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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화랑세기 질문
비공개 조회수 1,006 작성일2019.07.12
화랑세기가 역사적 사실 여부에 논란이 있는데, 어떤 내용 때문에 그런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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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세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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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우선 박창화가 저술한 다른 책들의 성격도 진위를 판별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그가 지은 것 중 '도홍기', '홍수동기', '어울우동기' 같은 음란 소설이 많다. 그가 쓴 수십권이 넘는 책 중 성이 모티브가 되는 것이 많다. 그리고 박창화가 위서를 만들려 한 예가 있다. 그가 남긴 유고에 '유기추모경'이 있다. 유기는 고구려 초기에 편찬된 사서의 이름이고 추모는 주몽의 다른 표기이다. 박창화가 썼으면서 고려 시대의 인물인 황주량이 왕명을 받아 쓴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유기추모경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박창화의 다른 유고인 '추모경'은 한지에 쓰여 있고 황주량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위서를 만들려 시도한 것이다.

박창화의 필사본을 검토한 임창순 문화재위원장, 이기백 한림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등 고대사 권위자들이 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심지어 발견 당시 필사본을 검토한 정중환씨도 “왕족과 귀족들의 난혼과 성행위가 일본의 난혼과 흡사해 의혹이 있다”며 한걸음 물러났다.

. 신라골품제와 화랑도를 연구하던 서강대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를 면밀히 검토한 후 ‘화랑세기 연구서설-서사로서의 신빙성 확인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는 위작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때 서울대 노태돈 교수(사학)가 “89년 발견된 ‘화랑세기’는 발췌본이고 원래 박창화의 필사본은 따로 있다”고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새로운 필사본은 책 제목과 서문 등 앞쪽 일부가 훼손돼 없어졌지만 162쪽 분량으로 32쪽의 발췌본에 비해 훨씬 자세했다. 노교수는 두 달 뒤 필사본 역시 가짜라는 내용의 논문을 한국고대사연구회에서 발표했다.

그러나 1999년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 완역본을 출간하면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한문 원문에 한글 역주해를 단 ‘화랑세기-신라인의 신라 이야기’(소나무)의 발간으로 좀더 많은 연구자들이 ‘화랑세기’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1년 뒤 아예 대중역사서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김영사)를 펴냄으로써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는 쪽으로 대세를 몰아갔다. ‘화랑세기’ 완역본 출간 때만 해도 이종욱 교수는 서문에서 “화랑세기는 위작으로 생각되어 왔으며 실제 위작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시작했지만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서는 “성경은 원본이 없다. 화랑세기도 원본은 없다”는 말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2000년대 들어 진위 논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교수가 적극적으로 가짜가 아니라는 근거를 내놓은 반면, 위작론 쪽에서는 학술적 반박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화랑세기’ 필사본 연구가 확산되면서 진짜임을 뒷받침해 주는 주장들이 속속 나오고, 또 진본임을 전제로 신라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책들도 출간되고 있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향가 1편을 통해 진위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국문학계에서는 99년 성균관대 김학성 교수가 ‘필사본 화랑세기의 발견과 향가연구의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노태돈 교수의 주장을 뒤집었다. 노교수는 ‘화랑세기’에 실려 있는 향가가 박창화의 창작이라고 주장했지만 김교수는 1942년 양주동에 와서야 향가 14수에 대한 완전 해독이 이루어진 것을 근거로 시기적으로도 박창화의 창작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최근 ‘화랑세기’ 관련 논문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 말 성균관대 이영훈 교수(경제학)가 발표한 ‘화랑세기에서 노(奴)와 비(婢)’다. 이교수는 98년 ‘한국사에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이라는 논문을 통해 삼국시대의 노비 개념과 후대 천민이 된 노비의 개념이 다르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종욱 교수의 ‘화랑세기’ 역주해본에 등장하는 ‘노’와 ‘비’(각 10회)를 분석한 결과 사실이었음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즉 삼국시대의 노와 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내종과 계집종의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신하의 관계였다.

‘우리 역사의 여왕들’(책세상)을 쓴 서강대 박물관의 조범환 학예연구원은 우리 역사에서 왜 신라시대에만 3명의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존재했는지 추적하는 과정에서 ‘화랑세기’에 빚을 졌다. 그는 “화랑세기는 진위 여부를 떠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서만 보아왔던 신라 사회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신라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한다.

대중역사서나 역사소설에서 ‘화랑세기’를 인용하는 경우는 훨씬 많다. 이덕일씨는 ‘오국사기’ 이전에도 이희근씨와 함께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어느 부분이 진짜인가 진지하게 검토해야지, 연구자의 지식 외의 것이 담겨 있다고 해서 위작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사료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문화재관리학)는 지난해 펴낸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이라는 책에서 화랑도의 기원을 설명할 때 ‘화랑세기’를 인용했다. 그는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돼 있는 순국지상주의의 무사정신으로 충만한 화랑들과 달리 ‘화랑세기’가 그들의 자유분방한 성을 다루었다고 해서 위서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현재까지는 가짜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듯이 진짜임을 확인해 주는 증거도 없다.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원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결론이 유보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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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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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는 1989년에 필사본이 발견되고, 다시 1995년에는 이른바 그 모본이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32명의 풍월주의 계보와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필사한 박창화에 의한 위작설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이는 화랑세기 진본이 없는까닭에 생긴것 입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필사본 화랑세기를 둘러싼 진위 논쟁은 화랑의 계보, 색공의 역사적 접근, 인용 고사에 대한 분석, 향가·향찰에 대한 고찰 등 구체적인 내용의 실증 작업을 토대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위작인지 아닌지가 밝혀질것 입니다.

201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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