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사도바울이 개종하기전 로마에서 직책이름
kyun**** 조회수 6,838 작성일2007.01.08
그직책이름을 알아오라는데 ㅠ 아시는분 가르쳐주세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2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khi4****
태양신
주민등록증 발급 9위, 개신교, 정부기관 29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바울(Paul)이 개종(회심)하기 전에 로마에서의 직책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도 로마 시민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를 대하는 로마의 총대장이나 로마 총독등도 바울에 대해 어떤 직책(로마에서의)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는데,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에는 매우 귀하게 대접받았습니다.

* 즉,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최고 학문을 가르치는 곳까지 나왔음을(가말리엘의 문하) 지짗하는 말씀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가정은 지위,재산 다 같이 상류의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래 자료를 참고하세요.

------------------------

바울:Paul(인명)

 

(Paul) 뜻 =「작은 자」

라틴 이름은 Paulus, 히브리 이름은 Sauls(사울로스) Saouvl(사울)=(샤울)이다.

 

1. 사료 :

바울의 생애˙사상˙인물 등을 연구하는데 참고하여야할 사료로써는 바울자신의 서신 10 수편과 바울의 동역자 누가가 쓴 사도행전 등이 있다. 바울을 알려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이 쓴 서신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귀중한 연구 자료로 되고 있다. 특히 바울의 서신에는 자기의 소신, 감정, 성격 등을 여실히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하여 이를 읽음으로써, 그의 인물에 대한 통찰을 용이하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쓰여진 서신이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밖에 바울의 생애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후반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경력 기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원래 사도행전은 바울전으로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전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간단하거나, 중요사항이 빠지거나, 또는 서술이 고르지 못한 점이 적지 않게 발견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체로 바울의 외적(外的) 경력을 정확히 전한 것으로 보아도 무관하다. 즉, 사도행전은 주로 바울의 외적 경력을 기록하고, 바울의 서신은 주로 그의 내적 생활을 반영한 것, 양자를 병용함으로써 대략 이 대사도의 진면목을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밖에 믿을 만한 문헌적 사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세네카(Seneca) 사이에 내왕했다는 서간집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6, 7세기의 위작(僞作)이다. 다만 3세기 경에 쓰인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이란 것에는 다소 신뢰할 만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의 환경 연구는 문헌이 주는 지식의 부족한 점을보충하는 것이며, 또 그를 이해하는데는 필요하다. 특히 신약 시대의 유대인의 사회˙문학˙사상˙생활 등을 앎으로써 유대인인 바울에의 깊이 또는 정확한 통찰(洞察)을주는 수가 많다. 또 바울은 당시의 희랍˙로마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무대로 하여 활약했기 때문에 이 세계에 관한 지식은 또 그를 아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 고전 연구˙여행˙고고학적 연구 등으로 끊임없이 풍부하게 해 주는 팔레스틴과 희랍, 그리고 로마 세계에 관한 지리적˙사회적˙역사적˙사상적 지식 등도 바울 연구를위해 활용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Ⅰ. 바울의 생애:

먼저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의 연대를 정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바울서신에도, 사도행전에도 아무런 명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헌·비문·역사적 사건 등에 대해 면밀 주도한고찰이 필요하므로 도저히 일반 사람에게는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또 전문적 연구를쌓은 학자들 사이에도 완전한 일치를 보기 어렵다. 참고로 대표적인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죽음, 승천 AD 30

바울의 회심 35(?)

제 1차 예루살렘 방문(갈 1:18) 37다소 체재 37- 43

제 2차 예루살렘 방문(행 11:30) 44

제 1차 전도여행 44- 48(?)예루살렘 총회 50

제 2차 전도여행 51- 53데살로니가 전˙후서 52

제 3차 전도여행 54- 58갈라디아서 55고린도 전서 56이나 57고린도 후서 57로마서 57- 58피포(被捕) 58가아사랴에서의 감금 58- 60베스도 부임 60바울의 로마 도착 61골로새˙빌레몬˙에베소서 61이나 62빌립보서 62이나 63제 1차 로마 감금으로부터 석방 63디모데 전서 64이나 65디도서 65이나 66디모데 후서 67바울의 죽음 67다소 바울의 생가에 있는 바울의 우물

 

(1)회심전:

사도행전 21:39에 의하면 바울은 스스로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기리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그의 생장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첫째, 그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자기의성장에 대하여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5,6)라고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의 생활과 사상과의 근저에는 유대 민족의 피와 전통, 그리고 종교가 가장 힘있고 뿌리깊은 기초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소에는 대학도 있었고, 신약 시대의 동서 문화가 모인 중심지이며 문화적 도시였다.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가서 율법을 배웠기 때문에 다소의 이교(異敎) 문화가 그 유소년 시대에 미친 영향은 적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의 수업 후 수년간과, 회심 후 수년 간을 다소에서 보냈으며, 이것이 바울의 인격, 사상 형성에 상당한 작용을 한 것은 무시할 수 없다.

