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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송병준이 우리나라에 끼친영향을 알려주세요제발요,ㅠㅠ
na_e**** 조회수 5,094 작성일2003.11.22
친일파중한명인 송병준이 우리나라에끼친영향에대해서좀자세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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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고수
세계사, 개신교,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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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행위자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여 1945년 쫓겨나기까지 근 40여 년 동안, 일제의 한국침략과 식민지지배에 적극 협력하여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을사늑약(1905년) 체결에 협조하는가 하면 통감부에 의한 '보호정치' 아래서 관료로서 혹은 일진회처럼 일제의 주구로서 한국병탄에 적극 협조하는 자도 있었다. 1910년 나라가 병합 당할 때 매국에 앞장섰던 민족반역자들이 있는가 하면, 일제가 주는 작위나 하사금을 기꺼이 받아 들여 특권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조하는 자들도 있었다.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민족지도자로 행세하다가 일제의 회유, 매수, 공작에 넘어가 반민족 행위를 하는 변절자들이 있는가 하면, 한민족의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황국신민(皇國臣民)' 교육을 철저히 받아 일제의 군인.관리나 주구가 되어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전쟁강제동원에 앞장서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통상 친일파라고 한다.

송변준은 본관 은진(恩津). 함남 장진(長津) 출생. 서울에 와서 민영환(閔泳煥)의 식객(食客)으로 있다가 무과(武科)에 급제, 수문장(守門將)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部都事) ·감찰(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간신히 피신하였고, 본시 수구파(守舊派)에 속했으므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하여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興海郡守) ·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노다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개명, 야마구치현[山口縣] 오기[萩]에서 잠업(蠶業)에 종사하다가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완전히 친일파로 돌아서고 일본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귀국 즉시 송병준은 1904년(고종 41) 8월 18일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윤시병·유학주 등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20일 일진회(一進會)로 명칭을 고쳤다. 일진회는 발족과 동시에 왕실의 존중, 인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시정의 개선, 군정·재정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걸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또 그 회원은 모두 단발과 양복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일진회의 이와 같은 활동은 서울을 무대로 했을 뿐이고 지방조직이 없어 세력을 확대하지 못했다. 이 무렵 동학의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조직한 진보회(進步會)라는 단체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착안하여 송병준은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하여 이용구(李容九)를 꼬득여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일본인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친일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으며, 기관지 《국민신보》를 통해 친일적인 망발을 퍼뜨렸으며 나라를 일본에 넘겨 주기 위한 전초작업을 시작하였다.

헤이그 밀사사건 후에는 황제 양위운동(皇帝讓位運動)을 벌여 친일활동에 앞장섰고, 1907년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역임,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上奏文) ·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행위를 했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子爵)을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중추원고문이 되었으며 1920년 다시 백작(伯爵)에 올랐다.

초대 한국은행총재를 거쳐 자유당 때 상공부장관을 지냈던 구용서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구연수의 아들이고 송병준의 외손자로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반역자 집안이다. 구연수는 1895년 국모인 명성왕후시해사건에 연루된 자이고 송병준은 잘 알다시피 나라를 팔아먹은 제1의 국적이다. 진정 해방되었다고 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구용서를 발탁한 것은 최순주이다. 그는 일제시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전시 강제동원 전쟁에의 참여를 독려하는 친일 행각을 벌이다 미군정이 들어서자 유창한 영어실력 때문에 조선은행 총재를 하였고 1950년 재무부장관을 하다가 제3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4사5입 개헌'을 주도한 자이다. 그가 자신의 후임으로 구용서를 앉혀 부활시켰다. 유유상종하여 친일파 인맥을 형성하여 가는 좋은 예이다.
이러한 기류에 타서 '변절 부일파'들이 면죄되고 재등장하여 사회와 학계의 지도층으로 활약하게 된다. 임영신, 김활란(1945년부터 1961년까지 이화학당 이사장 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이병도(친일사학계의 거두로써 서울대 사학과교수로 있으며 우리나라 사학관을 친일사관으로 만든 장본인), 이선근 등이 그 예이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하루는 통감정치시대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에게
“대감네들은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
“그건 무슨 소리요”
“대감네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들이니까 동경에 가면 일본도 망할게 아니요?”
하는 유머도 있다고 하네요 ...

200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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