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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내공20]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자국민을 희생시킨 사건 ??
vlft**** 조회수 722 작성일2004.05.07
일제 강점기가 끝나갈 즈음, 일본인들이 자국민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국을 위해 일으킨 사건 같은 게 없을까요?

이를테면 '진주만공습'때 자국민들을 카미카제로 썼다잖아요(맞나...??)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이것밖에는 모르겠네요...

기왕이면 그 사건의 원인이나 전개 같은 것도

간략하게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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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kt****
영웅
세계사, 공포, 스릴러 영화, 액션, 무협 영화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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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만주로 쳐들어갈 명분으로 별 짓 다했습니다.
이봉창 의사의 일왕 암살미수도 그 명분이었으나. 중국 마적들이 일본인들을
죽인다면서 군대를 보낸 것도 한 몫했죠

그러나 이 마적들은 이미 일본군에게 고용된 한패였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비밀리에 .

몇몇 일본인 민간인들이 살던 만주와 여러 지역 마을을 공격하여 마구잡이로
죽도록 고용했습니다.

이러니 일본 민간인들은 그냥 평화롭게 살던 자국인들을 되놈 마적들이
약탈하여 죽였다며 반중 사상을 가지며 일본 군국주의의 만주정벌에
동조하게 됩니다.

하지만.더더욱 본격적인 침공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이는 일본 당시 기득권층인 늙은 대신들이 전쟁 확대를 우려하여
만주국 성립도 비관적으로 보았고 더더욱 중국 땅을 차지하길 바라던 일본
군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그렇습니다

1932년 5월 15일 극우단체인 '혈맹단'이 정당. 재벌 타도를 목적으로 쿠테타를
일으킵니다.해군 청년 장교 10명, 육군 사관후보생 11명, 그리고 민간
농본주의자 일파로 구성된 이들은 수상 관저·정우회 본부·경찰청·
일본은행을 습격하고, 당시 수상 '이누카이 쓰요시'를 죽입니다.

이로 인하여 온건 정당 정치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과격 극우 세력과
군부 세력이 더더욱 득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몇몇 온건세력은 이들과 반대되는 태도를 보여 대립하였고

결국 1936년 2월 26일 밤.일본 장교들이 주도한 쿠데타가 벌어져
온건파이던 내무상서 사이토 마코토를 비롯하여 대장상서와 육군교총감같은
고위직들을 쏴죽이고 의사당과 경찰청, 육군성을 점거합니다.

일왕 히로히토는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하여

"짐의 충직한 대신들을 감히 일개 애송이 장교들이 함부로 죽였구나!
내 이를 결코 가만 두지 않으리라!"

2만여명이 넘는 병력을 보내 쿠데타군을 포위합니다.쿠데타군 병력은 1500명에도
못 미치는 병력. 큰 싸움이 되기전 이들은 항복하고 그 와중에 몇몇 쿠데타군
장교는 할복해 죽습니다.그리고 주범으로 여러 명이 잡혀 처형되었죠

하지만 이 사건으로 온건세력은 거의 붕괴되고 과격군부가 판을 친 일본은
군비 확대와 무기 확대생산으로 이어지며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인 전쟁으로 들어섭니다


----그 밖에/

오키나와 섬이 있죠.2차대전 말기, 오키나와에 기지를 설치한 일본군은
미군에 결사적으로 맞붙으라는 명령을 내린 일왕 히로히토 명령에 따라
미군과 싸우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을 방패로 썼다는 반발로 남게됩니다.

결국 무수한 오키나와 사람들이 죽어나갔죠

원래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으로서 조선과 중국과도 무역을 하며 왜국에게도
독립국으로 인정받던 오키나와 섬 사람들은 일본에게 강제로 합병당한 뒤로
감시당하는 처지였고 결국 2차대전 말기, 불바다가 되는 비극을 당합니다.


당시 오키나와 섬 사람들이 얼마나 증오가 심했으면 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
전역을 오고가던 히로히토는 오키나와만은 다시는 못갔습니다.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가 87살로 지옥에 갈 때도 일본 전역이 임시 공휴일이었으나
오키나와만은 공휴일이 아니었고 일장기도 걸지않아 극우파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죠

200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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