 

다음 그는 `로마 시민'이었다.

즉, 그는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22:28에는 그가 `나면서부터' 시민권을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생득적(生得的) 로마인 이외의 사람으로서 그 시민권을 얻기위해서는 사도행전 22:28에 나타나는 천부장의 경우에는 "돈을 많이 들여" 시민권을 얻었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 정부에 대하여 상당한 공훈을 세우든가 또는 오랜가문에 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은 점들을 종합해 보면 바울의 가정은 지위,재산 다 같이 상류의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의 성격에 좋은 의미에서의`귀족적인' 어떤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난국에 처했을지라도 그는 "나는 로마인이라"라는 긍지와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시민권 때문에 몇 번이나 로마 정부의 보호를 받아 박해로부터 벗어나 소원인 로마에까지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가 질서를 중시하고 권세를 잡은 자에게 복종할 것을 역설한 것도 그의 시민적 의식에 기초한 것으로 풀이된다.유대의 종교, 희랍 문화, 로마의 지배, 이 3대 세력을 고려에 넣지 않고 바울의 생애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바울은 순수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는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빌 3:5,6).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은 유대교 중에서도 순수성과 엄격을 자랑하는 바리새파의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바울을 일찍부터 예루살렘에 보내 교육을 받게했다.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행 22:3), 이것이 몇 살 적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어떤 기록에는 그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된것은 15세쯤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예루살렘에서의 교육은 바울을 열렬한 바리새 주의의 교대교도로 만들었다(행 22:3).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은 당시 율법 선생 중에서 학식과 인격이 모두 함께 뛰어난 인물이었다.사도행전 5:34 39에서 보는 그의 연설은 그의 인품의 원숙미(圓熟味)와 설득력이 큰것을 남김없이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스승 이상으로 율법에 대하여 순수한열정을 나타냈다. 즉,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年甲者)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이것은 당시를 회고한 바울의 술회이다.

 

그의 예루살렘에서의 수업에서 얻은 최대의 것은 절대적인 유일신의 신앙, 엄숙한 윤리 관념, 열렬한 애국 정신, 그리고 율법에 대한 전념적 충성이었다. 이리하여 바울은 그 가문, 교육, 학식, 열심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몇 년을 예루살렘에서 지냈는지, 또 수학을 끝마치고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두 분명치 않다.

 

아마 예루살렘에서의 수학 후는 고향 다소에 돌아가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이 전하는 역사에서 바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의 순교때이다(행 7:58). 그는 이 순교 때(AD 30)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때까지 15년 동안 줄곧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을 때 그는 이에 찬성했다(행 8:1).

 

이런 성경 기사로부터 바울이 유대인 의회의 일원으로서 스데반의 죽음을 인정했다고 결론 지을 수는 없으나, 그가 이 일에 있어서 적극적인 역할이 높았던 것은 확실하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에 대해 이미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틀림 없다.

 

그러나, 그가 생전의 예수를 만난 일은 없는 것 같다. 만일 만난 일이 있었다면 바울은이것을 역설했을 것이나, 그런 기사가 없다. 고린도전서 9:1은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가리키는 것이며, 고린도후서 5:16은 전통적 메시야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6:9에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라고 되어 있는데, 바울이 그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여하튼 스데반 박해에 참가한 이래 바울은 그리스도교도 박해의 장본인이 되어그리스도인을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여 말하는" 자로 단정하였다.

 

바울에 대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이며,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와 옛부터의 유전, 율례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용서할수 없는 범죄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행 8:3). 이렇게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을 스스로 생각하고"라 말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 적의를 품은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의 예수를 메시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후에 진술한 것처럼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영광과 승리의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 고로 추악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죽은 목수의 아들을 메시야라고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의 자랑을 몹시 상하게하고, 전통적 신앙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유대교의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양자의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간파하였다.

 

 

(2)회심:

바울의 박해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외국 성에까지 미쳤다(행 26:11). 그는"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면서 다메섹으로 향했다. 길을 재촉하여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느닷없이 회심하였던것이다.

 

그야말로 그것은 돌연한 회심이었다. 그는 그 순간까지만 해도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 하였던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과 율법에 가장충실한 행위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마음이 약해졌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바울의 회심 사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세 번 나온다(행 9:1-19,22:6-16,26:12-18).

 

바울 자신의 서신에는 회심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만, 사건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도행전의 기사는 서로 상당한 차이가 보이나근본은 일치하고 있다. 즉, 사건은 다메섹 근방에서 일어났다. 때는 대낮이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다.

 

바울은 그 때문에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물었다. 한즉 대답이 있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리하여 바울은 회심하고 또 특별한 사명까지도 받았다. 이상이 사건의 핵심이다.

