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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철수에 대한 정보
비공개 조회수 10,785 작성일2014.02.07
를 원합니다.
그 사람의 책을 읽어보니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어째서 창당까지 이어진건지.
안철수하면 누구나 다 아는 정보와 안철수가 창당을 하였을때 일어날 정치세력의 변화에 대한 정보를 원합니다.

욕설금지 홍보금지 내공냠냠
전부 신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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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혜장철학관
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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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석 칼럼]

“누리꾼 입에 재갈 물리려는 시도”

 

박원순의 ‘양두구육(羊頭狗肉)’

 

 

과거 “광화문에서 [김일성 만세] 외치는 것은 표현의 자유”

지금 “

종북 표현 계속 쓰면 명예훼손, 법적조치”

 

 

최종편집 2014.02.07 18:22:12

 

 

양원석 기자wonseok@newdaily.co.kr

 



조선일보 주장처럼 광화문 네거리에 ‘김일성 만세’라고 부르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는 헌법에 나와 있는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이를 억압하겠다는 뜻.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없는 한 표현의 자유는 인정해야 하는데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보수언론의 주장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2004년 9월 24일 박원순 당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미디어오늘 <국보법 언론자유와 직결 보수언론 보도 이해안가>
      언론의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주장에 대해


********************************************************************************

(자신을) 종북이라고 표현한 글과 (아들 주신씨 관련) 병역비리

정의한 글을 삭제하고 지속되면 법적 조치도 할 것.

대법원은 공인에게 종북이란 표현을 한 경우 명예훼손으로 판시하고 있으며,

아들의 병역법 위반 고발은 현 정부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됐다.

   - 3일 박원순 서울시장,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글 중 일부.

      누리꾼들의 종북성향 비판 및 주신씨 병역비리 의혹 제기에 대해


지방선거를 4개월 앞둔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신을 비판하는 누리꾼들을 행해 공개 경고를 했다.

자신에 대해 [종북]이란 표현을 쓰거나,
자신의 아들 [주신씨의 병역비리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누리꾼들의 글을 삭제하고,
필요하면 법적인 조치도 취하겠다는 것이 공개 경고의 핵심이다.


평소 SNS를 통한 직접적인 소통을 즐겨하는 그가,
누리꾼들에게 [살벌한] 메시지를 전한 이유는 간단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도덕성에 흠집을 낼 위험이 있는 경우의 수를
미리 제거하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선거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
후보자의 도덕적 결함은 정책 실정으로 인한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나타낸다.

심지어 자질부족이나 경험미숙, 부패스캔들은
한 번쯤 봐주고 넘어가는 유권자조차도
후보자 개인 혹은 그 가족의 도덕적 하자에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우리국민들의 공통된 정서이다.

때문에 지방선거를 눈앞에 둔 박원순 시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에게 비판적인 누리꾼들의 존재가 반가울리 없다.

특히 박원순 시장의 과거 언행을 근거로 한 [종북 비판]
아들 주신씨에 대한 [병역비리 의혹]은,
박원순 시장에겐 [피할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민감한 문제이다.

박원순 시장이 누리꾼들을 향해 노골적인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친(親)박원순 지지자들은 당연한 발언이란 반응을 보이면서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반론도 상당히 많다.

무엇보다 선거에 앞서
[넷심]을 장악하려는 그의 태도를 문제삼는 의견이 적지 않다.

과거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이 벌어졌을 때,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보수언론을 신랄하게 비난했던 그가,
이제 와서 대법원 판례를 운운하면서 형사처벌을 암시하는 태도는
적반하장이란 지적이 그것이다.

박원순 시장의 [누리꾼 겁박] 사실이 알려진 직후,
“누리꾼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라는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팩트]를 근거로
박원순 시장의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종북성향을 비판하는 누리꾼들의 주장이
다름 아닌 그의 과거 발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명백하고 현존한 위협으로 볼 수 없다”고 한 그의 발언은, 서울시장 출마를 공언한 정치인에 대한 검증 차원에서
당연히 공개적인 토론의 대상이 돼야만 한다.



대한민국 수도의 시정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후보자의 국가관
개인적인 표현의 자유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박원순 시장의 아들 주신씨를 둘러싼 병역비리 의혹도 마찬가지다.

주신씨에게 병사용 진단서를 발급해 준 의사가
과거 병역비리에 연루됐었다는 점은 가볍게 넘어갈 사안이 결코 아니다.

결국 박원순 시장과 그의 가족을 둘러싼 누리꾼들의 각종 의혹제기는
대부분 [팩트]를 전제로 한다.

박원순 시장의 [누리꾼 겁박] 논란이 거세지면서
[넷심]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SNS인 트위터에서는
박원순 시장의 행태를 비판하는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뻔뻔함의 극치를 보입니다.

