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앙가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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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앙가주망
브나로드 운동의 두 가지 면면?
1. 민중계몽운동
2. 일제의 식민지배에 부합하는 친일적 계몽운동
앙띠로망, 실존주의

1. 부조리 문학의 개념
인상주의 비평
문체의 종류
절충주의

Ⅰ. 절충주의의 형성 배경
Ⅱ. 절충주의 문학론의 전개
농민문학 [農民文學]
본문내용
앙가주망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주장합니다. 작가 생활 40년과 필생의 작업으로 얻은 모든 것을 걸고 그의 결백을 선언합니다. …군사법정을 고발합니다. 증거를 비밀로 가린 채 유죄판결을 내려 인권을 침해했음을 고발합니다. …나의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재촉하는 혁명적 조치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잡지에 기고했다. 졸라는 '목로주점'등의 작품을 통해 혁명 직후 프롤레타리아의 참혹한 삶을 고발해 왔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는 그가 진실과 정의, 그리고 양심의 이름으로 프랑스 군부를 고발하고 나선 것이다.
서구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드레퓌스 사건은 졸라의 고발로 진실을 되찾았다. 오직 유대인이란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드레퓌스는 5년 만에 '악마의 섬'(감옥)에서 풀려났다. 그 과정에서 졸라는 무고죄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망명까지 했었다. 마침내 프랑스는 진실과 양심을 되찾았고, 졸라는 영웅들의 무덤인 '판테온(萬神殿)'에 묻힐 수 있었다.
당시 졸라와 함께 했던 양심적 지성들을 가리키던 말이 '지식인(Intellectuel)'이며, 이런 지식인들의 사회 참여를 '앙가주망(Engagement)'이라 부른다. 프랑스 지식인의 앙가주망 전통을 철학 용어로 정치화시킨 사람은 장 폴 사르트르다. 현실에 스스로를 던져넣는 일종의 '자기 구속'을 통해 인간이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그의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지성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직후 우리 문단에 불어닥친 참여문학론도 사르트르를 차용했다. 김수영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참여문학은 순수문학 진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70~80년대 김지하의 민중시와 고은의 민족문학론으로 이어졌고, 최근엔 문학판의 주류로 자리잡은 모양새다.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작가들이 무책임했음을 비판하면서 동시대인을 위해 글을 쓰고, 동시대에 책임을 지는 글쓰기가 바람직하다는 앙가주망 문학을 제창했다. 그러나 문학의 영역에서도 좁은 의미의 정치주의를 벗어나서, 작가가 자신의 독자성을 깊이 천착하여 전체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문학의 앙가주망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1945~60년 세계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60년 이후에 앙가주망의 유행은 높았지만 개인과 전체를 동시에 파악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의미 있는 천착이라고 할 수 있다.


브나로드 운동의 두 가지 면면?

1. 민중계몽운동
동아일보사는 1931∼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적인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제3회까지 이 운동은 '브나로드(v narod)'라고 불렸으나 제4회부터는 계몽운동으로 바뀌었다. 본래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말로 러시아 말기에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면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이다. 이 구호를 앞세우고 1874년에 수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그뒤부터 이 말이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국내의 계몽운동은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단체, 도쿄[東京]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1926년 천도교 조선농민사에서 펼친 귀농운동(歸農運動)과 1930년대 수원고등농림학교 한국학생들의 문맹퇴치운동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농촌계몽운동과 함께 한글보급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1928년 동아일보사가 창간 8주년 행사의 하나로 문맹퇴치운동을 펼치려다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좌절되었고 이듬해에는 조선일보사가 귀향남녀학생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동아일보사가 전개한 브나로드운동은 고등보통학교 4, 5학년 학생으로 이루어진 학생계몽대와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를 주축으로 하여 행해졌다. 이들은 야학을 열고 음악과 연극, 위생생활을 가르치면서 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을 병행해나갔다. 이들과는 별도로 1931년에 새로 조직된 조선어학회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조선어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중계몽운동은 언론계와 문화단체, 청년학생들이 힘을 모아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전개하였던 거국적인 민족자강운동으로 평가된다.

2. 일제의 식민지배에 부합하는 친일적 계몽운동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가 1931 - 1934까지 4회에 걸쳐 실시한 민중계몽운동입니다.
이 무렵을 전후해서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일본의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었으나 반대급부로 일본 농민의 사기와 농업생산성은 극도로 떨어졌고 1차대전 중에는 식량을 요구하는 일본인의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당황한 일본정부는 부족한 식량을 우리나라에서 징발해갔고 그 결과 일본으로 실어간 쌀이 1920년의 175만 섬에서 1928년에는 740만5천 섬으로 무려 4.2배나 증가합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는 식량이 모자라 하루 죽 한 끼도 먹기가 어려워졌고 이 땅에 건너 온 일본인들이 식량 뿐 아니라 토지를 수탈하여 농민은 빈사상태였습니다.