 

바울이 땅에 엎어짐과 동시에 소경이 되어 동행인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 성으로 들어가 거기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 사흘째 주님이 다메섹의 아나니아라는 신자를 바울에게 보냈다. 그는 바울에게 가서 그의 눈을 보게 하고 세례를 주었다. 또 바울을 택한데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라는 특별한 사명에 소명된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분은 부활하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부활하신 주님은)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영광의 모습도 보았다.사도행전 26:19은 이것을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말하며, 또 고린도전서 9:1에서바울은 "우리 주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주관적인 환상을 본 것이 아니고하늘의 영광에 쌓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예수그리스도는 바울의 심중에 성령에 의해 계시되어 그것에 의해 그가 그때까지 박해한나사렛의 예수를 주 또는 구주로서 맞아 들인 것이다(갈 1:15,16).요컨대 바울의 회심 경험에서 객관성과 초자연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택정(擇定)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분명해졌다."가시채를 뒷발길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라는 말에 대하여 바울은 그 당시 이미 유대교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으나, 심중의 고투(苦鬪)를 잊기 위해 외면적으로는 한층 더 박해에 열심이 되었다는 유력한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채택하지 않는다. 리버디노 회당에서의 스데반과의 논쟁이나 스데반의 순교시 그의 귀한 모습이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인상을 주었는지는 제쳐놓고라도, 이것으로 바울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대립이 생사를 건 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유대교도로서 나사렛의 예수를 메시야라고하는 기독교도들의 주장 증거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갈 1:15) 주 예수의 뜻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것을 거부하면 헛되이 상처만 받게 될 따름이다. 무지와 불신앙의 죄중에 있을때, 그는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를 보고 신앙과 지식을 받았던 것이다.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깨어지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은 몸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바울의 회심은 바울 한 개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 가장 중대한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3)회심 후:

바울의 전도 생활은 회개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는 다메섹에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또 "사울(바울)은 힘을 더 얻어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라고 기록되어있다(행 9:20-22).

 

그의 회심은 동시에 사도에의 소명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곧 전도생활이었다. 이제 새 확신을 얻은 그는 즉시 그 전파에 착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 내부 생활에 일어나는 변화와 그 의의에 대해,또 앞으로 취할 방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기도할 필요를 통감했다. 따라서그는 "아라비아로 갔다가"(갈 1:17) 잠시 조용히 때를 보냈다. 이 다메섹 교외의 아라비아에서 보낸 기도와 명상의 기간은 어느 정도였는지 분명치 않다. 그것은 수 주일,길어서 수 개월 정도였으리라.

 

바울의 마음 속에서는 열렬한 사명감이 활활 타오르고있었다.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무턱대고 장시간을 도피자적 생활에 소비한다는것은 그의 본의도 아니고 성격도 아니었다. 다메섹으로 돌아오자 다시 예수의 복음을전파했으나, 헬라파 유대인들이 죽으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제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거기서 도망쳐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때 이미 회심한 지 3년 후였다(갈 1:18). 예루살렘에서의 된 일에 대하여 사도행전이 전하는 것(행 9:26-30)과 바울 자신의 기술(갈 1:8-24)한 것 사이에는 일치점이 없는 것 같이 보이나, 같은 사건을 두 필자가다른 관점에서 전하는데서 오는 차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먼저 선배인 베드로를 찾아 갔고, 또 주님의 형제 야곱을 만났다. 바울은 그들을 통하여 생전의 예수에 대해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 관(觀)이 항상 역사적 예수에 뿌리박혀 있는 것은 이럴 때 얻은 예수의 사적(事跡)에 관한 지식 때문일 것이다.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바울의 회심을 의심하고 두려워했으나, 바나바 집사의 소개로 겨우 제자들의 틈에 끼이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이때 교회가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았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완전히 판이한 과정을 더듬었을는지도 모른다.바울이 다메섹에서 유대인을 피해 도망한 탈출구바울은 예루살렘에 15일 동안 머물렀으나 그 동안도 예수에 대해 전도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꾀하였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다소로 보냈다.

 

사도행전 22:17- 21에 이때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이방인에대한 전도의 사명을 재차 나타내시고 격려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향 다소에서의약 10년 동안의 바울의 동정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상당히 긴 세월이었으므로 그동안 바울은 결코 헛되이 보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1:21- 24에 의하면, 유대의 여러 교회가 수리아, 길리기아 지방에 간 바울에대하여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함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며, 또 그 후 예루살렘 회의의 결의서를 "바울 등을 통해 안디옥에 보낸 것"(행 15:23)을 보면, 이 기간에 그가 수리아, 갈리기아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한것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행 15:41참조). 그동안 안디옥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전도붐이 일어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가 파견되었으나, 그 한 사람 가지고서는 도저히 충분한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거기서 둘이 협력하여 기독교 전도 사상 획기적인 이방인 전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스챤(Cristianov"), 즉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이 안디옥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확대되고, 따라서 많은 이방인 신도가 교회에 들어옴에 따라 당연히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와의 관계, 전도구역의 문제 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그때 유대 지방에 기근이 일어나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구제하는 일에 임하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파견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사적으로 만나,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전함을 맡기"로 하고, 여기서 그들은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 갈라디아서 2:7- 9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바울은 회개의 순간부터 이방인에 대한 선교자로서 택함을 받았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행 9:15,26:17,18). 그리하여 이 자각에 입각하여 다메섹˙예루살렘˙수리아˙길리기아, 그리고 안디옥을 전전하면서 꾸준히 전도해 왔다. 그가 갈라디아서의 서두에서 선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직접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허락과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그러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바울의 입장을 이해하고, 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위해 능력을 주신" 것을 인정해 준 것은, 바울로 하여금 자유로이 행동하게 한효과는 있었다. 지혜가 있는 바울은 이 호기를 포착하여 여기에 대 전도여행을 시도하게 되었다.