박원순 행적을 보면 충분히 종북 아닌가?
국보법 한 발 물러섰다고 면피되나?
박주신 병역비리 아닌가?

맞짱 통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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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나는 左도 右도 中道도 아니다…

 나눔과 사랑 꿈꾸는 혁명가"

 

 입력 : 2014.02.08 07:55 

 

[노동운동가·혁명가에서 나눔 전도사로… 박노해 인터뷰]

 

1984년 발간된 박노해(57)의 시집 '노동의 새벽'은 1980년대의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세상을

흔들었던 시인 박노해는 각국을 돌며 찍은 사진 7만여점 중

120점을 추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진전 ‘다른 길’을

열고 있다.

지난 5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관람객들이 지금과 다르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이덕훈 기자

 

1984년 발간된 박노해(57)의 시집 '노동의 새벽'은

1980년대의 상징이었다.

 

노동과 해방,

문학의 접점에서 만개한 시(詩)들은 '민족문학 70년의 고투 어린 핏방울이 스며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박노해 신화'를 낳았다.

 

한때 '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던 사회주의는 믿지 않는다

난 생태주의자·페미니스트 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
내가 생각하는 보수주의?

인간에 대한 예의 지키는 것

정치할 생각 있냐고?
각 黨에서 부탁은 오지만,

정치는 내 길이 아니야…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임,

사랑 나눠주면서 다할 것

안철수의 '상식'에 반대
IMF 직후 '현실적인 것'은 '돈이 되는 것'으로 굳어져
安의 '상식'은 실용주의 가장 위험하고 나쁜 이념

 

1984년 발간된 박노해(57)의 시집 '노동의 새벽' 은  1980년대의 상징이었다.

 

노동과 해방,

문학의 접점에서 만개한 시(詩)들은 '민족문학 70년의 고투 어린 핏방울이 스며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

박노해 신화'를 낳았다.

 

한때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던

박노해는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社勞盟)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그 수괴로 활동'한 죄목으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노동의 새벽' 출간 후 30년.

노동자,

해고자,

수배자,

혁명가,

경주교도소 777번 무기수였던

박노해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으로 세 번째 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기자간담회에는 40개 매체가 몰렸다.

수갑을 차고 호송차로 끌려가며 "

민중 만세"를 외쳤던 옛 '수괴'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진정한 내가 누구냐,

이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노동의 새벽'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박노해는 과거형이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만난 박노해는 여전히 '스타'였다.

 

2010년 두 차례 사진전은 2만명을 모았다.

종로구 부암동 상설갤러리의 관람객을 합하면 8만명이다.

 

지난 5일 오후 7시 '작가와의 대화'에는 140명이 자리를 메웠다.

20·30대 여성이 많았다.

 

질의응답 순서가 되자 20대 여성이 "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옆자리 여성들도 함께 울었다.

'대화' 후 수십 명이 그의 사인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팬클럽 행사장만큼이나 뜨거운 열기였다.

―30년 전 박노해와 지금의 박노해는 어떻게 다른가?

"전 정말 그대로다.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인 것이다."

―수만 명을 모으는 사진가가 된 것은 엄연한 '변화' 아닌가?

 

1991년 3월 서울 중부경찰서에
수감되는 박노해.
‘얼굴 없는 시인’이던 그가 처음으로
일반에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만약 지금 재심(再審)을 한다면 그때 일이 무슨 죄가 되겠나.
군사독재였기 때문에 인간적인 몸부림이 처벌당했던 것이다.
 
(사노맹이) 누구를 죽인 것도 아니고,
파괴한 것도 아니지 않나.
사상의 자유를 가진 나라에 자본주의도 있고 사회주의도 있는 것이다."

―지금도 사회주의를 믿나?

"당연히 아니다.
저는 생태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다."

―박노해가 말하는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전통 가치를 지키자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말고,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제가 상임이사로 재직하는 비영리 사회단체 나눔문화의 고문 중에는 보수 원로도 있다."

―일부에서는 '변절자'라고 하는데.

"투옥 후 사회주의가 붕괴했다.
호송차를 타고 오가다 만난 주사파들은 '소련이 망한 것이지,
주체 사상은 건재하다'고 했다.
 
좀 있다가 '스탈린이 망한 것이지,
레닌주의는 옳다'고 했다.
 
6개월 지나니 '레닌주의가 잘못됐지,
맑스 옳다'고 했다.
그러더니 '후기 맑스는 틀렸지만,
초기 맑스는 맞다'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가 믿었던 진리를 처절하게 성찰했다.
 
사회주의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 정치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담지한 비판 정신은 계승하겠다고 했더니 변절자라고 한다."

―보수 원로도 모시고 사회주의도 계승하면,
'양다리'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지 않나?

