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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창군 흥덕면의 문화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11 작성일2019.05.19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관내의 문화재들이 무엇무엇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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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의 문화재)

1.흥덕 당간지주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6호

지 정 일 1973.06.23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교운리 138-3

시 대 고려시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해 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서 이를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흥덕향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이 당간지주는 속해있던 사찰이 ‘갈공사’라는 것만 전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당간지주의 형태는 기단부와 당간받침이 모두 사라진 채 모서리끝을 둥글게 처리한 네모진 좌 ·우 두 기둥만 남아있다. 기둥 안쪽 맨 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두었고, 바깥쪽에는 한면에 3구씩 연꽃무늬를 새기었다. 특히 이 연꽃무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것이다.

원래 절단되어 있던 것을 1987년 복원 ·수리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추측된다.

2.흥성동헌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

지 정 일 1976.04.03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동헌길 4 (흥덕리 428-3)

시 대 조선시대

동헌은 조선시대의 각 행정단위에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더 청사이다.

이 건물은 당초 흥덕객사로 알고 있었으나 1983년도 해체보수시 발견된 상량문에 흥성읍성(지금의 배풍산)에 있던 동헌건물을 조선 순조7년(1807)에 이곳으로 이건한 것이 확인되어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흥성은 흥덕의 옛 지명으로 고려 충선왕(1308~1312)이 즉위하자 왕명을 피해 장덕을 흥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부군폐합령에 따라 무장과 함께 고창군으로 통폐합 되었다.

3.흥덕향교 대성전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지 정 일 1985.08.14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흥덕향교길 28-12 (교운리 20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흥덕향교는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처음 지었고, 숙종 원년(1675)에 다시 지었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4.남당 회맹단

종 목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

지 정 일 2004.06.08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460

시 대 조선시대

남당 회맹단은 혈맹단이라고도 하며, 채홍국 등 고창 지역 300여 명의 선비들이 구국의 기치로 호남 의병을 창의하고자 삽혈 동맹을 하고 쌓은 맹단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이 격문을 돌려 창의하여 92명의 의사와 5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단을 쌓은 뒤 백마의 피를 마시며 다섯 가지의 맹약을 내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혈맹을 하였다.

이들은 혈맹단 앞에서 훈련도 하고 군량을 모집하여 출병을 하였으며,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시 창의한 뒤 출전을 하여 배풍령, 장등원을 거쳐 부안 호벌치에서 23일간의 격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혈맹단은 전국 유일의 충혈이 깃든 곳으로, 유림과 유족들이 뜻을 모아 이곳에 기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채홍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자는 광보, 호는 야수이고, 본관은 평강으로, 채충경의 현손이며 채치의의 아들이다. 1534년(중종 29)에 부안에서 출생하였고, 흥덕 남당마을에 이거하였다. 채홍국은 키가 컸으며, 힘이 출중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충의대절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의에 격분하여 고경명, 김천일과 더불어 창의하였고, 금산에서 싸우던 고경명이 전사하자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아 8월 1일에 흥덕 남당마을에서 다시 창의하여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과 함께 혈맹을 하고 서해안으로 출병하여 사수함으로써 이웃 고을을 안전하게 지켰다. 이에 권율이 위로의 서신을 보내 칭송하였다.

또한 군량 400석을 모아 200석은 기효증을 시켜 행재소에 보내고 100석은 경상도의 곽재우 군중에 보냈다. 적이 순천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하여 석보에서 대파하여 이 공적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또 정유재란에 창의하여 적을 흥덕 배풍령에서 맞아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부안 호벌치 싸움에서 23일간 전투 끝에 아들 채명달, 채경달과 함께 분전하였음에도 세 부자 모두가 순국하였다. 이에 셋째 아들 채영달이 부형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1872년(고종 9)에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증직과 함께 정려, 복호가 내려졌다.

고덕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초명은 덕봉, 자는 남익, 호는 여곡, 본관은 장흥으로 고응진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 7)에 고창군 신림면[현 흥덕면 제하리] 고려곡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금산에 달려가니 족형 고경명이 이미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장 채홍국 등과 함께 흥덕 남당에서 혈맹을 맺고, 맹주장에 추대되어 군기를 정돈하자 많은 의병이 모여들었다.

의병을 인솔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적을 잡아 죽이지 않고 석방을 유인하는 책략을 역이용하여 크게 이겨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이 다시 침범하자 맹주장으로 적을 맞아 싸우다가 부안 호벌치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1893년(고종 30)에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남당 회맹단은 남당마을 오른쪽에 높이 10m, 직경 20m의 왕릉 모양 구릉으로, 그 앞에 기적비가 서 있고, 앞쪽에 채홍국 등 의병을 모신 모충사가 자리 잡고 있다. 모충사는 재실과 강당, 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24년 4월에 흥덕마을 선비들이 흥덕면 행정마을에 모충사를 건립하여 순절한 의병들의 넋을 위로하였으며, ‘호남흥성창의비’를 세워 의병들을 추념하였다. 남당 회맹단 앞에는 1964년에 고창 군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임진창의남당회맹단기적비’라는 기적비가 있다. 현재 남당마을에 있는 모충사는 1986년 고창군에서 건립하였다.

5.오태리 고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오호리

시 대 백제

흥덕면은 본래 백제 상칠현이었는데, 상칠현의 치소지가 흥덕면 오호리 오태동에 있는 오태리 고성으로 보인다. 상칠현은 신라 경덕왕이 상질이라 하여 고부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후에 장덕현으로 고쳤으나 충선왕이 1308년(충선왕 1) 즉위하자 창덕으로 고쳤고, 다시 창왕 때에는 창왕과 이름이 같아 흥덕으로 고쳤다.