 

 

(4)제1차 전도여행:

바울의 대 전도여행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대한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행 13:1-3). 교회는 이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전도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요한 마가가 조수로 동행하였다. 이들은 먼저 구브로 섬에건너가 섬 전체를 순회하고 그 후 소아시아에 건너가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전도여행인데, 사도행전 13장,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왜 이 코스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때 소아시아의 남해안을 따라 전도할 계획이어었는데, 버가에서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으므로 건조한 고원 지방인 갈라디아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한 수리아, 길리기아의 주변 지방으로 전도의 범위를 확대하는 뜻으로 이 여정을 택했다고 한다. 이 전도여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고 일반적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① 이 여행의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브로 섬 바보 전도이후는 거의 `바울과 바나바' 또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고쳐 기록되어 있다. 즉, 여행의 중간 이전에 이미 바울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이방인에 대한 사도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에 이른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바울이 바보에서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킨 때부터 누가는 히브리 이름 사울을 라틴 이름 바울로 바꾸어 놓았다.

 

② 바울은 항상 지방의 중심 도시에 집중적으로 전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전도 방침의하나였다. 혹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신념에서 하루 속히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도시 중심의 전도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또 도시 출신인 그가 특히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③ 그는 어떤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다. 이것은 첫째, 동포를 구원하려는 생각에서였으나, 둘째,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경건한 이방인 구도자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어진다. 초대 기독교가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던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이미 유대교에 의해 종교적 윤리적으로 양육되고 있던 이방인 구도자가 계속 기독교로 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재빨리이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④ 바울의 메세지는 대체적으로 유대인에 대해서는 예수에 의한 구약 종교의 성취 완성,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일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역설하여 때를 얻든지못얻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13:16 41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14:15 17의 루스드라인에 대한 설교 등은 그의 메세지의 내용을 엿보고도 남음이 있다.

 

⑤ 바울은 단순히 설교하고 신도를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를 세우고성도의 교제를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귀로에 자연스럽고 안전한더베 다소 안디옥의 코스를 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다시 순회한 것은이와 같은 교회 조직을 촉진시키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열렬한 전도자임과 동시에 용의주도한 목자인 바울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도여행 후 바울과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말하고 감사했다.

 

(5)예루살렘 회의:

상술한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는 대 성공적이었으나, 유대주의적 신자들은 전통을 중시하여 이를 기뻐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바울 일행이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여행의 결과 보고를 하고, 일동이 하나님의은혜에 감사하고 있을 때, 유대에서 온 유대주의적인 어떤 신자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주장하여 바울의 예수를믿는 신앙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정면 도전했다. 이 때문에 교회 내에 분규와 논쟁이일어났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바울˙바나바, 사도들, 그리고 장로들이회집하여 협의하게 되었다. 갈라디아서 2장은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것이며, 사도행전도 이 회의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회의 결과는 기독교의 장래를 결정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예루살렘의 중심적 사도들, 특히 베드로가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여 유대주의적 입장을 부결함으로써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베드로는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라는 연설을 했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결의문을 각 교회에 보내자는 야곱의 제의가 채택되었다. 바울은 복음의 자유원칙이 승인되었으므로 야곱의 제의에 찬성했고, 그 결의문을 이방인 교회에 주지시키는 역을 바나바˙바사바˙실라와 더불어 맡았다. 이것은 바울측의 승리였다. 원래 위의 네 가지 금지령(행 15:20=15:29)은 유대적 관습에서의 양보를 의미한다. 바울은 원칙적으로 자기의 주장이 인정된 이상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위해 관대히 양보했다. 이렇게 그들은 상호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네 가지 금지령 중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계 2:14,고전 10:16-22에, 음행을 멀리 하라는 것은 신약에 많이 있으니 논할 필요도 없고, 피를 먹지 말라는말씀은 살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 또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구약의 사상이기도하다. 피는 생명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XCodex Bezae〉에는 `목매어 죽인 것'이 없다).

