고뇌 가 우리들 것인양 인상을 쓰며 막걸리를 마셨다. 쉼없이 토론했고 연애에도 미치도록 열정적으로 빠졌다. 4·19세대는 타산적이고 비에고의 세계를 향유했다. 미팅도 대부분 학술모임이었으며 금전상위를 배격한 낭만과 꿈,그리고 사회적 저항으로 응결된 젊음을 보냈다』
대학 졸업후 신필름에 입사하지만 연출부 말단을 하다가 에어 프랑스사에 입사하고 1964년 프랑스로 갔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영화공부를 하러감다.

200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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