오태리 고성에 대한 기록은 흥덕읍성과 관련하여 문헌에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흥덕현 고적조에 "오태리 고성은 현의 서쪽에 있다."라고 되어 있고, 『문헌비고』에서는 "오태리 고성은 읍지에 현의 서쪽 3리에 있다.’라 하고 있으며, 『대동지지』 11권에서는 "오태리 고성은 성의 서쪽 15오태리성서15리’라고 전하고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오태리 고성에 대한 내용이 신빙성이 떨어지고, 위치도 원래 있었다고 전하는 곳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헌 기록이 전해져 오면서 오기되었거나 불확실한 사실을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태리 고성이 흥덕읍성의 서쪽에 있었음은 확실하다.

오태리 고성은 오태마을 북쪽 구릉에 해당되는데, 이 구릉은 해발 30m 내외로 동서 방향으로 흐르며, 형태는 눈썹 모양을 하고 있다. 오태마을 남쪽에 형성된 신조산마을에 이르기까지 능선이 동남쪽으로 이어지다가 동남쪽 모서리 쪽의 봉우리[해발 66m]를 중심으로 다시 신조산을 향해 서쪽 방향으로 감싸고 있는 형태로 추정된다. 따라서 오태리 고성은 서쪽 방향이 터지고 세 방향을 능선이 감싼 토성이라고 판단된다.

오태리 고성은 토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흔적은 확인할 수 없다. 최근에 오태마을 남쪽에 흥덕농공단지가 조성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실시되었던 발굴 조사에서 오태리 고성과 비슷한 연대의 유적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당시에 오호리 신지매 유적에서는 백제 시대 횡혈식 석실분 6기가 조사되었다. 석실분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으로 모두 할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또한 석실 내부에서는 광견호, 병형토기, 개배 등 다양한 백제 토기가 확인되었다.

3호 석실분에서는 백제 시대 청동 인장이 출토되었는데, 인면은 한 변의 길이가 약 2.5㎝ 내외의 정방형이며, 상부에는 고리형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인장에 새겨진 글씨는 부식이 심하여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의장군지인’ 등 7자 정도가 새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오태리 고성은 백제 상칠현의 치소성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후기에서 조선시대까지 흥덕읍성의 축성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치소이다. 흥덕농공단지 조성 공사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백제 시대의 횡혈식 석실분이 확인되었는데, 출토 유물 중 ‘장군’의 청동 인장은 백제의 지방 통치 체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6.흥덕읍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산22-2

시 대 조선시대

흥덕읍성은 조선 전기에 축조된 읍성으로 추정되는데, 1450년(문종 즉위년)에 전라도 지역의 읍성 정비를 위한 차원에서 실태 파악을 한 결과 개축 대상으로 분류된다. 흥덕읍성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흥덕현의 읍성은 석성이며 규모는 295보”라 기록되어 있는데, 1477년(성종 8)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배풍산은 해발 109.2m로, 7부 능선을 따라 토루가 둘러져 있는데, 흥덕읍성의 평면 형태는 말각 장방형이며, 성의 둘레는 약 950m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규모를 포백척[46.66㎝]으로 환산하면 826m이고,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규모를 영조척[30.8㎝]으로 환산하면 974m이다.

반면 『조선보물고적자료』에 나타난 규모는 1,440m인데, 외벽의 기저부를 기준으로 둘레를 측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상단부의 토루는 전체적으로 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지만, 남동쪽의 토루는 정수장이 생기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토루의 폭은 약 7m 정도이다.

토루의 연결 상태에서 끊어진 부분과 곡부를 이루는 지형을 고려하여 문지를 추정할 수 있는데, 현재 교운리 서문마을과 이어지는 서문지와 북문지가 관찰된다. 남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지형으로 두 개의 소로가 나 있다.

산의 정상부는 평탄한 대지가 동서 방향으로 길이 100m, 폭 30m 정도 길게 조성되어 있는데, 서쪽에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동쪽으로는 잔디가 심어진 평탄지이다. 성안에는 우물이 3개소 있었다고 하나 1개소만이 확인되고 있다. 한편 성 내부 곳곳에서 기와편과 자기편들이 다수 산재해 있다.

정수장 및 여러 체육 및 휴게 시설이 토루의 일부분을 훼손한 채 조성되어 있으며, 정상부의 평탄 지역에도 팔각정 및 기념비, 그리고 잔디 조성 등으로 인해 많이 훼손되어 있다.

흥덕읍성은 배풍산 7부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석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육안으로 보면 토성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학술 조사를 통해 그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1450년대에 개축 대상으로 분류되어 1477년(성종 8)에 완성되었고, 이후 임진왜란 후 치소가 성 밖으로 이주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 전기 읍성의 구조가 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7.모충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

시 대 일제강점기

평강채씨 야수 채홍국, 장흥고씨 여곡 고덕붕, 청주한씨 사복시정 한계상, 야수의 장자 훈련원주부 채명달, 이자 훈련원정 채경달을 모신 사우이다.

1924년에 설단으로 야수를 향사해 오다가 1988년 국도비와 사림의 성으로 맹단의 옆 신실과 강당을 건립하였다. 야수 및 4위와 동의사 121위를 동서로 종향하였다.

모충사 사우는 3칸 건물로 맞배지붕이고, 겹처마이고 앞에 묘정비가 있다.제사일은 음력 10월 10일이다.

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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