 

(6)제2차 전도여행:

예루살렘 회의 결과 바울의 전도 방침과 주의에 대해서는 전교회적인 공식 지지를 받아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더욱 확고하게 정해졌으므로 바울은 바나바와 더불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제1차 전도여행 도중 버가에서일행을 버리고 도중 하차한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서로 "심히 다투어" 마침내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를 향하여 떠났다. 바울은 도중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도 일행에 가담했다. 바울은 처음에 소아시아 서쪽 에베소의 전도를뜻했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므로 드로아로 내려가 하나님의지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에, 환상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므로,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이에 비로소 구라파의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행 16:9,10).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이때 홀연히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행 16:10). 이것은 본서의 저자가 이 전도여행에 동행한 사실을 말해 준다. 즉, 누가라는 의사이다. 그 이유는, 본서에 의학술어가 있고, 또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환상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 하나'는 실은 다름 아닌 누가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누가의 종용(慫慂)이 구라파 전도의계기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 자신의 심중에는 하루 속히 구라파에 복음을전파하지 않으면 못견딜, 참을 수 없는 열정이 있어 그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발걸음을재촉한 것은, 사도행전 16:1- 10의 글쓴 태도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다채롭고 의의깊은 전도가 펼쳐진다.사도행전 16:1- 18:22에는 제2차 전도여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주의할 점은,2차 전도여행 중 네압볼리에 도착하는 사도 바울X네압볼리 사도 바울 기념 교회〉

 

①마게도냐 지방에서는 여자 결신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빌립보에 있어서, 즉 구라파에 있어서의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에 있어서는 루디아라는 부인이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인의 위치를 시사하는 사실로서 의의가 깊다. 빌립보 교회에는 또 순두게와 유오디아라는 유력한 여신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아덴에서는 `다마리아라 하는 여자'가 회심자들 중에 섞여 있었다.

 

②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 운동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였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면서 바울 일행을 체포하려한 것은, 그들의 운명에대하여 불길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었다.아덴의 마르스 언덕. 바울이 이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란 설교를 하였다.

 

③이여행에 있어서 기독교는 헬라(희랍) 사상과 처음으로 정면에서 접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덴에 있어서 바울은 에비구레오파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이에 극히 철학적인 연설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아실패였다. 믿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후 바울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지혜의 권하는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1-5) 전도하려고 결의를굳혔다.

 

④고린도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이교 사상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생활과도 접촉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독교화하는데 다소의 효과는 거두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아직 교회 그 자체가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고린도전서에서 취급되고 있는 제문제는, 사실은 고린도에 있어서의 이교 생활과 기독교와의 접촉에서 생긴 것에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생활의 기독교와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몇 개의 중대한 문제를 교회에 던지게끔 되었다. 여하튼 이교 생활의 전형적 대표 도시인 고린도에 유력한 교회가 설립된 것은 위대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⑤빌립보에서는 로마의 관헌에 체포되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더니 그 주인이수입이 끊어지는 까닭에 군중을 충동시켜 소송하였다. 그러나 밤중에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들은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전도하고 이튿날 풀려 나왔다(행 16:16-40). 이렇게 1년 반에 걸친 고린도 전도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얻은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바울이 갇혔던 빌립보 감옥데리고 배로 에베소에 건너가 거기에 이 부부를 남겨 두고, 그와 실라 일행은 일단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바울의 고린도 도착은 AD 50년 초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따라서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다른 사건의 연대를 추정하는 열쇠가 될 만한 중추적인 연대이다.1905년 에밀 부르게XEmile Bourguet〉가 연구 발표한 델피 비문XDelphi 碑文, 글라우디오 황제가 델피 시민에게 보낸 서신〉에 바울의 고린도 전도시 아가야 총독으로 있는 갈리오X행 18:12- 17〉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그의 부임하던 해,따라서 바울의 고린도 도착 후와 체재X滯在〉의 연대를 아주 확실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7)제3차 전도여행:

