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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송병준 친일파임을 증명할수있는 근거!
5444**** 조회수 3,367 작성일2010.11.07

송병준이 친일파임을 증명할수있는근거

친일어록 또는 문학작품으로 근거 알려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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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할배학당
태양신
한국사 17위, 흉부외과 12위, 정부기관 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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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은 우선 일한합방상주문(日韓合邦上奏文)을 올렸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D%95%9C%ED%95%A9%EB%B0%A9%EC%83%81%EC%A3%BC%EB%AC%B8

 

그리고 일한합방성명서(日韓合邦聲明書)를 올렸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D%95%9C%ED%95%A9%EB%B0%A9%EC%84%B1%EB%AA%85%EC%84%9C

 

아래 인용을 읽어 보세요.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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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宋秉畯)에 대하여
1858년(철종 9)∼1925년. 친일반민족자.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제암(濟庵). 함경남도 장진 출신.

어린 시절을 향리에서 보내고 그뒤 상경하여 당시 세도가인 민영환(閔泳煥)의 식객(食客)이 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무과에 급제하고, 거듭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무관으로 수문장·훈련원판관·오위도총부도사를 거쳐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간신히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지고, 1884년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려고 밀령을 받고 도일하였다가 도리어 그의 인품에 공명하여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통모(通謀)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특사를 받아 출옥한 뒤 흥해군수(興海郡守)·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주의인물로 주목을 받았으므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노다(野田平次郞)라는 일본이름으로 개명하고 일본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야마구치현(山口縣) 하기(萩)에서 양잠 등에 종사하던 중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갑자기 출동하는 일본군소장 오다니(大谷喜久藏)를 따라 군사통역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일본군과 같이 청국에까지 종군하였다가 그해 4월 서울에 다시 돌아와 전국(戰局)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진전되는 것을 보고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였다.

즉,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가 20일에 다시 일진회(一進會)로 회명을 개칭하고 애국단체 보안회(輔安會)에 대항하면서, 당시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가지고 그 세력을 신장하여 일반국민의 지지를 받던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를 매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그뒤 그는 일제의 흉계에 호응하여 그 주구로 망동하였다.

그리하여 일진회는 일본군의 북진을 위한 함경도 지방의 군수물자 수송담당과 함경도로부터 간도(間島)에 이르는 일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군에 대한 동태를 정찰하고, 일본이 경의선철도 부설공사를 급격히 서두르자, 일진회원들은 이 공사의 노역(勞役)에도 일제를 위하여 거의 무료봉사의 노역을 한 결과가 되었으며, 적지 않은 인명의 사상자까지 내게 되었던 것이다.

1905년 11월에는 이용구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 10여일 앞서 우리나라 외교권의 이양을 제창한 이른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매국노로서의 그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1907년 6월에 고종헤이그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 세 특사를 파견하자, 통감 이토(伊藤博文)고종의 양위(讓位)를 결정해 놓고, 그 흉계를 이완용(李完用)송병준에게 일임하였다.

이때 송병준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동원하여 고종의 양위를 선두에 서서 지휘하였으며, 어전회의에서도 강요하였다.

그뒤 그는 이완용과 결탁하여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중추원고문을 역임하였고, 1909년 2월에는 순종의 지방순행 수종 때 시종무관(侍從武官) 어담(魚潭)과의 충돌사건으로 마침내는 내부대신에서 물러나고, 곧 일진회의 총재가 되었다.

그뒤 도일하여 저돌적인 친일주의자의 행각으로, 이른바 한일연방안(韓日聯邦案)에 관하여 직접 유세를 하고 다녔고, 더욱이 일본수상 가쓰라(桂太郞)에게 1억원이면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 넘기겠다고 거리낌없는 말까지 하여 전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그해 10월 26일 이토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에게 사살되자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침략자들은 우리나라를 병탄할 수 있는 호기로 이용, 병합여론을 조성하였다.

이 기회에 그는 이용구와 함께 이들에게 영합하여 이른바 〈일진회합방성명서〉를 비롯하여 〈상소문(상주문)〉·〈상통감서 上統監書〉·〈상내각서 上內閣書〉 등을 발표하고 반민족적인 매국망동에 광분하였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뒤 일본정부에 의하여 매국의 공로로 자작(子爵)을 받고 또한 다액의 은사금까지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이 되고 1920년에는 백작(伯爵)이 되었다.

1925년 죽은 뒤 일본 천황으로부터 정삼위훈일등욱일동수장(正三位勳一等旭日桐綬章)이 추서되었다.
 

201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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