"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중도도 아니다.
어느 쪽인지 현실에서 표현할 말이 없다.
 
논리로 세상을 보는 지식 엘리트 집단은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민초들은 예리하게 알아본다."

―가수 이효리와 윤도현,
배우 황정민,
김혜수도 지지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시장을 찾았다.
'인기' 비결은?

"감성으로 묶인 연예인들의 집단지성이 작용한 것이다.
제 시를 보고 제 삶을 지켜보며 자신들이 흔들릴 때 거울처럼 비춰보다 저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간담회와 책에서
'참나'
'진정한 나'를 강조했다.
관념적이고 몽롱한 잠언을 재생산하는 '힐링 멘토'의 강연 같았다.

"저는 종교인 힐링 멘토와 분명히 다르다.
'관념'의 반대는 현실이지만,
IMF 직후부터 '현실적인 것'은 '돈이 되는 것'으로 굳어졌다.
 
안철수씨가 '상식'을 들고 나왔는데 가장 위험하고 나쁜 이념이다.
실용주의이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영악하고 똑똑한가.
제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린 것은 몽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잃어버린 얼굴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1984년 9월 발간된 ‘

노동의 새벽’

초판 표지. ‘

노동 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친다’는

박노해의 서문과 함께 민중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던 고(故) 오윤의 판화가 실렸다.

 

―일부에서는 '노동의 새벽'을 쓴 혁명가라는 과거를 팔아 살아가는 '왕년의 시인'이라고 한다.

"이미 늙어버린 40대나 50대가 그런 얘길 한다.

 ('노동의 새벽'이 나왔던) 그때는 폭포 같은 시대라 물방울이 떨어져도 폭포 소리가 났던 것이다.

 

저는 3년 전에도 시집을 냈다.

 

시대정신을 가지고 전 세계 대륙을 다니면서 쓴 시집으로는 '역사상 최초'였다.

그들은 그 시를 읽어보지도 않고 과거에만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자급자족의 토박이 소농(小農)이 최고로 중요하다.

개펄,

강,

산 등 공공 공간과 인간성도 지켜야 할 가치다."

전시장에 걸린 사진에는 티베트 승려,

라오스 가족,

아체의 바리스타가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의 노동자는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이 땅의 현실은 찍지 않느냐"고.

"지금은 지구인류 시대다.

레바논 구석에 가도 '삼송(삼성)'과 '현다이(현대)' 간판이 붙어 있다.

70억 인류 전체로 보면 이제 한국 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

 

존재감도 없는 제가 한국 현실에 뛰어들어도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정치를 할 생각이 있나?

"제가 정치하겠다고 하면 어마어마한 세력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좌우를 다 무너뜨릴 만한 신당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각 당에서 여러 가지 부탁은 지금도 오지 않겠나.

그러나 저와 맞는 길이 아니다."

―석방 직후 좌우 진영에서 후원금을 많이 줬다는데.

"돈을 줘도 제가 그걸 받았겠나.

제 수입은 인세,

강연료,

원고료다.

부동산도 일절 없다."

―파주 헤이리에 땅 수백 평이 있다는 소문도 있다.

"제가 아니고 안사람이 땅을 계약했다가 해지했다."

―그간의 생각을 집약한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던데.

"감옥에서부터 써온 1만5000쪽 원고를 1000쪽으로 압축 중이다.

 

올해 안에 내놓을 예정이다.

 

그래야만 저를 믿고 먼저 죽어간 벗들에 대해 실패한 혁명가로서,

살아남은 자로서 책임을 질 것 같다."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더 구체적으로 질 생각은 없나?

"나눔문화재단을 통해 사랑을 나눠주는 대안적인 삶을 찾으며 현실 깊숙이 활동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제일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

혁명'을 꿈꾼다고 했다.

'사람 혁명'과 '사랑 혁명'을.

"혁명이란 사랑의 확장을 말한다"고도 했다.

 

"민중 만세"를 외쳤던 그에게서 되풀이 듣는 '사랑'은 기자의 귀에 외계어처럼 울렸다.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그는 "

사진 기술로만 보면 동호회 사람들이 비웃을 정도"라고 자평했다.

 

"기술 없이 어떻게 찍느냐"고 물었더니 다시 그 답이 나왔다.

 

"사랑하면 다 된다."

 

박노해는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본명은 박기평이며,

필명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의 준말이다.

 

1977년 서울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경기도 안양의 기능공,

버스회사 운전사로 일했다.

 

1982년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김진주(60)씨와 결혼했다.

 

1983년 '시와 경제' 제2집에 '시다의 꿈'등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1년 3월 반국가 단체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를 이끌며 무장 혁명을 도모한 죄목으로 검거돼

무기징역을 살다가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201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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