제3차 전도는 제2차 전도여행의 연속이었다. 제2차 때 성령으로 금지되었던 소아시아 전도, 특히 에베소 전도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바울은 일찍부터 중심적 대도시의 중요성에 유의하여 그 전도를 꾀하였으나, 이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년 간의 그 숙원을 이루게 된 바울은 약 3년동안이도시에머물렀다. 그의 오랜 전도생활에서 이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물은 곳은 없었다. 그는 이 동안 부근의 각 도시에까지 전도를 시도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에는 에바브라를 통하여 복음을 전했다(골 4:13). 다른 여러 도시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역자를 보내 전도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누가는 "아시아에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라고 기록했다.그러나 바울 자신은 줄곧 에베소에 머물러 전도에 전념했다고 여겨진다. 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에베소에 있어서는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려" 있었다.한편, 그에게는 "대적하는 자가 많아" 실로 다사다난한 3년이었다. 사도행전 19:1 41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험악하게 되어 바울은 적어도 한 번은 직접 고린도에 가서 화해에힘쓴 일조차 있었다. 실로 "날마다…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 있었으니 감개무량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에 건너갔을 때"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고린도에 보냈던 디도의 기쁜 보고를 받고 그는 비로소환희와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고후 7:5-16). 아마 이때 일루리곤 지방에서의 전도를시도했을 것이다(롬 15:19,20,행 20:1-3). 이렇게 그는 완전히 화해한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평화로운 3개월을 보냈다.이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고"(롬 15:19),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을 정도로되었다(롬 15:23). 전도에 지칠줄 모르는 그의 눈길은 더 서쪽인 로마와, 로마 이서(以西)의 나라에로 돌려졌다. 사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롬 15:18-29). 그리하여 이제 여러 해 전부터의 숙원이 이루어지려는 찰라에 우선 로마 교회에 자기의 계획을 말하고, 그와 동시에 전부터 품고 있던 소신을 밝혔던것이다. 이것이 곧 다름아닌 로마서이다. 그러나 로마에 가기 전에 일단 예루살렘에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모든 서신이 보이듯이(고전 16장,고후8장,9장,롬15:25-28), 모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준비하여 이것을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지참시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는 이와 같은 헌금으로 모교회와 이방인의 여러 교회와의 사이에 밀접한 연락을 갖게 하여 굳은 결합을 유지시키려 했던것이다. 이렇게 그는 이 대표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갔다(행 20:4).빌립보에서는 누가가 일행에 참가한 것은 `우리'라는 대명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다는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행 20:5). 오랜 격심한 전도생활 때문에 지칠줄 모르는 바울도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육체에 가시'가 들은 병약한 몸이었다. 여하튼 이때 의사 누가의 간호가 필요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에 이를 때까지누가는 항상 바울의 반려자로서 행동을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에 못지 않는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에의 여행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비아 도로로사'(슬픔의 길)였다. 그도, 사람들도불길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라고 말했다. 그가 도중에 들린 드로아˙밀레도˙두로˙가이사랴 등의 각지에서 형제들과의 작별은 모두 눈물이었다. 특히 밀레도에서의 에베소의 장로들과의 작별장면을 이를 데 없이 애절하였다. 신약성경 중 이 기사만큼 페이쏘스(pathos)에 풍부한 곳이 다른 데는 없다(행 20:17-38)

 

(8)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오순절 전날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따뜻하게 맞았다. 성도는 이 명절 때문에 각처에서 모여들은 유대인으로 붐볐다. 그 중에는 바울의 전도를방해하고 그에게 적의를 품은 극단적인 반바울주의자들도 섞여 있었다. 팔레스틴 이외의 곳에서 로마 관헌의 제지로 바울 살해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로마의 천부장이 달려와서 바울을붙잡아 안토니아의 영문으로 끌어갔으므로 간신히 무사하게 되었다.누가는 당시의 사정과 그에 뒤따른 그에 대한 신문과 그의 변명 등에 대하여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행 21:27-23:10). 유대인들 사이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지 않는다"고까지 맹세한 일단의 혈맹단(血盟團)까지 조직되어 바울의 신변에위험이 밀어닥치고 있었으므로, 그는 밤중에 로마 군대에 의해 가이사랴로 호송되어로마의 총독 벨렉스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벨렉스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고, 그의 후임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두 사람이 다 신속한 처리를하지 않고 바울을 2년 동안이나 옥에 가둔 채 두었으므로 그는 분연히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신청했다. 이리하여 그는 백부장 율리오의 호송하에 로마로 가게 되었다.당시 가이사랴에서 로마에의 항해에는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도 동행했는데, 이 항해에대해서는 사도행전 27장에 매우 자세하게, 또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의 항해기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귀중하고 또 흥미진진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다한 곤란을 겪은 다음 바울 일행은 AD 60년 초봄 보디올에 도착, 거기서 주 안의 형제들의 영접을 받고 마침내 로마에 입성했다. 이렇게 다년 간의 숙원을 이룰 수있었다고는 하나, 결박된 몸으로서 로마 입성이란 그도 감?[인물편]바울바울개무량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로마에서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허락"되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재판의 날을 기다렸다. 로마에서는 많은사건이 산적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의 성소가 심의될 차례가 오기까지는 실로 2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 동안 그는 헛되이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다. 많은 동역자가그에게 출입한 것은, 그때 집필된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의 끝에 열거되어 있는 인명을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빌레몬서는 이때 있었던 재미있는 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빌립보서 1:12- 18에 의하면, 그 당시 바울은 더 적극적인 전도를 하여 비상한 성공을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바울이…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 말을 끝맺고 있다.

 

(9)그 후의 바울:

사도행전 이후의 바울에 대한 소식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바울은 2년 간의 연금 후 석방되어 계속 몇 년 동안 더 전도 활동을 계속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기사는 사도행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바울의 활동을 전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서버나(에스파니아)까지 전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 감금되었다. 디모데후서는 옥중에서 죽음을 눈 앞에 두고썼을 것이다. 바울이 죽은 연대는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AD 67년, 히에로님스에 의하면AD 68년이다.Ⅱ.바울의 인물고린도후서 10:10은 "그(바울의)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썼다. 이것은 고린도인들의 바울에 대한 비판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풍채는 과히 훌륭한 것 같지 않다. `바울과 테크라 행전'에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다리가 굽고, 골격이 다부지고, 눈썹이 서로맞붙고, 콧날은 약간 굽고, 표정은 온아(溫雅)함이 넘쳤다. 때로는 인간 같고, 때로는천사 같이 보였다"라고 한다.