곳곳에서 농민의 저항이 일어났고 일제 경찰에 검거된 농민만 2만 명이 넘자 총독부는 농민에 대한 회유정책으로 '농촌진흥운동'을 벌입니다. 즉 조선 농민의 절대빈곤은 일본의 수탈 때문이 아니라 조선 농민이 무식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라며 생활개량을 통해서만 그것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에 협력적인 지식인들을 이 운동에 투입합니다.
여기에 호응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참여한 것이 조선일보의 귀향학생 문자보급운동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입니다.
브나로드 운동이란 원래 러시아의 차르 체제 말기에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러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제창된 구호로 그 뜻은 "민중 속으로"입니다. 그것을 동아일보가 차용한 것이죠.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의 핵심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잘 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조선민중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식민지 지배체제 때문이 아니라 농민의 무지와, 이를 계몽·각성시킬 책임이 있는 지식인의 이기심, 나태함에 있으며 그러므로 학생 등 지식인(주로 친일적)이 농촌으로 들어가서 계몽해야 하고 농민은 그 계몽에 잘 따르라는 것이 브나로드 운동입니다.
따라서 농촌으로 들어간 지식인은 일본의 식민정책에 충실한 활동을 했습니다. 즉 조선 농민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불성실한 생활을 해왔는가를 강조하고, 일본을 본따서 근면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농민에게는 패배감과 열등감을 안겨주고 일본에 대한 선망의 마음을 심어주어 식민수탈지배에 대한 저항을 억눌렀습니다.
물론 거기 참여한 학생 등 지식인이 그대로만 한 것은 아니고 민족의식을 깨우치는데에 상당한 기여를 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지식인·학생 중 의식있는 일부에 그칩니다.

**브나로드 운동 관련 작품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 한설야의 〈과도기〉, 조명희의 〈낙동강〉 등이 브나로드운동, 즉 귀향 또는 귀농을 사건전개의 중요한 계기로 보고 있습니다.
이무영의 〈제1과 제1장〉·〈흙의 노예〉 등에서도 농촌으로 돌아와 농민의 삶을 배우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귀농의 동기와 목적이 다르고 그것이 작품 속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다르므로 귀농문학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작중인물이 농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목적이 명확하고, 그것이 작품의 중심문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브나로드 관련 진정한 문학작품은〈흙〉과 〈상록수〉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앙띠로망, 실존주의

1. 부조리 문학의 개념

부조리 문학과 앙띠 로망은 흔히 전후문학이라는 상위개념으로 묶여 지기도한다. 부조리의 사상을 중심으로한 실존주의 문학과 아리스토 텔레스적인 전통적 樣式化 방법을 파괴 하거나 부정한 부조리 연극, 그리고 19세기 후반 사실주의를 통해 확립된 전통적인 소설기법을 거부한 앙띠로망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이 안겨준 충격의 산물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중에서 앙띠로망을 제외한 나머지 두 문학 운동 혹은 문예사조의 싹은 이미 2차대전 전부터 보이고 있었다. 실존주위 문학과 부조리 연극은 이런 의미에서 전후의 변칙적인 현상으로서만 이해하는것은 곤란하다. 실재로 불란서 문학사나 사상사를 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분기점으로 놓고 보는 것에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있다.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를 근원적인 것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기간을 한덩어리로 잡고 2차대전 이후 1-20년간을 '전후'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렇듯 상식적이며 일반화 되다 시피한 시대구분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론가 들도 없지않다.가령, H. 스튜어트 휴즈는 <현대 프랑스 지성사>책의 서론에서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기간을 '절망의 시대(years of desperation)'라는 이름으로 묶어 볼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2차대전의 진정한 청산 즉 고전적 전통의 몰락은 20년대말의 경제공황과 파시스트 출현의 분위기 속에서 매듭을 지을수 있었다고 파악 하면서 30년대부터 시작된 知的 審美的 윤리적 측면에서의 혁신의 기운은50년대 후반에 들어 서면서 뚜렷하게 표면화 되었다고 설명한다.

H.스튜어트의 이상과 같은 견해를 응용해 보면 부조리 문학과 앙띠로망 운동을 전후문학으로 묶여지는 끝날수 만은 없는 것임을 짐작케 된다. 그리고 부조리 문학과 앙띠로망은 정치적 사회적 으로는 좌절감에 휩싸이면서 철학적 윤리적 측면에서는 인간스스로를 철저하게 통찰하고 분석하려 했던 이른바 '격랑의 시대'가 낳은 산물임을 알게 된다.
또 부조리 개념을 가장 먼저 言明한 것은 싸르트르의 소설 <구토區吐>에서 잡을수 있다면 부조리 문학은 곧 전후문학 이라는 등식은 고집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왜냐하면 <구토>는 1938년에 발표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을 치루고 난후의 허무감, 좌절감 그리고 인간과 역사에대한 불신 풍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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