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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친일파 송병준에대해서
비공개 조회수 20,319 작성일2011.09.07

친일파 송병준

에 대해서 조사를 해야되서....

 

1.생애와 행적.

2. 우리현대사에 미친영향 을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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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송병준

 

송병준(宋秉畯)

일본명 )노다 헤이지로, (1857년 ~1925년)

조선말기에 활동한 무관 정치인으로, 정미칠적중 한 사람이며 한일 합병 조약체결 과정에서도 일진회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과급제 후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김옥균제거의 밀명을 받았으나 그에게 감화되어 개화파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뒤에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진회등의 조직과 한일합방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오늘날 그는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매국노의 수괴로 대표되는 인물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창씨한 사람 제1호로서 별명이 ‘노다(野田) 대감’이었다 그는 조선효종·현종때의 학자 우암 송시열의 9대손이었다.

 

 

생애

본관은 은진 송씨이며, 함경남도장진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노론의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송시열의 9대손이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 서얼이었다.

8살 때 서울로 상경하여 수표교 근처 기생집에서 조방꾸니 노릇을 했다. 우연히 민태호의 눈에 띄어, 민태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민영환(閔泳煥) 가의 식객(食客)으로 지내게 되었다.

 

행적

1871년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守門將)이 되어 수문장청에 배속되었고, 이후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다. 1873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部都事)·사헌부감찰(監察) 등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조약때 접견사 수행원으로서 구로다 일행을 접대하였다. 그 뒤 송병준은 구로다 일행을 따라온 일본의 무역회사 대창조 사주인 오오쿠라와 합작하여 부산에 상관을 차렸다. 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한일 합작 상회인 셈이다. 당시 국법에 따르면 일본인과 합작하여 상행위를 할 수 없었으며, 더구나 송병준이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그에 격분한 부산 사람들이 그의 상관을 부숴 버렸다.

1882년임오군란(壬午軍亂) 때에는 간신히 피신하였다. 그를 좋지 않게 본 사람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고, 그는 남대문 밖 농가의 쌀뒤주에서 열흘쯤 숨어 지내야 했다. 1884년갑신정변때에도 사람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고, 그는 겨우 도망하여 살아남았다. 샤쿠오(釋尾東邦)는 《조선병합사》에서 “일본의 감독이 없는 고종 치하와 조선인 내각 밑에서는 … 생명이 위태롭다”라고 송병준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쓰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송병준은 그 뒤로도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뒤 그는 본시 수구파(守舊派)에 속했으므로 1884년조선정부로부터 밀명을 받아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후 일본에 망명생활 중이던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도리어 김옥균에 설득되어 그의 동지가 되었다. 그뒤 조선에 귀국하였는데, 1877년때 일본인과 같이 상회를 차린것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86년에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다시 출옥하였다. 이후 흥해군수·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이후 노다 헤이치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은신하며,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잠업(蠶業)에 종사하며 숨어 지냈다.

 

 

1904년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따라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조선을 귀국한 후부터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신하여,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李容九)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이때 일본군 병참감 오오다니(大谷喜久藏) 소장의 통역을 맡으면서 용산지역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주보(酒保: PX)를 경영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황제 양위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907년이완용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 1910년한일 합방이후 송병준은 한일 합방에 대한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게되어 한일 병합후 일본 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게 되었고, 조선총독부중추원고문이 되었으며 1920년백작(伯爵) 지위에 승급한다. 1935년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현대사에 미친영향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많은 부를 축적하여 재산가가 되었으며, 부의 축적 과정은 ‘권력을 앞세운 재산강탈형’으로 평가된다.

한국 최초의 친일 합작업자 제1호,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 제1호 등의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또한 돈을 밝혔으나 의리와 은혜를 몰랐다. 민영환이 순절하자 그 재산을 빼앗으려고 민영환의 부인을 협박하다가 물의를 일으켰으며, 그것을 낭설이라고 보도하면 사례하겠다고 《국민신보》에 제의했다가 《국민신보》마저 배신하였고, 《국민신보》의 이강호(李康鎬)가 폭로한다. 또한 실업자이자 친구인 김시현(金時鉉)이 죽자 재산관리를 맡게 되었는데 재산 횡령 혐의로 사후에 소송까지 당했다.

 

 

2002년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7년5월 2일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8월, 송병준의 후손들이 인천시부평의 옛 미츠비시 공장 부지이자 부평 미군부대 부지였고, 부평공원이 조성될 예정인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었다. 참고로 이 부지는 3000억 원대로 추산되며 부평구의 절반에 해당되는 영역이다

 

 

 



201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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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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