 

15세기의 니세포라스는 "바울은 키가 작고 앞으로 숙은듯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덮어 놓고 상상적이라고 부인할 수만은 없다. 종합적으로 말해 바울의 외모는 사람을 위압하는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와 같은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있었다. 이 "대할 때는 약하고"라고 조소받던 바울을 갈라디아인들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같이" 영접하였다(갈 4:14).

 

에베소의 장로들은 바울과의 작별을 애석하여 "크게 울며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행 20:37).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다"(롬 16:3,4). 즉, 바울의 내적 사람의 아름다움, 이것이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바울의 안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새로 지음받은 것'의 빛나는 모습이 있었다.바울은 병이 있는 몸이었다.

 

고린도후서 12:7에서 그는 `육체에 가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다"고 했다. 그것이 과연 어떤 성질의 병이었는지, 설이 구구하여 알길이 없으나, 여하튼 큰 고통과 불편을 준 것만은 틀림 없다. 그의 만년에 의사 누가가 늘 동행한 것은 병고에 괴로움을 받기 일쑤라서 그를 간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병고와 싸우면서도 그와 같은 대전도를 수행한 바울은 참으로 체력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는 강한 사람이기보다는 `강하게 된 사람'이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란 그의 증언이다. 또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9)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전도자로서의 자기를 끊임없이 연단시키고 있었다."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얼마나 비장한 말인가!바울은 웅변가가 못되었던 것 같다.

 

고린도인들이 보기에 바울은 "말이 시원치 않다"고 했다. 고린도후서 11:6에서 바울은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는 웅변술을 수득(修得)한 일은 없다. 고로 당시의 헬라 사람의 귀에는 그의 변설은 미숙하고 졸렬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의 기교에 중점을두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로 했던 것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그는말했다.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것은 그의 장기(長技)가 아니었으나,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살전 1:5)은 그의 의지였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에 불타는 듯한 열정과 신선미가 넘치는 독창성이 있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그의설교를 한 번 들은 사람들은 다시 설교를 듣기 위해 거의 모두 다 모였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바울의 말의 서툴음은 그로 하여금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에의지케 하고, 그의 체험을 통하여 보인 영의 생명을 증거케 하였던 것이다.바울은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고 전도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두려워하며 떨었다"(고전 2:3,고후 7:5)고 말한다.

 

그는 자기의 무력함을 종종 느꼈다. 그래서 그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격려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힘을 얻었던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라고 고린도에서 어느 날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말했던 것이다(행 18:9). 사도행전 23:11에서는 "담대하라"라고 격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레미야선지자는 부름을 받았을 때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라고 주저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받고 비로소 일어섰는데, 바울도 자기의 능력을 믿고 일어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붙잡혀 전도 전선에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이렇게 하나님에 의한 내부적강요에 의해 일어선 바울은 인간적 약함을 초월한 대담함과 용기로 전도한 것이다.바울은 평생 독신이었지만, 결코 은사적(隱士的)이거나 비인정적인 성품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마음에는 극히 따뜻한 애정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쓸쓸한 은사는 아니었다. 아마 바울 만큼이나 친구를 구하고, 가정을 즐긴 사람도 드물 것이다.그는 믿음의 친구에게 즐겨 `나의 형제' `나의 아들' `나의 사랑하는 아들' 등의 사랑이 가득 찬 가정적 용어를 썼다.

 

그는 또 어머니의 심정을 존중했다. 노예 오네시모에대해서는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몬 1:10)이라고 했고,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라 말하고,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에게는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 2:7)라 자기를 말하고, 갈라디아 사람에게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외치고 있다(갈 4:19).

 

또 "그(루포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롬 16:13)고말한 바울은 참으로 어머니의 사랑에 느끼기 쉬운 상냥한 마음씨의 사람이었던 것을알 수 있다. 그가 뜨거운 사랑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心腸)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등과 같은성구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빌립보에서는 루디아의 집, 고린도에서는 아굴라˙브리스길라의 집, 가이사랴에서는 빌립의 가정, 구브로 사람 나손의 가정에 손님이 되어 이를 기뻐했다. 또 그는 `동역자' `군사' `함께 갇힌 자'(fellow prisoners) 등의용어를 즐겨 쓰고 있다.

 

그는 정말로 친구로서 가장 우정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천국을 위해 스스로 된 고자'였던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족을 이루고, 이에 대하여 전신의 사랑을 쏟은 것이었다. 바울은 예수와 더불어 진심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다. 에베소의 장로들에 대해서는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고 말하고, 고린도 사람에게는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 2:4)라고기록하였으며, 청년 전도자 디모데에게는 "네 눈물을 생각하여"(딤후 1:4)라고 자못동정어린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강직하고 준엄한 반면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의 불철저한 태도에 대하여 "저를 면책하였다"(갈 2:11,14)고 서슴치 않았으며, 빌립보 관헌의 비겁한 처사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행 16:37)고 요구하고,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는 "회칠한 담이여,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행 23:3)라고 대갈(大喝)하였다.

 

그가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러전도할 것을 뜻한 것은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전 16:9)는 이유 때문에서였다.바울은 사도로서 놀라운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갈 1:1) 자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거의 에고이스트라고 여겨질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권위를역설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 12:11)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고전 15:10)라고 말하며,또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6)고 권했다.

 

이와 같은 자신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사도라는 강한 자각과 사명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사명감이 그를`담대히' `거리낌 없이' 전도시킨 동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지극히 겸손하였다. 스스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에베소에서의 그의 전도 생활은 `모든 겸손'(행 20:19)을 다했다는것은, 그 자신의 증언이다. 이와 같은 자신과 겸손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참으로 하늘로부터의 사명을 느낀 인물에게는 이 두 요소가 혼연히 융화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그는 `질그릇'이나 `쓸데 없는 종'으로서 꿇어 엎딜 뿐이었다. 그런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세워진 사도임을 자각할 때,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권위와 식견을 가지고 일어섰던 것이다.바울의 인격에 있어서 더 주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는 일면 신비적 경험이 풍부함과 동시에 또 날카로운 이지적 두뇌의 소유자였으나, 또 다른 일면에 있어서는 극히 실제적인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종종 `환상'을 보았다. 그의 생애의전기는 거의 항상 그와 같은 신비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세째 하늘에 이끌려간…(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말할 수 없는 말을들었으니…"(고후 12:24)와 같은 경험도 있었다. 그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라는 깊은 영적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는 또 극히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갈라디아서˙로마서와 같이 사상적으로 심원하고 논리적으로 정연한 서신을 쓸 수 있었던 바울은, 단순한 사상가나 이론가로서도위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복음의 가르침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현대의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쌓은 것은 다름 아닌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유대주의자도, 이방의 철학자들도 그의 예봉(銳峯) 앞에서는 아무런 권위도 지킬 수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실제자(實際者)였다. 전도를 하게 되자 그는 극히 조직적인 계획 하에 이를 수행했다.

 

또 교회를 통일시키기 위해 예루살렘 모교회와 지방의각 교회와의 사이에 끊임없이 연락을 유지하는데 진력하였다. 그는 또 혼자서만 동분서주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동역자들과 같이 전도에 종사했으며, 혹은 그들을 파견했다. 그는 혼자서 공명을 얻으려고 무턱대고 돌진하는 무사와 같지 않고, 만군을 지휘하는 대사령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질서를 소중히 여기고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라고 가르치고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라고 역설하기로 했다.바울의 인격에서 풍성한 근대적 인간미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울을 바울답게 한것은 이른바 인간미도 아니고 근대미도 아니었다. 그것도 인간을 초월하고,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역사하여 그를 변화시킨데 불과하다.

 

다메섹으로가는 도상에서 체험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야말로 바울을 설명하는 열쇠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는 것은 바울의 전심전령(全心全靈)을 불사르는 뜨거운 열정이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고 말하고, 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말한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바울은 놀라우리만큼 다면적인 성격과, 재능에 뛰어난 사람이었다.그는 생득적으로 종교적 천재였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전인격적인 사항으로써 파악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지성의 소유주였다.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의미하는 바를 질서 정연하게 해명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아름다운 성정을지니고 있었다.

 

그는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진리를 위해 전심전력 다할 수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또 실천가였다. 이론과 실천은 그에게 있어서 항상 불가분리의관계에 있었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도로서 그는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다.

 

기독교는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의 해석자를 발견했다. 기독교의 세계적 종교화는 그 대부분을 바울의 활동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의 근본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또 윤리나 교회의 실제적 문제 등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또 그에 의하여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상(像)을 볼 수 있다.

2007.01.08.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성경말씀 + 성경사전 자료 참고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ceph****
초인
개신교 15위, 소규모종교, 가톨릭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사도행전 22장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25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사람이라 하니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29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사도바울이 어떤 로마조직의 직책을 맡았다는 문헌이 없습니다.

따라서 직책이 없었다고 보아야합니다.(물론 있었을지도 모르나 알수가 없습니다)

단지 로마의 정식 시민권자이고 태어날때부터 그러하였다고 보아 부모때부터 시민권이

있었다고 보아집니다.

 

또한 당시 로마제국의 시민권은 그 이전의 도시국가의 시민권과는 다른 시민권입니다.

즉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수 있는 권리(일종의 투표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권리이고 당시로서는 특히 이방인으로서는

대단한 권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2007.01.08.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